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회: 제갈세가 -->
“제갈 성을 쓰고 있다면 필시 제갈가의 자식이겠구나.”
“주 자 원 자 되시는 분이 아버지 되십니다.”
“그렇다면 제갈 영재의 손자로구나. 영재와는 자주 작(雀)을 두었다. 그 아들들도 몇 번 보았는데 손자는 처음 보는구나.”
사혁은 화산의 장문인이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할아버지 되는 제갈 영재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오늘 이 사실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 화산파에 입문했을 당시 사혁은 기억 상실로 인해 제갈 성이 아닌 도호 진인이 지어 준 가명으로 입문했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담종 진인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그와 선대와의 인연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마작을 함께 두는 사이였다면 이는 필시 보통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장문 사숙, 소질이 알기로 제갈 주원은 무림맹의 총사였던 자로서 흑사련과의 전투로 장렬히 전사한 정도 무림의 영웅입니다.”
도호 진인을 통해 제갈 사혁의 정확한 가족 관계를 알게 된 담종 진인은 주름이 가득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산의 지붕이라는 말은 좋으나 어찌하여 화산이냐? 영재의 집에서는 저기 공덕 아이의 무당이 가까울 터인데.”
예상했던 질문이 나오자 사혁은 준비해 두었던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어렸을 적 화산에 몸을 둔 도사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화산의 도사가 누구인고?”
“당시엔 너무 어려서 은인 되시는 분의 존함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부터 화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됐습니다.”
화산의 도사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말에 담종 진인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도호 진인이 담종 진인의 생각을 거들었다.
“5~6년 전, 천의(天衣)의 뜻을 마음의 양식 삼아 사제들이 화산의 이름을 떨치며 강호 출두와 함께 선행을 해온 적이 있습니다, 장문 사숙.”
“오호, 도상이 놈의 생각 말이더냐? 그냥 생색낸 것은 아니었나 보구나. 이렇게 아이가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온 걸 보면.”
무림의 문파라고 해서 매일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교에 그 기초를 둔 모든 문파가 그렇듯 그들이 하는 일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과 사회 활동이었다.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선행을 베풀고 약자를 위해 힘을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정도 무림의 기본적 이념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잘 지켜지는 경우는 없지만.
“화산의 선의로 인해 이렇게 올바른 성심을 가진 공자가 화산에 찾아온 것은 화산의 복(福)입니다.”
공덕 진인까지 그렇게 말하자 담종 진인은 선대와의 인연을 떠나 제갈 사혁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제갈 아이를 화산이 품겠다. 기본이 잘 닦였구나. 역시 제갈세가의 소천성공! 밑천을 닦는 데는 천하일품이로구나. 도호,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네, 장문 사숙.”
마음대로 하라는 말은 불혹이 다 된 나이에도 마땅히 제자를 두지 않는 사질에 대한 사숙의 배려였다.
공덕 진인과 따로 할 말이 있는 담종 진인을 위해 도호 진인은 사혁과 함께 문주전을 나와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래, 천지일기공을 대성했더구나.”
“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올 가을에 정확히 열 살입니다.”
열 살이라는 말에 도호 진인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소천성공은 둘째 치고 천지일기공을 열 살에 대성했다는 것은 굉장히 대단한 일이었다.
“괜찮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제자라는 말에 한순간 사혁은 몸을 움찔했다.
지난 생애에 제자를 두지 않았던 도호 진인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제자로 두겠다는 뜻을 밝히자 도호 진인의 사질이었던 사혁으로서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부족한 몸이지만 제자,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마음으로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도산 진인과의 인연이 닿지 않는 이상 사백을 스승처럼 대하던 자신에게 있어 도호 진인의 제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은 내 처소에 머물고 내일부터 운대관에 가도록 하여라.”
화산의 장로를 스승으로 둔 직계 제자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운대관과 천화관은 꼭 거쳐야만 하는 곳이었다. 규율도 규율이지만 운대관은 미래의 화산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제자에게 있어서는 미래의 사형제들을 만나는 곳이었다.
“직계 제자라고는 하나 가르침은 운대관에서의 수련을 모두 마친 후에 있을 것이다.”
도호 진인은 예전부터 공명정대한 사람으로 무림인이 되지 않았다면 관리가 됐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네, 스승님.”
“도호 역시 그 때 내리겠다.”
제갈 사혁은 과거 무성(無聲)이라는 도호로 불렸다. 실상은 말이 참 많았지만 아무튼 과거의 도호는 무성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도호 진인과 한 상에 밥을 먹게 된 사혁은 마치 예전부터 자신의 집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했다.
“고기는 먹지 않는구나.”
“탁기가 쌓이는 걸 방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탁기가 쌓이는 것을 막아왔단 말이냐?”
“탁기를 제거할 때는 늘 천지일기공을 운기했습니다. 7살 이후로는 소천성공을 천지일기공의 보조로만 사용했습니다.”
원래 소천성공과 천지일기공은 최대한 순도 높은 내공을 천천히 쌓기 위한 내공심법이기 때문에 두 심법의 충돌은 전혀 없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소천성공이 아닌 천지일기공이냐?”
“건곤신공을 익히기 위해서 바탕이 되는 심법을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마치 처음부터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듯이 들렸고 그 말에 왠지 기분 좋은 도호 진인이었다.
천지일기공은 화산파가 널리 공개한 내공심법으로서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몸을 화산의 무공을 배우기 적합하게 만들어주는 효능이 있다. 때문에 천지일기공을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의 차이는 화산파의 무공을 배울 때 보다 크게 차이가 났다.
“내일 제갈세가에 정식으로 기별할 테니 그리 알거라.”
“제자,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집을 나왔습니다.”
집을 나왔다는 말에 도호 진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저 그것이…….”
사실대로 집을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 도호 진인은 곰방대를 꺼내 쑥을 피웠다.
“아무리 대장부의 뜻이 중하다지만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어찌 그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냐?”
제갈세가의 가계도를 알고 있는 도호 진인이 애써 백부님 내외를 부모님이라 표현한 것은 그만큼 사혁, 개인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나무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제자, 지금이 아니면 아니 될 것 같았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사혁은 복에 겨운 미친놈이었다. 구파일방으로 대변된 명문 정파에 꿀리지 않는 명문 세가인 제갈세가의 자제가 아쉬울 것 하나 없는 환경을 마다하고 굳이 고생을 자처하며 화산파를 찾아왔으니 말이다.
“절대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핏줄에게도 자신의 소식을 알리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하나 이 스승, 처음으로 제자의 고집에 져주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옛말이 사제지간에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도호 진인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도호 진인의 생각과 달리 현 화산파의 장문인인 담종 진인에 의해 제갈세가에 정식으로 연통이 갔고 그 후 수십 차례 편지와 사람이 오가며 기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해 제갈세가의 적자(嫡子)가 태어나면서 화산파와 제갈세가의 기 싸움은 끝을 맺었다.
* * *
운대관에서 제갈 사혁의 신분은 보무제자였다. 때문에 제갈 성은 사용하지 않고 대신 백씨 성을 썼다.
백씨 성은 도호 진인이 속세에서 사용한 성이기도 했다.
“백사혁이 누군가?”
“접니다.”
운대관 교관의 부름에 사혁은 힘차게 대답했다.
“좋다. 다음 조장연이 누군가?”
운대관 교관의 출석 점검이 끝나자 운대관의 교육 담당 교관이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화산파의 객으로 있는 장개(壮介)이다. 무림에서는 나를 이렇게 부르지. 전금촉공황(全金属恐慌) 장개(壮介).”
전금촉공황 장개. 일찍이 비정하리만큼 독하다고 알려진 무림인이었다.
그가 화산의 객으로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오직 화산파만이 그의 사상에 찬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공은 뛰어나지 않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훈련 방식은 너무나도 혹독했고 훈련은 혹독한 만큼의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때문에 그 어떠한 무력 단체에서도 그를 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화산만이 그를 받아줬다. 그래서 그는 화산파를 위해 소위 말해 빡세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모든 금속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쇳덩어리가 겁을 느낄 리 없잖아.”
“무슨 언어유희 같은 거일 수도 있지.”
아이들은 장개의 별호에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별호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운대관 입관 반나절 만에 알게 되었다.
“이 굼벵이들아! 지금 그게 뛰는 거냐? 정말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너희는 하나같이 인간쓰레기, 중원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생물들이다! 제대로 못해, 이 자식들아! 겨우 모래주머니 하나 차고 뛰면서 쥐새끼마냥 헐떡거리는 꼴이라니 눈을 뜨고 못 봐주겠다. 니들이 진짜 사내 녀석들이라면 이를 악물고 한번 뛰어봐!”
그 때 현보상단의 상단주 아들인 우현보가 훈련장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이젠 더 못 뛰어…….”
우현보가 쓰러지자 장개는 그의 꿀단지 같은 뱃살을 발로 짓밟으며 미간을 구겼다.
“또 네놈이냐? 그래, 너 같은 뚱땡이가 그렇지! 겨우 그 정도 뛰고서 자빠질 거면 요 앞 미화루에 가서 좋아하는 기녀나 끌어안고 자란 말이다!”
“하악… 하악…….”
그가 숨을 거칠게 내쉬자 장개는 그런 그를 비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긴, 너 같은 인간쓰레기가 좋아하는 기녀니 보나 마나 돼먹지 못한 여자겠지.”
“이익! 내… 내 사랑을 욕하지 마!”
우현보가 장개의 언행에 화가 난 나머지 주먹을 휘두르자 장개는 그보다 더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그 기녀도 구제불능의 쓰레기야.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 이를 악물고 한번 뛰어봐. 부운약표(浮雲躍飄) 열 번 왕복!”
하지만 장개의 도발에도 우현보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괜찮아?”
다른 보무제자가 상태를 살폈지만 그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
대답이 없었다. 그냥 시체인 듯했다.
우현보가 움직이지 않자 장개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갑자기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제군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다. 방금 전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우인 현보상단의 아들, 우현보가 훈련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됐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돼서 본 교관은 슬프다.”
이렇게 첫째 날, 보무제자 우현보가 교관의 폭력에 의해 사망하자 운대관 수련생들은 기합이 잔뜩 들었다. 정말로 교관이 눈앞에서 사람을, 그것도 나름대로 자신의 제자라고도 할 수 있는 수련생들을 때려죽이자 겁을 잔뜩 먹은 것이다.
“정말 사람도 아니야!”
여기저기서 비난과 공포에 질린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장개가 무서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도 계속된 경공 수련.
“알겠나? 지금 네놈들은 인간이 아니다! 뛰라면 뛰고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는 거야!”
“네, 교관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너희는 우수한 무림인이 될 수 있다.”
“네, 교관님!”
“인간 같지도 않은 보무제자 새끼들아! 버러지 같은 네놈들을 훈련시켜 주는 나한테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잽싸게 움직여!”
“네, 교관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용서 못한다.”
“네, 교관님!”
삼 일째 되는 날에도.
“무림이란 곳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싸울 수 없는 정도인은 존재 가치도 없어! 쥐새끼마냥 숨어서 거지같이 살고 싶으면 너희들 마음대로 하란 말이다! 사파 새끼들한테 목숨을 구걸하고 싶나? 세상에 살다 살다 니들 같은 잡놈들은 처음 본다. 비실비실 뛰지 마, 이 새끼들아! 뻗어버리면 아예 무덤을 파서 묻어 버리겠어!”
“네, 교관님!”
검술 훈련 때도.
“중화 제일미(中華 第一美)고 나발이고 어차피 니들에게 여자는 없어! 너희들 상대는 오직 검뿐이다. 모든 정신을 오로지 검에만 집중해! 검이 곧 너의 스승, 사형, 가족이다!”
“네, 교관님!”
첫날 우현보의 죽음으로 보무제자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 중 사혁만 유일하게 살인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보무제자로 들어온 우현보가 사실은 장개가 고용한 고용인이란 사실을 말이다.
장개에게 맞아서 쓰러진 우현보는 사실 하급 살수들이 쓰는 수법으로 죽은 척을 한 것이었다. 장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운대관 수련 과정을 밟는 아이들이 부잣집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잘사는 집 아이들답게 자존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간혹 장개 같은 교관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데 이럴 때 체벌이라도 내릴라 치면 ‘아빠한테도 맞아 본적 없는데!’ 같은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결국 장개는 그런 아이들의 기선을 미리 제압하기 위해 이런 살인 촌극을 짠 것이었다.
부잣집 도련님들이라고 해도 어차피 사리 판단이 빠르지 못한 어린이일 뿐이다. 그럴싸한 연기와 그럴 법한 분위기만 잡으면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도 옛날에는 깜빡 속았었지.’
장개의 이런 가짜 연극은 화산파 내에서도 공공연히 묵시되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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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