소설리스트

현계지문-915화 (915/916)

외전 37화. 참살, 이별, 명충(螟蟲)

구수도철의 머리 없는 시체가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구원빙화선법이 지닌 위력이 석목이 예상한 바를 크게 벗어나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묘공도 놀란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도를 소환한 후에 챙겨두었다.

구수도철의 거대한 시체가 허공에 쓰러져있었는데 아무런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금색 원숭이의 몸에서 빛이 흘러 다니더니 막강한 육신이 빠르게 줄어들어 사람만 해져 석목은 곧 인족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석목은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단약 두 알을 삼키고 나서야 석목은 안색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묘공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약을 삼켰다.

둘은 기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강이 아니었더라면 절대 구수도철을 해치우지 못했을 터였다.

묘공이 도철의 시체 옆으로 다가가서는 눈에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푸른 도를 휘둘러 시체를 찢어버렸다.

퍽!

구수도철이 숨을 거두는 순간, 몸속에 깃든 영력은 이미 대부분 흘러나갔다. 그러니 막아낼 힘이 거의 없어 시체는 가볍게 두 덩이로 잘렸다.

묘공이 손을 흔들어 흡입력을 날렸다.

잠시 후에 하얀빛 두 덩이가 구수도철의 몸에서 날아 나왔는데 그건 세월의 강물로, 이미 두 덩이로 갈라진 상태였다.

두 덩이 세월의 강물을 합쳐보니 이전보다 훨씬 작아졌다.

석목은 두 덩이의 세월의 강물을 보는 순간, 눈에 빛이 반짝이며 묘공을 한 번 쳐다보았다.

묘공도 때마침 석목을 바라보았기에 둘은 눈이 마주쳤다. 이에 주변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수령자는 채아와 비슷한 크기로 줄어들어 석목의 어깨에 앉아서는 세월의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하, 세월의 강물이 두 개 있으니 석목 도우, 그럼 우리끼리 하나씩 가집시다.”

묘공이 큰소리로 웃으며 금빛을 날려 세월의 강물을 감아 석목의 앞으로 보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란빛을 날려 세월의 강물을 끌어왔다.

세월의 강물은 두 갈래로 갈라졌지만 여전히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석목에게는 그리 큰 소용이 없었다.

“여기 좋은 물건들이 좀 있군요.”

묘공은 다시 금빛을 날려 도철이 남긴 시체를 뒤졌다.

묵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빛이 수많은 보물들을 감고서 나타났다.

대부분은 좋은 물건으로 수화선정과 비슷한 등급이었다.

그리고 영보도 몇 개 있었는데 오색 전창도 그중에 있었다. 또한 다른 영보들도 모두 귀한 보물들이었다.

“구수도철의 몸속에 공간이 하나 있군요. 그러나 아쉽게도 세월의 강물 속에 깃든 시간의 힘 때문에 공간이 훼손되어 많은 물건들이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이게 전부군요.”

묘공은 아쉬운 듯이 말했다.

묘공은 다시 손을 흔들어 보물을 절반으로 나눈 후에 석목에게 주었다.

석목은 사양하지 않고는 건넨 보물들을 전부 챙겼다.

“석목 도우, 우리가 힘을 합친 목적은 이미 달성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우님께서 갖춘 실력이라면 아마 머지않아 상계로 비승하겠지요. 상계에서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묘공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길 바랄 뿐이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또 봅시다.”

묘공은 매우 바쁜지 석목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멀어져가는 묘공을 바라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묘공이 부탁한 일은 끝났으니 묘공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세월의 강물! 하계에도 이런 기이한 보물이 있다니! 하하!”

묘공이 떠나가자 수령자는 표정이 바뀌면서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는데 매우 흥분한 모습이었다.

“왜? 이걸 갖고 싶어? 이 속에 흐르는 시간의 힘이 네게도 쓸모가 있다고?”

석목이 물었다.

석목은 세월의 강물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리 욕심나지는 않았다.

석목은 시간 법칙을 하나도 깨우치지 못해 이 물건은 계륵과도 같았다.

“시간의 수정 따윈 관심이 없어. 그러나 시간의 힘을 머금은 물은 내게 아주 유용하지. 나중에 받은 보물들 속에 있는 시간의 수정은 네가 연화시켜서 가져. 그 수정으로는 천겁이 떨어지는 시간을 미룰 수 있으니. 그리고 나머지 물은 전부 내게 줘야 해.”

수령자가 말했다.

“시간의 수정에 이런 효과가 있다고! 천겁을 미룰 수 있다니?”

석목이 눈을 반짝였다.

천겁이 곧 다가오리라는 사실을 석목은 직감했기에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만약 시간의 수정이 천겁이 떨어지는 시간을 늦출 수만 있다면 석목은 더 충분히 비승을 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또 종수, 서문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질 터였다.

“음, 연화해서 몸속에 넣으면 돼.”

수령자가 말했다.

석목은 흥분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란빛 몇 갈래를 날려 세월의 강물을 꽁꽁 감쌌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도철의 시체로 던져 신식으로 시체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런데 도철의 몸에 혈아정이 없어 석목은 눈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도철의 시체는 무기를 제련할 수 있는 좋은 재료였으나 석목은 재료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도철의 시체는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니는 게 매우 번거로웠다. 그래서 석목은 곧장 돌아서서 밖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때, 공간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격전으로 인해 작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라의 심장 비경이 모두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커다란 공간 균열이 찢어지더니 온 비경이 곧 무너지려고 했다.

“큰일이다. 세월의 강물은 수라의 심장을 이루는 핵심이었어. 너희가 그걸 가져가 버렸으니 지지대가 무너진 셈이라 비경이 곧 무너질 거야.”

수령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안색이 굳더니 몸에 노란빛을 드리웠다. 그리고 고만족과 수라주 일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반나절 뒤, 수라의 심장 비경 밖에 뚫린 공간 통로에서 노란빛이 날아 나왔다.

노란빛이 사라지면서 수십 명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석목과 고만족, 그리고 수라주 일족이었다.

공간 통로는 극도로 불안했고, 안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통로 깊은 곳에서 전해졌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허공에선 난류가 흔들리며 파동을 일으켰다.

“수라의 심장 비경이 곧 무너지겠군. 휴!”

구원 족장이 공간 통로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수라의 심장 속에 잠든 수많은 자원도 함께 사라질 터였다.

나소 족장도 아쉬워했지만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석목을 향해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석목 도우님, 감사합니다. 도망치지 못 할 뻔했어요.”

모두가 석목에게 인사를 올렸다.

두 종족은 구수도철의 자수 둘을 죽이며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지만 희생된 사람은 없었다.

“당신들을 데리고 들어갔기에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책임을 지고 데리고 나와야지요.”

석목이 담백하게 말했다.

“저희가 별 도움이 되지도 못했군요. 헌데 석목 도우님과 묘공 도우님은 구수도철을 죽여 우리 두 종족의 원수를 갚아주셨지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구원이 진심으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온 목적은 바로 도철을 해치우는 것이었죠. 우리는 각자 세운 목표가 있어 그 과정에서 서로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었다.

“일을 마쳤으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종족 사람들이 미련이 남는 듯이 석목에게로 다가와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고 하자 석목이 다급하게 말렸다.

석목은 이런 순간이 여전히 어색했다.

말을 마친 석목은 손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노란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구원과 나소는 서로 한번 마주 보고는 깊은숨을 내뱉었다.

석목은 실력이 막강해 두 사람은 석목과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석목은 두 사람과 연을 맺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구원 족장님, 중요한 세력인 명룡 일족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족장님은 이제 어쩌실 계획입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 함께 명룡 일족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누빕시다.”

나소가 열망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죠.”

구원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천정이 이미 멸망했으니 구원은 고만족들을 데리고 뿌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구원은 수라성에 더는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유리한 점이 있다면 수라주 일족과 연합하는 편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두 종족은 잠시 재정비를 거친 후에 비경에서 떠났다.

* * *

수라의 심장 비경 속, 구수도철의 시체가 허공에서 떠다녔는데 공간의 힘을 따라 흘러 다니는 도철의 시체는 마치 뿌리째 뽑힌 풀과 같았다.

도철은 이미 죽어버렸지만 단단한 육신은 공간의 힘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굉음이 울려 퍼지며 수라의 심장 비경 일 층과 이 층을 이루는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이 시공간 난류에 휩싸여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수십 리나 되는 땅이 시공간 난류에 휘말려서는 도철의 시체 근처로 날아가 부서져 버렸다.

이때, 백 장 정도 되는 검은 그림자가 그곳에서 날아 나와 도철의 시체에 붙었다. 그렇게 날아온 그림자는 벌레였는데 지네 모양이었지만 지네와는 또 달랐다.

만약 나소와 구원이 비경에 있었더라면 둘은 이 벌레가 수라의 심장 비경에 사는 명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 벌레는 평범한 명충과 조금 달라 온몸에 검은 털이 자라나 기이한 느낌을 풍겼다.

검은 명충은 도철의 시체로 올라가 코로 시체 냄새를 맡으며 환호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맛난 음식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렇게 명충이 체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시체를 물어뜯어 피부를 파헤친 후에 빠르게 살로 파고 들어갔다.

* * *

며칠 뒤, 남해성의 야만족들이 머무는 백마산 뒷산의 산골짜기.

백마산의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얼마 전에 벌어진 이변 때문에 야만족의 성전에는 순찰꾼이 다녀갔다. 그러나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순찰꾼은 다시 돌아갔다.

뒷산 산골짜기의 허공에서 파동이 일더니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허공에서 서서 푸른 산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남해성을 떠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생사를 오갔기에 오랜 시간을 떠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석목은 허공에 서서 노란빛으로 변하여 동주 반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석목이 기운을 숨기지 않고서 한창 날아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금빛과 하얀빛이 마중을 나왔다.

석목은 멈춰 서서는 웃는 얼굴로 두 갈래 빛을 바라보았다.

금빛과 하얀빛이 흩어지면서 종수와 서문설이 나타났다.

“수아, 설아, 돌아왔어.”

석목은 눈앞에 선 두 여인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두 여인은 눈물을 머금고는 석목의 품으로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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