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회: 제갈세가 -->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나이가 들어도 그때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자신을 떠난 부모를 이해하고 그리워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리워하는 것을 거부한 채 부모를 미워하기도 한다.
지난생애의 어린 제갈 사혁은 그리움을 택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차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잊어갔다. 어려서는 몰랐다. 모든 게 다 희미한 기억의 단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애에서는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고 그리움을 택하는 대신 원망을 택했다. 울며불며 매달려도 떠날 것을 알기에 처음부터 매달리지도 않았다.
“어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이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있느냐?”
또 새로 알게 된 것은 백모의 거짓말이었다. 지난 생애에서 사혁은 어째서 어머니가 떠나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른인 백모는 제갈 사혁이 상처받지 않도록 사실을 숨긴 채 거짓말을 해주었다.
생각해 보면 과거 자신은 예쁜 월병 포장처럼 잘 포장된 백모의 거짓말 때문에 그리움을 택했었다.
“백모님, 더 할 말 없으시면 가족회의가 끝난 줄 알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혁아! 사혁아!”
어미처럼 키운 백모의 부름에도 제갈 사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큰일이군. 모자간이 어찌 이리도…….”
제갈 민이 바닥을 응시하며 한탄하자 부인인 한미욱이 고개를 저었다.
“복중에 태아가 있을 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더구나 임신 중일 때 지아비가 죽었으니 동서도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아들인 사혁이에게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냉정히 뒤돌아 가버린 그 사람을 나는 용서할 수 없소. 그래도 내 딴엔 혁이를 위해 남궁세가에 갈까 마음을 잡았거늘. 아이가 이토록 싫어하면 나도 방법이 없소.”
“그 아이가 혜아와 같은 일곱이라 하지요?”
“혜아와 같은 나이이고 겨울에 태어났다는군. 분명 주원이 놈 딸이 분명한데도 남궁 씨를 쓴다더군. 허, 어디 그게 될 소리요? 부인.”
“소화라 하지요?”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이는 바로 제갈 사혁의 누이 동생인 남궁 소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가주전을 나선 사혁은 그 길로 돈주머니만을 챙긴 채 제갈세가를 나섰다. 어서 빨리 도산 진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생애에서는 분명 가족회의 후 곧바로 남궁세가로 향했다. 시기상으로도 스승인 도산 진인을 만난 것은 지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해괴한 일이 다 있었지.”
과거 남궁세가로 가던 길에 소피가 급해져 숲 속에 혼자 들어가 소피를 보던 중 늑대에게 물려 정신을 잃고 끌려가다가 스승인 도산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때의 충격으로 5년 간 기억을 잃었고 희미하게나마 천천히 기억을 찾은 뒤 제갈세가에 가서야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회의와 남궁세가, 그리고 늑대, 이 모든 것들이 자신과 도산 진인을 만나게 해준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사혁은 제갈세가를 나가자마자 비류보(飛流步)를 펼쳐 드넓은 대지를 빠르게 지나쳤다.
당시 스승인 도산 진인은 기억을 잃은 사혁이 제갈세가의 자제인 줄 모르고 부모 없는 고아라고 생각해 고민할 것 없이 제자로 거뒀다. 사혁도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내외적으로 무리 없이 화산파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을 잃은 고아 소년이 아닌 제갈세가의 자손으로서 도산 진인과의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사제의 연을 맺어볼 셈이었다.
한 시진 동안 쉬지 않고 비류보를 펼치자 목이 말랐다. 하지만 주위에는 온통 산뿐이라 마실 물은커녕 작은 물웅덩이도 보이지 않았다.
소천성공과 천지일기공으로 내공을 쌓았지만 아직 성인에 비해 한참 부족했기에 목적지까지 단번에 가기란 어림도 없었다.
“하아, 하아……. 정말이지, 화산파의 제자만 되면 건곤신공으로 바로 넘어가는 건데.”
천지일기공 같은 경우는 화산파에서 공개를 한 상태라 외부인이 익혀도 무리는 없으나 건곤신공부터는 달랐다. 최소한 열다섯이 되어야 안전하게 익힐 수 있으며 이것은 화산파에서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중요 심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정식 제자가 아닌 상태에서는 알고 있어도 배울 수 없었다.
사혁은 잠시 작은 바위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산길이 험하고 바람도 거세게 부는 고산 지대. 잘 둘러보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절세 무공 비급이라던가, 누구나 탐내는 절세 영약이라도 구해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꼬마야, 괜찮으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혁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건네주었다.
“?”
물주머니를 건네준 사람은 열아홉쯤 먹은 청년이었다. 왼쪽 팔에는 짚으로 된 가방을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초를 캐러 온 심마니가 분명했다.
“고마워.”
그가 내민 물을 시원하게 마신 사혁은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올라왔냐, 꼬마야?”
“신경 쓰지 마, 나도 볼 일이 있어서 왔으니까.”
“애들이 혼자 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같이 온 어른은 안 계셔?”
“........”
사혁은 그런 청년 계속 무시한 채 빨리 좀 사라져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 시간에도 호랑이 같은 맹수가 나올지 모르니 저 길을 쭉 따라 마을로 내려가.”
비록 지나가는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청년은 마을로 가는 길까지 친절히 가르쳐주며 사혁의 안전을 걱정해 주었다.
“이름이 뭐야?”
“나?”
“이름이 뭐야? 뭐, 은혜라고 하긴 뭐하지만 물 마신 값 정도는 사례하고 싶어서.”
은혜를 입거나 무슨 호감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체면치레정도로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다.
“나는 영이촌에 살고 있는 종방영이다.”
“뭐!”
종방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종방영, 자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았지만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내의 이름. 자세히 보니 청년의 얼굴은 흑요칠마의 삼마인 흡정마(吸精魔) 종방영의 얼굴과 많이 닮아있었다.
‘뭐야, 이 새끼가 종방영이었어?’
“꼬마야, 왜 그러냐?”
“우리 집이 약방은 아니지만 약방 못지않게 약초를 꽤 다루거든. 그래서 형 이름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나 같은 사람 이름도 알려졌단 말이야? 이거 자부심 생기네.”
“혹시 지금 약초 캐러 가는 길이야? 나도 같이 따라가도 될까?”
“뭐?”
이제 막 열하고 두어 살 정도 더 먹었을 법한 소년이 제법 심마니 일로 잔뼈가 굵은 자신을 따라 산행을 가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 집이 약방은 아니지만 약초를 다루니 나도 장차 가업을 물려받으려면 어느 정도 약초를 알아야 하거든.”
사혁이 그럴싸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따라가겠다고 하자 잠시 머뭇거리던 종방영은 그의 옷을 자세히 살펴봤다. 수수하지만 비단으로 만든 옷은 이 아이의 집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좋아. 그 대신 힘들면 고집 피우지 말고 바로 내려가야 한다.”
사혁의 집이 약방만큼이나 약초를 다루고 있다고 하니 약초로 밥벌이하는 종방영은 지금 안면을 터두면 나중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계산하고 산행을 허락했다.
반면 제갈 사혁은 종방영을 따라다니며 종방영에 대해 이것저것을 알아볼 셈이었다.
종방영은 불과 약관의 나이에 이름을 날린 사파의 거두이지만 지금은 그냥 촌동네의 심마니였다. 지금부터 수련을 해도 스물다섯 정도에 이름을 남길까 말까한 판국에 심마니라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엄청난 괴리감이 느껴졌다.
산행을 하는 동안 사혁은 종방영이 캔 약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평범한 심마니가 그렇게 대단한 거물이 될 수 있을 리 없지. 분명 뭔가가 있어.’
혹시라도 절세 영약과 비견되는 전설의 약초라도 캐면 가로챌 생각이었다.
욕심이란 누구나 있는 법이고 사혁 역시 욕심이란 미물을 가슴속에 키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다. 만약 기연을 얻는다면 돈을 이용해 빼앗고 기필코 그리될 운명이라면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라도 죽일 생각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종방영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갈 사혁 본인은 목숨을 잃었다. 사혁은 아집투성이인 무림인이고 그런 무림인의 상식상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크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이게 영지버섯이야. 가장 기본적인 약재료이지만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해. 이건 아직 1년도 안 된 거니까 이렇게 이 자리에 놔두고 내년에 와서 따는 거야.”
“내년에 누가 따갈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뭐, 운이 없는 거지.”
“미리 따가지 그래?”
“안 돼. 이건 심마니들의… 그래, 상도덕이야, 상도덕!”
아무리 봐도 종방영은 미래의 대마두라기엔 어딘가 부족한 점이 많아 보였다. 성정이 사악한 것도 아니고 순리를 중요시 여기며 모든 일에 느긋느긋한 태도가 전형적인 호인이었다.
‘분명 저 낯짝은 종방영이 확실한데 말이야.’
제갈 사혁은 두 시진 동안 험한 산을 오르내리며 종방영을 따라다녔지만 생각처럼 절세 영초 같은 기연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나 올해가 아닐 수 있는 기연이기에 종방영의 기연을 가로채려는 자신의 생각이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 새끼를 여기 이대로 놔두면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말이야.’
산을 오르며 정신없이 약초만 찾으러 다닐 때 변덕스러운 산의 날씨가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웬 비?”
“조금만 가면 심마니들이 쉬는 동굴이 있으니까 서둘러!”
비를 피하기 위해 종방영을 따라 동굴로 간 사혁은 가슴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종방영에게 주었다.
“먹을래?”
마침 허기가 졌기 때문에 종방영은 말없이 육포를 받아먹었다. 비를 피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화가 없는 동굴 안에선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족은 몇 명이야?”
침묵을 깬 사람은 다름 아닌 종방영이었다.
"백부님 백모님, 그리고 사촌 여동생."
“부모님은?”
“세상이 흉흉하니까.”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렸지만 종방영도 납득을 했는지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동굴에서 어색하게 보내는 동안 어느새 비가 그쳤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볕이 발끝에 닿자 두 사람은 동굴을 나섰다.
“끄응… 다시 일해야지, 일!”
기지개를 펴며 동굴을 나서려는 그 때 어디선가 사람의 신음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 소리 들려?”
종방영 역시 들릴 듯 말 듯한 신음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봤다.
“산짐승은 아닌 것 같고?”
그 신음소리는 기괴하여 집중하고 듣지 않았을 때는 마치 짐승의 죽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종방영은 신음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고 동굴 주변의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큰 부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처음 본 종방영은 크게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침착해. 일단 마을에 내려가 사람을 불러와.”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놈의 하지만! 어서! 어린 나보다는 당신이 가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럼 약초는 여기에 두고 갈 테니까 잘… 어떻게 잘해봐!”
응급 처치를 맡긴다는 말이겠지만 사혁에게 중요한 것은 고작 응급 처치 같은 게 아니었다.
‘이것 봐라?’
눈앞에 있는 노인을 본 순간 사혁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노인의 행색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나있는 검상은 분명 심상치 않은 종류의 것이었고 노인의 호흡 또한 일반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본 결과 무림인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이 확실해, 누굴까?’
“노부는 흡정마룡(吸精魔龍) 위대극(僞大棘)이다…….”
그 때였다. 마음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던 중 노인의 입에서 사혁의 속마음을 읽어낸 듯 원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흡정마룡 위대극. 그 말을 듣는 순간 사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흡정마룡이라니, 흡정마룡 위대극이라니!
흡정마룡 위대극. 사실 사혁은 흡정마룡 위대극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흡정(吸精)이라는 단어는 종방영의 별호인 흡정마(吸精魔)와 뜻이 동일했다.
제갈 사혁은 이로써 확신했다. 방금 전 마을로 간 종방영의 기연은 바로 이것이었다.
“노부를 구해줘서 고맙구나……. 소자(小者)여,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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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