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9화 (9/262)

<-- 9 회: 무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

“벌써 가려는 게냐?”

“네, 백모님. 백부님께서 강호행을 떠나라 말씀하시니 소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 가는 길에 출출할 터이니 가면서 먹도록 하여라.”

어려서부터 자신을 아들처럼 키워온 백모라면 당연히 집에 며칠 머무르라고 권할 것을 예상했으나 부부는 일심동체였다. 먹을 것까지 챙겨주며 마중까지 해주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백모의 배웅까지 받으며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온 제갈 사혁은 한숨을 내쉬며 전낭을 뒤졌다.

“어디 시간 죽일 곳 없나?”

어차피 화운 룡은 알아서 잡힐 것이고 이번 강호행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지난 생애에서는 뭣도 모르고 정말 열심히 화운 룡을 쫓아 다녔지만 이번엔 다르다.

“발걸음 닿는 곳, 어딘들 못갈 소냐.”

사혁이 펼치는 경공은 실로 놀라웠다. 가히 초상비(草上飛)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경공 자체에 소리가 없어 살수의 경공과 같았다. 그것은 비류보이며 비류보라 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늦은 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거지 같은 몰골로 호남성(湖南省)에 도착한 사혁은 객잔에 들렀다.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는 사혁의 신분패를 보더니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반겼다.

“저희 무릉도원(武陵道原) 제5호 지점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화산파의 문도님.”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 주점은 화산파에 보험을 든 대봉상단의 사업처였다.

화산파는 일찍이 다른 문파와 전혀 다른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보험 사업이다.

무림을 살아가는 이가 무림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면 별 미친놈들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우고 그 과정에서 어김없이 싸움 장소인 객잔을 박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객잔을 박살내면 그 뒤처리는 누가 하냐? 당연히 싸움을 일으킨 당사자들이 뒤처리를 해야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때문에 화산파는 객잔으로부터 보험료를 챙기고 객잔 수리 및 뒤처리를 해주는 보험 사업을 벌였다.

이것은 상인들에게 정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러니 화산의 제자인 제갈 사혁을 보자마자 남들과는 다른 대접을 해준 것이다.

“문도님, 최고급 방과 최고급 술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먼저 목욕부터 하시겠습니까?”

“부탁하네.”

점소이는 사혁을 탕으로 안내했다.

제갈 사혁이 목욕을 하러 간 사이 같은 복장을 한 무림인들이 하나 둘 인상을 구기며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짜증나네!”

“사매. 그만하고 화 풀어.”

혁린검각(赫蓮劍閣)의 검사인 서세화는 기분이 나빴다. 색마를 쫓기 위해 구성된 자파의 사형제들이 속절없이 화운 룡에게 당했기 때문이다.

힘으로 당했다면 덜 억울하겠지만 고작 색마의 얕은 술책에 당하다니 분해서 먹을 것으로 이 분노를 풀지 않으면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필 쉬기 위해 들른 객잔에 앙숙과도 같은 만화곡(萬花谷) 놈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도저히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자리가 왜 이 따위야?”

서세화가 자리가 안 좋은 것을 지적하자 점소이는 허리를 숙이며 최대한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리가 다 차서…….”

“만화곡 놈들은 좋은 자리 주고 우리는 뒷간 옆이 말이 되느냐! 네놈이 우리 혁린검각을 무시하는 게 아니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만화곡과 혁린검각의 앙숙 관계는 호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말 유명한 이야기였지만 이곳은 호남이었다. 때문에 그런 사정을 일개 점소이가 알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즉시 좋은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화장실 쪽과는 꽤 떨어져 있지만 서세화는 괜한 꼬투리를 잡았다. 그리고 만화곡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했다.

“흥! 호랑이는 승냥이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만화곡 무리 역시 색마 추적으로 인해 많이 피곤한 상태라 웬만하면 상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승냥이라는 말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혁린검각의 무인이 자신들을 승냥이라고 하는 것은 곧 자신들을 길러준 만화곡에 대한 모독이었다.

“혁린검각의 애송이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만화곡 촌놈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서세화의 도발에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리들은 기어이 서로를 향해 검을 뽑기에 이르렀고 무릉도원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서둘러 객잔을 빠져나오거나 멀리서 이를 지켜봤다.

그런데 이때 목욕을 끝마친 사혁이 내려와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리들이 대치하고 있는 정중앙에 앉았다.

“점소이, 여기 주문받아!”

언제 병기가 충돌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점소이는 꿋꿋하게 제갈 사혁의 주문을 받았다. 아마 주문을 한 이가 사혁이 아니더라도 점소이는 지금과 같이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만화곡과 혁린검각 무리들은 웬 젊은 사람이 둘 사이에 떡하니 자리 잡았나 싶었지만 곧 서로를 견제하느라 사혁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만화곡, 이 빌어먹을 개…….”

“게살 볶음밥 하나.”

“…살 볶음밥 하나.”

순간 사혁의 난데없는 주문에 말하는 게 꼬여버린 서세화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만화곡과 혁린검각 간의 싸움이 일어났고 이 난리가 나자 사혁은 어쩔 수 없이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힘들겠군.”

함께 식탁 밑으로 몸을 숨긴 점소이를 보며 사혁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림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이 업계 관계자로서 이 정도는 일상생활입니다. 아참! 저는 상단 직원 번호 52번인 점소이 곽장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점소이는 식탁 위로 손을 올려 술을 가져와 대접했다.

여기저기서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리들이 객잔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하는 이때 넉살 좋게 술잔을 따르는 점소이의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사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반갑군. 나는 화산파의 무진이네. 연통을 넣을 테니 서둘러 접수하는 게 좋겠군. 이대로 두다간 가게가 무너지겠어.”

그가 비록 무림 초행이라고는 하나 무자 항렬이면 화산파의 1대 제자였다. 그랬기에 화산파와 거래 중인 대봉 상단 산하의 무릉도원 점소이인 곽장은 다른 어느 손님보다 제갈 사혁을 깍듯이 대했다.

“맛이 아주 좋군.”

“감사합니다.”

“한잔 받게.”

“영광입니다.”

바로 옆에서는 싸움이 일어나는데 한가롭게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는 꼴이 꼭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 같았지만 사혁 입장에서는 영업 중인 객잔에서 칼부림이나 하는 놈들이 꼭 희극에 나오는 광대나 다름없어 보였다.

사혁은 점소이와 술잔을 나눈 후 그 난리가 일어나는 난장판 사이로 걸어갔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병장기가 충돌하는 난투 속을 사혁이 귀신처럼 잔상을 일으키며 유유히 빠져나온 것이다.

그 광경을 본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리들은 서로를 향해 겨누던 검을 거두고 멍하니 사혁을 쳐다봤다. 그의 행동은 노골적인 실력 행사였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 아귀다툼 사이를 상처 없이 유유히 빠져나오는 모습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부러 자신들의 검투 사이로 걸어왔다는 것은 자신들을 해코지하기 위함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사혁은 그대로 특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

한동안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있었다. 이대로 검을 집어넣고 물러서야 하는지 아니면 빼든 검을 그대로 다시 휘둘러야 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午)시에 일어난 사혁은 무릉도원 1층 식당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는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지만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반면 그 자세 그대로 밤을 지샌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을 흘렸다.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 사이를 지나간 사혁은 일부러 어제 앉은 자리에 앉아 점소이를 불렀다.

“곽장 군.”

“네, 말씀하십시오, 문도님.”

“간단한 조식(早食) 부탁하네.”

아침으로는 싱거운 죽순 볶음과 조금 짜게 간이 된 만두가 나왔고 사혁은 주위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숙박비를 계산할 때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을 한 번 보더니 점소이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저 사람들 밤새 저러고 있던 건가?”

“네? 네, 그렇습니다.”

“밤새 저러고 있다니 참 이상한 사람들이네.”

식사를 끝낸 사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릉도원을 나섰고 그가 사라지자 혁린검각과 만화곡 무사들 중 다수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주화입마였다.

무릉도원에서 나온 제갈 사혁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강호를 유람하며 노는 것도 좋지만 과거 청산은 확실히 해야 했다.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이다. 이름 없는 자의 손에 죽었다면 흑사련의 무사들의 피로 그 원수를 갚고  원수에게 가족이 있다면 은원을 맺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히 죽일 것이다.

두 번째는 종방영에 대해서이다. 과거 흑사련과의 일전으로 인해 무형독에 중독되어 죽었지만 종방영과 관련해서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청사단은 흑사련의 세력이고 흑요칠마 중 하나인 종방영 역시 흑사련의 중심세력이었다. 그런데 왜 청사단은 종방영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것일까? 그것도 하필 조직의 힘을 최대한 규합해야 하는 정사대전 중에?

종방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의문을 반드시 풀어야했다.

앞으로 8년 후 일이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혁은 일단 정보를 담당하는 망화각(望話閣)에 전서를 날렸다.

망화각은 흑사련에 대한 사소한 정보도 빠진 없이 보고하라. 무진 백.

순전히 명령조였지만 화산파의 장로가 아닌 이상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화산파에 있을 수 없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그는 화산 제1대 제자 항렬 중 두 번째인 무진이기 때문이다.

며칠 뒤 호남 장사(長沙)에 머물고 있는 사혁에게 전서구가 날아왔다. 내용은 대부분 쓰레기 같은 것들뿐이었다. 흑사련 단주가 첩을 몇 명 두었다느니 흑사련 숙주가 노름을 해서 재료값을 날려먹어 그 길로 손모가지가 날아갔다느니 하는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큰 건이 아니라도 좋으니 차곡차곡 와주면 돼.”

전서구가 가지고 온 한지는 사혁의 내공에 의해 딱딱해지더니 불에 타버린 재처럼 변해 부서져 버렸다.

“흑사련이 아무리 대단해도 내가 손에 넣은 건 시대다.”

제갈 사혁이 대책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과거에 있었던 크고 작은 무림의 대소사를 기억하고 있는 그이기에 시대의 흐름을 잡아내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그 예로 강호행의 명분이 되었던 화운 룡이 과거 그대로 곤륜파에 의해 잡혔다.

그래서 사혁은 강호의 크고 작은 다툼에 철저히 개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무림은 별 시시한 이유로 트집을 잡아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는 아귀 소굴.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죽이는 것도 정당한 이유가 됐다. 때문에 이유 없는 분쟁이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장사에는 용화장이라는 곳이 있다.

얼마 후 이 용화장이 마교에 의해 멸문 사건이 일어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 하나가 재수 없게 마교에 걸려서 사라진 것에 불과했다. 대외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일은 대단히 큰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용화장 멸문 과정에서 무당파의 제자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곧 장로직을 눈앞에 둔 도사의 제자가 당했으니 이는 곧 1대 제자의 죽음과 다름없었다.

이 일로 무당파는 마교 척살을 건의했지만 무림맹 수뇌부 투표에서 기각되었다. 이후에도 마도 척살을 끝임 없이 건의하다 안 되자, 결국 현 무림맹주의 임기 석 달을 남겨두고 무당파는 곤륜파, 화산파, 사천당가와 짜고 무림맹 본관에 연막탄을 뿌렸다. 그래서 무림맹 장로들의 소집을 막고 대대적인 마도척살 건의를 날치기 통과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정사대전이 발발했다.

이 모든 게 무림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마교가 아무리 미친 사이비 종교 집단이지만 힘자랑하려고 이 먼 호남까지 와서 겨우 코딱지만 한 집구석 살림을 아작 내지는 않거든.”

별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힘을 행사하는 곳이 무림이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시도 때도 없이 부리지는 않았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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