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회: 제갈세가 -->
호북에 자리한 제갈세가(諸葛世家)는 예로부터 문무를 겸비한 수재들을 많이 배출해 내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 민은 당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무림인 중 한 사람으로서 제갈세가를 이끌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 너무 오래 걸려.”
다급한 제갈 민의 물음에 그의 부인인 한미욱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산모의 산통은 오래가는 법입니다.”
“허허……. 조카의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결혼한 지 6년이 되도록 아이가 없던 부부이기에 동생 내외가 낳을 조카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주원이 이놈은 언제 집에 올지.”
제갈 민의 동생, 제갈 주원은 지금 산통을 겪고 있는 산모의 지아비이며 이제 곧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무림맹 총사를 맡고 있어 바깥일을 돌보느라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그 날도 부인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
“응애! 응애!”
집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대차게 울려 퍼지자 제갈 민은 호쾌하게 무릎을 쳤다.
“옳다구나! 부인, 어서 갑시다.”
사내아이가 태어나자 제갈 민은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아이에게 제갈 사혁(諸葛 思奕)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본래는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하나 집안의 장남이자 가주인 제갈 민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이번에 태어난 사내아이는 비록 방계지만 제갈세가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이는 사혁이 제갈 민의 양자가 될 수 있음을 뜻함과 동시에 제갈 사혁이 뒤를 이어 가주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백부가 손수 이름을 지어 준다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컸다.
“요 귀여운 녀석!”
제갈 민이 사혁의 볼을 꼬집고 있을 때 제갈세가의 안주인인 한미욱은 사혁의 모친인 남궁 이화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수고했네.”
산고의 고통 때문인지 남궁 이화는 힘들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당신, 사람 좀 데려오세요. 지금 당장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니까.”
“형님, 젖을 물리는 건 제가…….”
무리하게 일어나려 하자 제갈 민은 그런 남궁 이화를 말렸다. 아이도 아이지만 산모의 건강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네는 가만히 있게,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사람이 아이에 젖을 물리겠다니. 그 마음은 잘 알지만 몸이 상할 테니 쉬고 있게. 내가 얼른 마을 아낙을 데려올 테니.”
“동서, 일단 아이를 안아보게.”
한미욱은 갓 태어난 제갈 사혁을 조심스럽게 안아 남궁 이화에게 안겨주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리고 여긴 도대체!’
사혁은 자신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25년 전 자신을 버리고 외가로 떠나버린 어머니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제갈 사혁은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곧 이 모든 고민들을 훌훌 털어버렸다. 아버지 제갈 주원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의 아버지인 제갈 주원은 도착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이제 막 태어난 아들인 제갈 사혁에게로 달려왔다.
“사혁아, 아비다! 아비를 알아보겠느냐?”
사혁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렇게 생기셨구나…….’
아버지인 제갈 주원은 제갈 사혁이 세 살이 되던 해 전장에서 사망했다. 때문에 그가 아버지의 얼굴을 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
만약 정말로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이는 커다란 기회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이 되는 해 돌아가셨다 들었으니 다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굳게 각오를 다진 사혁은 그 날부터 사력을 다해 매일 아버지 제갈 주원의 품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아버지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안으려고 하기만 하면 목을 놓아 울었다.
이는 어머니인 남궁 이화한테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배 아파 낳은 아들인 사혁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가 어찌나 아버지를 잘 따르는지 이 어미한테는 안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부인, 질투하는 거요?”
“배 아파 낳아 주었는데 이리도 몰라주니 서운합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남궁 이화를 보며 제갈 주원은 긴 객지 생활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다.
“이리하다가는 우리 사혁이 때문에 무림맹에 제때 입성하지도 못하겠소. 이리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으니 말이오, 부인.”
제갈 사혁은 밤이 깊도록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인 몸으로 하룻밤을 꼬박 세울 수는 없었다.
사혁이 잠든 것을 확인한 제갈 주원은 남궁 이화에게 아이를 안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돌아가 보아야겠소.”
“이 늦은 시각에 말입니까?”
“요즘 흑사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 내 어찌 무림맹의 총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다녀오리라.”
“서방님, 몸 조심히 다녀오셔요.”
그렇게 제갈 주원은 밤이슬을 맞으며 급히 집을 떠났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깨어난 제갈 사혁은 집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를 찾으며 정신없이 울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아주지 못했다.
제갈 사혁은 깨어있을 때는 내가심법(內家心法)을 활용해 어려서부터 호흡하는 법을 바꾸고 내공을 익히기 위한 기초적인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아기의 신체는 환골탈태한 육신과 다르지 않다던 무림의 풍문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육체를 이대로 유지할 수만 있다면…….’
환골탈태는 과거에도 스물하고 일곱을 넘겨 이룬 경지였다. 물론 그 해 화산파의 장문인이 된 사백, 도호 진인(道昊 眞人)에게 옥진산을 양도받은 후 내공을 주입받음으로써 이뤄낸 경지였다.
‘이대로만 차근차근 수련을 한다면 그 당시보다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 있겠어.’
아기의 몸이 혈맥이 막히지 않고 노폐물이 쌓이지 않은 자연 상태의 몸인 점을 감안해 사혁은 제갈세가의 기초 심법인 소천성공(小天星功)으로 약간의 내공을 모았다.
소천성공은 축기가 굉장히 느리지만 정순한 내공을 축적하는데 그 의미가 있으며 무당파의 육양신공(六陽神功)과 함께 가장 안전한 심법이었다.
소천성공으로 쌓은 극소량의 내공은 대부분 혈맥에 독소가 쌓이면 그것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데 사용했다.
본격적으로 내공을 쌓기 시작한 것은 화산파의 내공심법인 천지일기공(天地一氣功)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부터인데 이 천지일기공을 대성하면 다음 단계인 건곤신공(乾坤神功)으로 넘어갈 때 비로써 화산파의 장문전승 비급인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익힐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 * *
시간이 지나고 제갈 사혁은 10살이 되었지만 그의 곁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었다.
“훌륭하구나, 혁아.”
마치 태어날 때부터 검을 다뤄본 사람처럼 제갈 사혁의 검술은 노련한 검객의 그것과 비슷했다.
“벌써 검을 장난감 다루듯 다루다니. 더 이상 이 백부가 너를 위해 해줄 것이 없구나.”
원래 어려서부터 배웠던 검술이기도 하고 화산파에서도 검법과 권법을 동시에 연마했던 사혁이기에 가문의 기초 검술을 익히는 데 막히거나 난관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한 번 가르쳐준 초식은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 민만큼이나 훌륭하게 펼쳐냈다.
“훌륭하면 뭐해요. 그래 봤자 방계인데.”
열 살 아이에게서 나온 말치고 굉장히 세속적인 언사였기 때문에 제갈 민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흠흠……. 이놈아!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게냐? 너는 가문의 장남이고 장차 제갈세가는 너의 것이다. 어찌 그걸 모르는 게냐?”
제갈 민은 장남으로 태어나 가주 자리에 오른 전형적인 장자 승계의 세습 전통으로 가주가 되었지만 그 본인은 실력으로 가주를 뽑아야 한다는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때문에 제갈 사혁을 누구보다 정통성 있고 자신의 사상에 어울리는 그러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모든 것에는 전통이 있는 법입니다. 백부님, 어서 아들이나 보세요.”
“어찌 너 같은 조카가 나왔을꼬?”
가전 무공 중 기초를 다지는 소천성 검법(小天星 劍法)을 고작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는 제갈세가 역사상 제갈 민의 조부인 제갈 장진,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제갈 장진은 당대 최고수 중 한 명이었고 화산파의 절세 검객이었던 담종 진인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검의 달인이었다.
제갈 민은 다시 한 번 세가가 부흥하기를 꿈꿨고 과거 세가의 영광을 제갈 사혁이라면 반드시 재현해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가족을 떠나 무공을 가르치는 한 사람의 무림인으로서 제갈 민은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 사혁은 무엇을 하나 가르쳐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따라했고 절대 실수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아이가 검술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있을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보다 더한 걸 가르쳐줘도 결과는 미리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질문을 하거나 고민을 하지 않았다.
검 수련을 마친 사혁은 우물로 가 등목을 하며 더위를 쫓아냈다. 그런 그의 옆으로 제갈세가의 젊은 총관인 우명이 다가왔다.
“도련님, 시키셨던 화산파 장로인 도산 진인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습니다.”
등목을 하던 사혁은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도산 진인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총관에게서 받았다.
“수고했어, 우 총관.”
“그런데 도련님, 어째서 화산파 장로인 도산 진인의 위치를 파악하라 하신 겁니까? 그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특별한 인연이라? 첫 만남이 특별하다면 또 이상하리만큼 특별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찾아가서 화산파 제자라도 시켜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볼까 하고 말이야.”
화산파가 아무리 흔들림 없는 절대 정파라고는 하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제갈세가의, 그것도 유일한 후계자가 할 말은 아니었기에 총관은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도랸님!”
“도랸님이 아니라 도련님이야, 우 총관.”
사혁은 얼굴에 튄 침을 닦으며 우 총관을 째려봤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도련님은 대 제갈세가의 후계로서 장차…….”
“나도 알아. 하지만 백부님은 아직 충분히 아들을 보실 수 있어. 긴말하지 않을게. 나는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가문에 대한 모든 승계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왜 화산파에 들어가려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을게. 하지만 우 총관, 시간을 두고 기다려줘. 백부님은 아직 아들을 보실 수 있어.”
밑도 끝도 없이 화산파의 문하생이 되겠다는 어린 도령을 보며 우 총관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그런 우 총관을 보며 사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우 총관은 충직한 자야. 이제 곧 내가 집을 떠나려 한다는 것을 백부님께 고하겠지. 하지만 우 총관, 기다려라. 현종은 반드시 태어난다.’
사혁이 알고 있는 대로라면 제갈 민의 아들인 제갈 현종은 앞으로 1년 뒤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 제갈세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인물이 된다는 사실을 사혁은 잘 알고 있었다.
등목을 마친 뒤 옷을 갈아입은 제갈 사혁은 곧바로 가주전을 찾았다.
“백부님, 소질, 사혁입니다.”
“들어오너라.”
가주전에 들자 백부인 제갈 민과 백모인 한미욱, 그리고 그들의 딸인 제갈 혜가 사이좋게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라버니!”
일곱 살 난 사촌 여동생 제갈 혜가 달려오자 사혁은 혜아를 안아주었다.
“혜아야, 이렇게 무작정 안겨오니 이 오라버니는 너무 힘들구나.”
“그래도 혜아는 오라버니가 좋아요.”
사혁은 백모에게 다시 혜아를 안겨준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백모인 한미욱은 자리에 앉은 사혁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사혁도 그런 백모의 태도를 은연중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음음…….”
백모가 백부에게 보내는 일종의 비밀 신호에 사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슬쩍 조카의 눈치를 살핀 제갈 민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음… 그러니까, 이렇게 가족회의를 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우리 제갈세가와 친교를 나눴던 곳에서 이번에 아주 큰 경사가 생겨 우리를 초대했더구나.”
“안 가요.”
사혁의 말을 들은 제갈 민은 순간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
“싫어요.”
이제 겨우 열 살. 영특한 조카이지만 이럴 때는 정말이지 백부인 제갈 민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 백모인 한미욱이 나섰다.
“혁아, 남궁세가는 오래 전부터 제갈세가와 친교를 나눠왔고 또 남궁세가에는 너의 어머니가…….”
“저에게 어머니는 그날 돌아가시고 없습니다.”
“혁아!”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말하자 평소에 사혁에게 야단 한 번 안쳤던 한미욱이 난생 처음으로 조카를 크게 야단쳤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거늘 어찌 이러는 것이냐. 지난날 너의 어미가 너를 버리다시피 떠났다지만 어디 그게 너의 어미만의 잘못이더냐? 서방님이 돌아가시고 마음을 잡지 못한 동서가 친정 가족이 그리워 떠난 것을!”
사혁의 아버지가 전사한 후 그의 어머니인 남궁 이화는 친정인 남궁세가로 떠났다. 남궁세가에서는 양해를 구해 사혁도 데려가려 했지만 가주인 제갈 민은 그가 유일한 장손임을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
남궁 이화는 아들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친정으로 떠났고 제갈 사혁은 그런 어머니를 증오했다.
‘지난 생애와 하나도 다르지 않네, 그런 면은…….’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