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1화 (11/262)

<-- 11 회: 무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

사혁은 별 볼일 없다 판단되는 대영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하루 일과를 마쳤다.

모기가 왱왱거리며 잠을 설치게 만드는 초여름 저녁.

처소에서 다른 하인들과 함께 잠이 든 제갈 사혁은 문뜩 기척이 느껴져 조용히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부(肺腑)를 찌르는 찬 공기를 맞으며 밖으로 나온 사혁은 달빛이 스며들지 않는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긴 채 자신의 기감에 감지된 상대를 쫓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의 기감을 어지럽힌 상대는 다름 아닌 수하였다.

‘수하 소저가 여긴 왜?’

수하를 발견한 사혁은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쫓아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물품 창고였다.

수하가 물품 창고 안으로 몰래 들어가자 제갈 사혁은 조용히 뒤따라가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살펴봤다. 그녀는 물품 창고에 있는 물건을 있는 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사혁은 수하가 도둑이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계속 물건을 뒤지기만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사람 같아 보였다.

“이게 마지막이야.”

한동안 그렇게 물건을 들쑤시며 뒤지던 수하는 대력도가 들었다는 커다란 함을 열었다. 대력도라며 단 대인이 맡긴 함에는 제법 비싸보이는 보이는 보검이 들어있었다.

“갈사 소협이 이 물건을 들 때 굉장히 무거워했는데 의외로 가볍네?”

이를 지켜보던 사혁도 수하의 말에 동의했다.

분명 낮에 사혁이 든 함은 굉장히 무거웠지만 지금 수하가 함에서 꺼낸 대력도는 그렇게까지 무겁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무언가를 알아냈는지 수하는 보검이 들어있던 함을 조사했다.

“이거였어!”

그러자 놀랍게도 함에서는 금괴가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거?’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 대인이라는 자는 어째서 금괴 자체를 맡기지 않고 보검이라 속여 용화장에 금괴를 맡겼는가 하는 것이다.

세금 탈세가 목적이라면 어차피 용화장 자체가 세금 탈세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사실을 숨긴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찾아낸 수하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을 미리 알고서 조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대체 정체가 뭐지?’

함을 이리저리 돌리던 수하는 금괴가 든 함에서 웬 종이를 한 장을 발견했다. 이쯤 되면 단순한 종이가 아닌 밀서라고 보는 게 옳았다.

“중요한 건 적히지 않았지만 이것으로 꼬리를 잡았어.”

수하는 주위를 깨끗이 정리하고 창고에서 나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처소로 돌아갔다.

지붕 위에서 수하의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사혁은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목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하오문인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하오문도가 확실했다. 어떠한 경위로 조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력도의 함에 든 밀서를 가져갔으니 곧 그것을 하오문에 보내기 위해 전서구든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정보를 전하기 위해 접촉을 할 게 분명했다.

그 때가 되면 사혁은 그녀에게서 몰래 밀서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오문이든 뭐든 대력도와 금괴, 그리고 밀서는 용화장에 잠입하고 나서 처음으로 발견한 ‘이상한’ 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으로 용화장과 마교의 연관성을 알아내고 용화장의 멸문지화를 막는다면 두 가지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사문의 명성이며 두 번째는 개인의 명성이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좀처럼 수하는 밀서를 어딘가에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용화장에서 맡고 있는 일의 특성상 밖에 나갈 일이 적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 사혁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 알아내고 사건이 터지면 어쩌지?’

그러던 차에 마침 사혁에게 따로 일이 생겼다.

“대영문에 이것을 가져다 줬으면 하네.”

“이것을 말입니까?”

“원래는 내가 직접 가야 하지만 젊은 자네에게 부탁 좀 하겠네.”

집사는 제갈 사혁에게 조그마한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 상자는 대영문 공녀의 생일잔치에 보낼 일종의 연회비인 셈이었다. 한동안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혁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가버리면 수하를 감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가운데 사혁은 한 가지 묘책을 떠올렸다.

“수하 소저와 함께 가면 안 됩니까?”

“수하와?”

갑자기 무엇 때문이냐는 투였기 때문에 사혁은 최대한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헤헤, 제가 원래 거지였잖습니까. 이 지역 사람도 아니고 해 떨어지는 곳 따라 흘러들어 오다 보니 길눈이 어두워서.”

“원래 이 일은 수하에게 시키려 했던 일이지만 이래서야 다시 수하에게 시키는 꼴이 되니 원…….”

원래 수하를 시키려 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처음부터 수하가 하기로 했던 걸까?

“자네가 길눈이 어둡다고 하니 내가 한번 수하에게 말해보겠네.”

원래 수하가 맡기로 했다면 아마도 과거…….

“이때 그 밀서를 보낸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수하와 함께 가야 해야 했다. 다행히 수하는 동행을 허락했고 각자 꿍꿍이가 있는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서로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수하 소저. 제가 길눈이 어두워서.”

“아니에요. 갈사 소협 덕에 저자도 구경하고 저야 좋죠.”

사혁은 수하가 행여 자신 몰래 밀지를 보낼까 눈치를 보는 반면 수하는 어떻게 하면 사혁을 따돌리고 하오문에 밀서를 넘길지 고민했다.

‘아이참,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갈사 소협을 떨어트리지? 하오문에 이 밀서를 넘겨야 하는데.’

저자에 있는 주루가 바로 이 지역 하오문의 분타였다. 주루는 음식점이라기보다 풍류원에 가까웠기 때문에 혼자라면 모를까 여자인 수하가 사혁과 함께 접근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때문에 수하는 답답한 마음에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당과 좀 드실래요?”

“네? 아… 예.”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수하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 사혁은 생전 먹어보지 않은 당과를 입에 물었다.

어느새 하오문의 분타인 주루에 도착하자 수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저기에서 드실래요?”

무리수도 이런 무리수가 없지만 달리 더 좋은 수가 없었다.

주루에 들어가자 당연히 남자들만이 손님으로 있었고 각자 자리에는 기녀를 한 명씩 옆에 끼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여자인 수하와 함께 주루에 들어오는 사혁을 가게 안 남자들은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손님, 이곳은…….”

점소이가 여자 손님인 수하에게 넌지시 눈치를 주었지만 도리어 수하는 대담하게 나갔다.

“이보세요, 우리도 손님인데 너무 그렇게 눈치 주면 우리가 무안하잖아요. 그냥 식사만 할 거에요.”

그러면서 수하는 점소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몸을 돌렸다. 아주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했기 때문에 사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물건입니다.

수하는 전음을 날림과 동시에 밀서를 건넸고 이를 받은 점소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무림맹 본파에 있는 무당 성제(成悌)께. 보내는 이는 제자 청하(淸河).

놀랍게도 사혁이 하오문 문도라고 의심했던 그녀는 하오문 문도도 아니고 이름 또한 수하가 아니었다. 무당파의 그것도 용화장의 객으로 있었다는 무당의 제자가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옆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까지 사혁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무림 고수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이런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전서가 확실하게 전해지자 마음이 놓인 수하는 제갈 사혁의 팔을 붙잡고 주루를 빠져나왔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여자인 제가 이런 곳을 이용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나 봐요.”

“뭐, 그렇죠. 사실 저런 곳은 기녀로 돈벌이를 하니까 우리 같은 음식만 시키는 손님은 별로일 거예요.”

“그럼 가는 길에 당과라도?”

무슨 여자가 이리도 당과를 좋아하는지 오늘 먹은 당과 하나만 해도 느끼하고 달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수하의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혁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영문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안에서는 큰 찬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공녀의 생일이라 했으니 이만큼 일을 벌여놓은 것도 이해는 가지만 무림 문파를 자청하는 곳치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재력가나 상인이 전부였다. 몇몇 무림 문파처럼 보이는 세력도 있었는데 썩 그리 대단한 문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삼류 문파가 그렇지 뭐.’

쉽게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아닌 단체를 평가하는 점에 있어서 사혁은 한없이 자기중심적이었다.

잔치가 열리는 연회장의 바로 옆에서는 대영문의 총관이 직접 선물을 접수받고 있었다.

“용화장에서 왔습니다.”

“용화장? 흥!”

용화장이라는 말에 대영문 총관은 코웃음을 치며 턱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 턱짓과 사람을 깔보는 듯 눈빛은 얄미워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눈을 그 따위로! 눈을 뽑아서 그 자리에 썩은 동태 눈깔을 박아버릴라!’

그 때였다.

“제갈세가에서 오셨습니다!!”

연회장에 온 손님들은 보통 조용히 입장하는 편이지만 이처럼 대단한 손님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주최자 측에서 자신들의 인맥을 자랑하기 위해 큰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제갈세가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에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은 출입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제갈 사혁의 눈도 출입문으로 향했다.

대영문이 매년 제갈세가에 선물을 가져다 바치기 때문에 제갈세가의 방문이 어떤 경로로든 있을 거라 생각한 사혁은 세가에서 왔다는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우 총관이군.’

하부의 거래 대상이기 때문인지 백부인 제갈 민이 아니라 우 총관이 대신 방문했다. 사실 우 총관이 방문한 것도 대영문 입장에서는 아주 황송한 일이었다. 그가 무림인은 아니지만 제갈세가라는 거대 집단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총관이었기 때문이다.

―우 총관, 임무 때문이니 아는 척하지 마.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사혁은 우 총관에게 먼저 전음을 날렸다. 그리고 우 총관을 따라온 우 총관의 호위대에게도 같은 전음을 날렸다.

우 총관은 잠시 사혁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이고, 우 총관님 오셨습니까!”

제갈세가의 방문으로 대영문은 떠들썩해졌다.

특히 대영문의 강압적인 태도 때문에 억지로 참석하게 된 마을 재력가들과 상인들은 제갈세가의 방문으로 인해 대영문을 보는 시각을 달리 했다.

모든 관심이 제갈세가로 쏠리자 수하와 사혁은 연회장 구석 뒷간에 마련된 손님상으로 향했다.

“제갈세가라니, 대영문의 인맥은 대단하네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는지 이 자리에서는 제갈세가의 ‘제’자도 보기 힘들었다.

“뭐, 대영문에서 뇌물이라도 가져다 바쳤나 보죠.”

“그래도 총관이 직접 오는 경우는 없는데. 다른 곳은 보통 사람 시켜서 선물만 달랑 보내잖아요.”

대영문으로부터 받아먹은 게 워낙 많다 보니 이 정도는 보통이었다.

“한잔 받으세요.”

밀주를 건네자 수하는 수줍게 보조개를 보이며 술잔을 들었다.

“부탁드릴게요.”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타인의 시선 때문이라도 거절할 텐데 수하는 그런 점이 없어서 정말 편했다.

“카악, 퉤!”

그 때 손님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간에서 허리에 찬 거대한 도를 찬 무림인이 나왔다. 그 무림인은 약간 취했는지 혀가 꼬인 말투로 옆에 있는 수하에게 수작질을 걸었다.

“오오, 아가쒸, 시간 있어?”

“죄송합니다. 시간 없는데요.”

대단한 미인인 수하였지만 그동안 이상하리만큼 찝쩍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용화장에서는 대부분 수하를 손녀처럼 보는 노인들이나 딸이나 동생처럼 보는 아줌마들만 있었기 때문이지만 밖에선 달랐다. 정석이라면 나름 정석인데…….

“에잉, 그러지 말고 우리 어디 좋은데 가서 놉시다.”

갑자기 수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도객(刀客)의 행동에 그녀는 욱한 마음이 동했는지,

“어머! 원숭이랑 함께 술 마시는 취미는 없는데.”

라고 말했다. 웃고 있어서 표정만 보면 잘 모르겠지만 그 웃는 얼굴로 내뱉은 말은 파급력이 굉장했다.

“나, 웅산 골불견(滑拂犬)이야! 감히 날 원숭이 취급하다니, 네 이년! 내가 오늘 네년의 사지를 잘라 버리겠다.”

웅산의 골불견이면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도의 대가였지만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그는 추태를 부리며 연회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비가 그와 붙은 수하와 사혁이 용화장에서 온 시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대영문 측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영문의 무사들이나 총관, 그리고 대영문의 문주까지 지루한 연회에 볼거리가 생긴 듯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초대된 부자들이나 상인들은 골불견이 허리에 찬 무기라도 뽑을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