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회: 죽음 -->
“일권복호(一拳伏虎)!”
둔탁하면서도 강렬한 기세를 내뿜던 주먹이 상대의 머리를 가격하는 순간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맹한 공격을 정통으로 받아낸 사내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지만 크게 내상을 입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쳇.... 역시 방금 전 그건 독이었나?’
방금 전 맞은 암기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 같았다.
“역시 화산의협이라 불리는 제갈 사혁 대협이시오!”
피인지 땀인지 분간도 안가는 액체가 얼굴선을 타고 흐르자 제갈 사혁이라 불린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 고금을 통틀어 답이 없는 새끼가 뭐가 어쩌고 어째?!”
사혁은 기가 막혔다. 평소 같으면 발밑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보다 더 하찮은 사파의 쓰레기 주제에 고작 같잖은 독 하나 믿고 설치는 꼴이라니. 그리고 그 같잖은 독에 중독돼서 빌빌거리는 자신의 꼴은 또 어떠한가?
“그만 날뛰실 때도 되지 않았소?”
“닥쳐, 새꺄!”
“듣던 바대로 그 성격 한번 참 대차시오. 그대가 정령 제갈세가의 장손이란 말이오? 본인은 그 사실이 상당히 의심스럽소.”
“족보라도 가지고 와서 내 이름 확인시켜 주리?”
턱 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손으로 받아 상대를 향해 날리자 붉은 피는 암기가 되어 날아갔다. 평소 때라면 세상 그 어느 암기보다 강력했겠지만 독에 중독이 돼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여 내공 밀도가 약해져 마두의 가죽옷도 뚫지 못한 것이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화산의협. 이미 내공을 상당히 소진하셨을 터인데.”
“하아……. 이 자식이 사람 쪽팔리게!”
누구보다 무공에 자신이 있었던 사혁은 자신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겨우 이 따위 쓰레기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하나만 묻자. 진짜로 무형독이라는 게 있었냐? 그런 게 가능해?”
무림에서 풍문으로만 듣던 무형독에 자신이 중독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흑도 사마 연맹. 흔히 흑사련이라 불리는 이 조직은 정도(正道) 무림 연맹에 버금가는 거대 사파 조직이다. 이 조직은 30년 전, 마교와 무림맹 간의 ‘청해 100년 전쟁’이 끝나자 세력이 약해진 무림맹과 크고 작은 알력을 다투며 자리를 잡은 단체였다.
제갈 사혁은 무림맹에서 특수 임무를 받고 절강성에 가는 길이었다. 임무 내용은 흑요칠마(黑妖七魔)라 불리는 7대 마두 중 삼마(三魔) 종방영(棕訪塋)을 처단하는 일.
종방영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가 머무는 객잔으로 가 덮치려는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게 바로 이 흑사련이었다.
“니들, 종방영이 뒤라도 핥고 다니냐?”
“종방영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미친 새꺄!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사람한테까지 주둥이 다물 생각이냐? 그냥 불어, 자식들아. 죽을 사람 소원 좀 들어줘라, 정말 궁금해서 그런다.”
조금 전까지 힘차게 육두문자를 내뱉던 것과 달리 제갈 사혁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호, 화산의협께서는 무언가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소.”
까끌까끌한 수염을 만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청사단 단주의 모습에 사혁의 미간에 천(川) 자가 새겨졌다.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시니 본인의 명예를 걸고 직접 말씀드리겠소. 우리는 흡정마공(吸精魔功) 종방영을 처리하러 온 사람들이오. 그리고 그 무형독은 종방영에게 쓸 독이었고. 뭐, 화산의협이라는 걸출한 정도의 무림 고수를 잡았으니 종방영의 처분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지금 꿩 대신 잡혀버린 닭이라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떻소? 무형독이 당한 기분이?”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제갈 사혁은 보는 사람이 신기할 정도로 납득이 빨랐다.
“아니, 그런데 이런 미친 새끼가! 너는 내가 졸(卒)로 보이냐!”
그 순간 사혁의 눈동자가 핏빛을 머금었고 동시에 강렬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공을?”
순식간에 적을 향해 돌진한 사혁은 청사단 단주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겨 그대로 척추와 함께 머리를 뽑아버렸다.
“단주님!”
청사단 단원들은 자신들의 단주의 머리가 사혁의 손에 붙잡힌 채 흉측하게 떨어져 나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놀랐냐?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도 그 이름은 들어는 봤지? 자하신공(紫霞神功)이라고.”
무형독은 혈액 순환을 방해해 내공의 흐름을 막고 종극에는 목숨을 잃게 만드는 독이다. 하지만 무형독에 당하고도 자신들의 눈앞에서 멀쩡하게 내공을 운용하는 이가 있으니 청사단 단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하지 마라! 적은 한 명이다!”
지금은 특수 임무 수행 중이었다. 비록 단장이 당했다고는 하나, 적은 독에 절어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상처 입은 호랑이였다. 그렇게 생각한 청사단 단원들은 침착하게 검을 빼들었다.
“내가 오늘 흑사련 련주를 대신해 삼도천으로 네놈들 여름휴가를 보내주마!”
사혁의 주먹이 상대의 얼굴을 짓이기는 순간 그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됐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 시작된 싸움은 이름 없는 꽃에 이슬이 맺힐 때 끝이 났다.
자신의 피와 적의 피를 동시에 뒤집어 쓴 제갈 사혁은 죽은 청사단 단장의 몸을 의자 삼아 깔고 앉은 뒤, 호랑이 무늬가 새겨진 곰방대를 꺼내 그 안에 쑥을 넣고 입에 물었다.
“빌어먹을 자식들, 해독제도 안 가지고 다니나?”
단장의 몸 어느 곳을 뒤져도 무형독의 해독제는 나오지 않았다. 해독제가 나오지 않았다는 뜻은 무형독이 만들어진 게 최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지만 이제 그런 건 자신과 상관없어졌다.
조용히 쑥을 태워 피우던 사혁은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내뱉었다.
“기껏 자하신공도 익혔는데 겨우 이런 곳에서.”
화산파의 절세무공인 자하신공을 익혔다는 것은 곧 미래의 화산파 장문인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자신의 목숨이 다하면 사라질 허명.
입에서 핏물을 쏟으며 힘없이 곰방대를 놓쳐버린 제갈 사혁은 땅에 떨어진 그것을 다시 주워 입에 물었다.
“꼴이 이게 뭐냐? 꼴이 이게 뭐냐, 사혁아!”
자하신공으로 인해 잠시 사라진 듯 보이던 독 기운이 다시금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오래 썼네. 결국 그 시절부터 함께 한 건 이거뿐이구나.”
사혁의 곰방대는 그가 강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구입한, 정확히는 죽은 대사형이 하산할 때 자신에게 사주었던 물건이었다.
문뜩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백부와 백모도 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아. 젠장! 젠장! 빌어먹을!”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사촌 여동생이 시집가는 것도 보고 싶었고 사촌 남동생이 장가가는 것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당당히 화산의 장문인이 되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젠장…….”
스물하고도 아홉. 화산파 제1대 제자 화산의협 무성은 홀로 쓸쓸히 눈을 감았다. 강호 무림을 살아가는 누구나 그렇듯 한 많고 탈 많은 욕심과 번민이 가득한 인생이었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