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회: 제갈세가 -->
위대극이 입에서 피를 쏟아내자 사혁은 그를 구해줘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구해줘? 구해줘서 뭘 어쩌는데?’
사혁은 고민에 빠졌다. 이게 종방영의 기연이라면 위대극을 구해줘서 그에게 무공을 얻어낸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노부에게 이제 시간이 없을 것 같구나.”
그 말과 함께 위대극은 제갈 사혁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전음(轉音)이 울려 퍼졌다.
―나는 곧 죽는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인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남겨줌으로써 나는 영원불멸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긴다는 뜻은 즉 자신의 무공을 넘겨준다는 뜻이었다.
―노부의 품속에는 태을신단(太乙神團)이라 불리는 희대의 영약과 흡정마공(吸精魔功)이라 불리는 신공이 적힌 서책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너에게 줄 테니 노부의 꿈인 마선(魔仙)의 경지를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위대극의 숨이 끊어졌고 그의 몸은 말라서 비틀어진 무 뿌리처럼 변해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사혁은 같은 무림인이지만 무림인은 원래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의 모든 것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넘길 수 있는 것인가? 왜 자신의 무공을 타인에 의해 후대에 남기려 하는가?
“자신의 자식을 남기려는 것과 같은 무림인의 본능인가? 그래, 꼭 종족 보존의 본능과도 같은…….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 자신의 무공을 이어준다면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는 건가?”
젊은 날에 요절해 제자를 두어보지 못한 사혁으로서는 자신의 무공을 이어줄 후인에 대한 감정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위대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그런 건 상관없어.”
사혁은 위대극의 몸에서 태을신단과 흡정마공의 정수가 담긴 마공서를 꺼냈다.
흡정마공은 둘째 치더라도 과거 무림에서 사라졌다던 태을신단이 다른 사람도 아닌 위대극의 손에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라웠다.
태을신단은 모용세가의 것으로 200년에 한 번 만들어진다는 전설 속의 영약이다.
“흡정마 종방영이 금강지체(金剛之體)라는 말이 떠돌던데 바로 이 태일신단 때문이었나?”
당시 태을신단을 훔친 사람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모용세가가 체면을 생각해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흡정마룡 위대극은 무림사에 있어서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인이었다.
“위대극이 모용세가에서 태을신단을 훔쳐서 달아나던 중 부상을 입었고 우연히 심마니였던 종방영과 인연이 닿아 종방영이 태을신단과 흡정마공을 취했다, 이건가?”
분명 정황을 봤을 때 과거 종방영은 위대극의 흡정마공을 물려받은 게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태을신단은 자신의 손에 있고 흡정마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흡정마공 그 자체라 불리던 마두 종방영은 사라지고 순박한 심마니 청년 종방영만 존재할 것이다.
제갈 사혁은 죽은 위대극을 내려다보며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타인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기회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타인의 것을 탐할 거야. 그러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태을신단을 삼킨 사혁은 태을신단을 모조리 흡수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름 없는 산꼭대기에서 천지일기공을 운용해 태을신단을 흡수하기 시작한 제갈 사혁의 몸은 서서히 그 영향을 받아 탈피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지난 거지?”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천지일기공을 운기했기 때문에 다시 깨어났을 때는 그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낡아서 해진 도복만이 흘러간 시간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
“하는 수 없지, 곧바로 화산으로 향하는 수밖에.”
스승인 도산 진인과 우연을 가장해서 만날 수 없다면 이제는 직접 화산으로 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화산파의 제자가 되는 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화산파의 본산제자. 즉 1대 제자의 밑으로 들어가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많은 재물을 쏟아 기부를 해서 속가 제자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사혁이 하려는 방법이 세 번째, 바로 화산파의 시험을 받아 당당히 보무제자가 되는 방법이다.
보무제자라는 게 결국 어떻게 보면 속가 제자와 같지만 실력으로 들어온 만큼 화산파 장로들의 눈에 들어 본산 제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았다.
지난 생애에는 화산파의 장로인 도산 진인의 눈에 띄어 쉽게 화산의 제자가 됐지만 도산 진인과 엇갈렸을 수도 있는 지금부터는 혼자 힘으로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야 했다.
“우선 화산파가 있는 섬서로 가야겠네.”
하루는 경공으로 길을 서둘렀고 하루는 그냥 산길을 걸으며 산과 들을 만끽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호북을 빠져나와 섬서의 젖줄기인 위수강에 도착한 사혁은 화산파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사해(四海)는 동도(同徒)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정을 조금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글쎄, 안 된다니까, 이 양반아!”
“그래도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갈 사혁이 막 배에 올라탔을 때쯤 선착장에서 도복을 입은 노인과 배의 선원이 약간의 의견 차이를 보이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해가 동도건 똥통이건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어서 썩 꺼지시오!”
선원은 사혁이 보기에도 인정머리 없게 거절했다. 그러자 도복을 입은 노인은 불안한 듯 옷 저고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고 돌렸다. 살펴보니 노인이 돌리고 있는 저고리의 무늬는 필시 무당파의 것이었다.
무당파(武當派). 옛날부터 화산파의 전통적인 호적수로 수많은 도가 계열 명문 정파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화산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무공을 수련했던 사혁에게는 거짓말 조금 보태, 함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창자가 뒤틀리고 주화입마가 계절병처럼 찾아올 것만 같은 이름이 바로 무당파였다.
평소라면 망할 사이비 도사들이라며 비웃었겠지만 이곳은 무당과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이 아닌 화산의 섬서, 즉 화산파의 성역이었다. 무당의 도사가 할 일 없이 이곳을 찾진 않았을 터.
“무슨 일이시죠?”
많이 봐줘봤자 열두 살이나 될 법한 사혁이 다가가자 선원은 콧방귀를 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어른들 일에 함부로 나서는 거 아니다, 꼬마야.”
선원의 말투는 거슬렸지만 고작 열 살인 자신의 처지를 봤을 땐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 이분은 무당의 도사이신데 어째서 승선이 불가하다는 거죠?”
“고놈 참, 끈질기네! 그래, 가르쳐주마. 저 도사 양반이 들고 있는 송화단이 문제다.”
“송화단이요?”
“우리 배는 조그마한 왕복선인데 저 송화단을 가득 담은 항아리를 가지고 오른다고 생각해 봐라. 그 냄새가 하루 반나절 동안 배에 남으면 다른 손님들이 어찌 생각하겠느냐?”
송화단은 삭힌 오리알이다. 냄새가 심하게 나지만 최고의 보양식으로 쳐주는 건강식이다.
“그게 문제였습니까?”
보아하니 바로 그 냄새가 문제였다.
“도사님께서는 어디로 가는 길이신지요? 혹 가시는 길이 같다면 제 힘닿는 곳까지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어미의 품에서 투정 부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나이에 이리 당돌하게 말하는 사혁을 보며 무당의 도사는 특유의 걸걸한 소리로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허허허, 노도(老道)는 화산파로 가는 중이라네, 소협(少俠).”
화산파로 간다면 적어도 마음만은 이미 화산파 제자인 사혁에게 있어서 그는 망할 사이비 도사가 아닌 사문의 손님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여기 이분과 저, 이렇게 두 사람만 배에 타고 싶습니다. 어떠신지요?”
이 말을 하며 사혁이 꺼낸 것은 금자 석 냥이었다. 액수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배를 빌리기에는 굉장히 차고 넘치는 돈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물론 이것은 제갈 사혁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섬서 위수강을 따라가기만 하면 화산파가 나오기도 하고 정작 화산파 내부에서 돈 쓸 일이 없기 때문에 사혁은 미련 없이 전 재산을 내놓았다.
“어서 올라오십시오, 공자(公子)님. 이용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금자 석 냥에 눈이 휘둥그레진 선원은 사혁을 대하는 태도를 싹 달리했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금자를 챙기고는 사혁을 공자 대접하며 극진히 모셨다. 이래서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 하는 거다.
“노도는 공덕(空德)이라네. 소협, 이름이 궁금해서 그러니 물어봐도 되겠는가? 이 은혜를 갚고 싶군.”
“제갈 사혁입니다. 공덕 진인(空德 眞人).”
“허허, 제갈세가의 자제분이신가?”
“직계는 아니고 방계입니다.”
제갈세가에 있어서는 직계나 다름없지만 방계임을 미리 밝힘으로써 지금쯤 자신을 찾고 있을 제갈세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명을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 먼 곳에서 화산파까지는 무슨 볼일이신가? 혼자 몸으로.”
“화산의 정취에 반한 나머지 집을 나와 화산의 보호 아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살짝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삼라만상씩이나 들먹였지만 쉽게 말해서 화산파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허허, 그 어린 나이에 삼라만상을 엿보려 하다니.”
공덕 진인이 은근히 농을 걸자 사혁은 난처하단 듯 웃으며 두 손을 가로저었다.
“삼라만상은 그냥 변명이고 사실은 화산의 도사께 어릴 적 은혜를 입어 화산의 마루라도 닦으며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방계라지만 무당과 가까운 호북의 제갈세가의 자제가 구태여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간다고 말한다면 기분이 나쁘진 않더라도 무당의 도사인 공덕 진인이 서운해 할 수 있었기에 사혁은 적당히 말을 꾸며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저 멀리 구름에 가려 마치 하늘 위에 떠있는 듯 신비함을 뽐내는 화산이 보였다.
“소협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공덕 진인의 물음은 화산으로 가는 길을 묻는 것이었다. 사혁은 망설임 없이 가장 빠른 길을 택했다.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빠른 길로 가려면 바위를 깎아 만들어낸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그 계단의 폭은 겨우 발바닥의 절반 정도밖에 지탱할 수 없는 폭이라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자칫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
일반인은 이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으로 한마디로 경공을 펼칠 수 있는 무림인들만을 위한 입구인 셈이었다.
“공자는 돌아서 가는 게 어떠신가? 이 길 반대편에는 쉬운 길이 있다네.”
쉬운 길이 있는 것은 제갈 사혁도 알고 있지만 돌아서가기에는 꽤나 귀찮은 거리였다.
“진인께서 잊으셨나본데 저는 제갈 사혁입니다. 비록 방계이지만 가문의 사람이지요.”
“공자가 너무 어려서 내가 그 사실을 잊고 있었군.”
그 말과 함께 공덕 진인은 현천보(玄天步)를 펼쳤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기 위해 사혁 역시 비류보를 펼쳤다.
‘역시 무당의 명숙(名宿)이야.’
제갈 사혁이 발에 힘을 주어 경공을 펼친다면 공덕 진인은 깃털처럼 가볍게 경공을 펼쳤다. 올라가는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발이 보이지 않아 가히 허공답보(虛空踏步)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화산파의 문 중 두 번째 문인 현안문(泫岸門)에 도착하자 허리에 검을 찬 평검수(平劍手)들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덕 진인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명패를 꺼냈다.
“호북에 사는 공덕일세.”
공덕 진인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평검수들은 경계를 풀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덕 진인. 장문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네. 아, 그리고 이쪽은 함께 온 제갈 공자이시네. 괜찮다면 함께 동행하겠네.”
상궁(上宮)에 위치한 문주당에 들자 화산파를 지탱하고 있는 열두 장로의 자리가 보였고 그 위에 자리한 장문인의 자리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그가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무림 최고의 배분을 자랑하는 전설적인 무림인, 담종 진인(曇棕 眞人)이다.
담종 진인은 제갈 사혁의 스승인 도산 진인과 훗날 장문인이 될 도호 진인의 사숙에 해당하며 제갈 사혁에게는 사숙조에 해당하는 화산파의 가장 큰 어른이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어서 오시게, 공덕. 오는 길이 고달프지 않았는가?”
공덕 진인을 반갑게 맞이해준 이는 화산파의 차기 장문인 도호 진인이었다.
‘사백께서는 그 시절 그때처럼 변함없으시구나.’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여기 이 공자 덕에 편히 왔습니다.”
공자라는 말에 담종 진인은 사혁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아이는 공덕, 자네 제자가 아닌가?”
함께 문주전에 들었기에 내심 공덕 진인의 제자라 생각했지만 제자가 아니라는 말에 담종 진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공자는 제갈세가의 공자로 특이하게도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합니다.”
제갈세가라고 하면 무림인을 키움에 있어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담종 진인은 사혁이 화산파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제갈 사혁이 장문인께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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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