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회: 무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 -->
이를 본 사혁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뻔하디뻔한 상황에서 남자가, 그것도 정체를 숨기며 힘없는 용화장 시종을 가장한 자신이 해야 할 다음 행동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말로…
“아이고~ 대협, 이러지 마십시오!”
“놔라, 이놈아!”
“으악! 내 팔! 무림인이 사람 친다!”
자해 공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억울해! 관아에 사람 불러! 나 합의 못해!”
수하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든 사혁을 살짝 밀쳤을 뿐인데 그의 팔이 부러지자 오히려 골불견 본인이 깜짝 놀랐다.
이때 눈치 빠른 우 총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제갈세가의 우모라 하오. 내 보고 있자니 참으로 대협의 행동이 같은 무림인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갈세가에서 온 우 총관이 소리치자 골불견은 오금이 저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갈세가라니,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소협, 괜찮으시오?”
“으악! 나 죽는다! 무림인이 사람 치네! 무림에는 나라의 법도 없구나! 아이고, 나 죽는다!”
사혁을 일으킨 우 총관은 그의 팔을 살피곤 그가 일부러 관절을 뺐으리라 짐작했다.
“소협을 치료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무례함을 무릅쓰고 잠시 자리를 뜨겠습니다, 문주님.”
“아, 아닙니다. 어서 그 청년을 치료하셔야죠. 부상 입은 자를 치료하는데 그보다 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 총관이 일에 관여할지 몰랐던 대영문 문주는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연회 주최자인 대영문 문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우 총관은 골불견에게 소리쳤다.
“골 대협도 따라오시오. 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이다!”
우 총관이 말하기가 무섭게 골불견은 그의 호위무사들에게 양팔이 잡혀, 가기 싫어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녹차 먹인 돼지가 따로 없었다.
용화장의 시종을 치료하겠다던 우 총관이 대영문 뒷산 중턱으로 향하자 그제야 골불견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한참 늦은 뒤였다.
“후우…….”
뒷산으로 올라가자 팔이 부러졌다는 용화장 시종은 거만하게 쭈그려 앉아 있었고 그 옆에서는 우 총관이 쑥이 들어간 시종의 곰방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우 총관을 제외한 나머지 호위대원들은 용화장 시종을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무림에 등단한 지 15년 만에 생애 가장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만은 분명했다.
곰방대의 연기를 길게 들이마신 후 짧게 내뱉은 제갈 사혁은 온몸에 퍼지는 쑥향을 느끼며 한 여름의 정취에 취했다.
싱그러운 꽃향기를 머금은 바람과 대나무 숲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은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세상을 살다 보면 건들이면 안 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
그래, 오늘은…
“그게 나야.”
사람 한 명 땅에 묻기 딱 좋은 날이다.
“살려 주십시오! 형님!”
“아니, 누가 죽인데? 대단하신 웅산 골불견 대협께서는 사파라도 되시나? 아니면 마교?”
“저, 정팝니다! 사문은 없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정파입니다.”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는 절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골불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자는 그야말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진짜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머리만 남긴 채 골불견의 몸을 땅에 묻어버린 제갈 사혁은 꽃에 물을 주는 물뿌리개로 골불견의 머리에 물을 주었다.
“사람은 출세하려면 영리해야 하고 고생하지 않으려면 재치가 있어야 해.”
이 말을 듣고 있던 몇몇 호위무사들은 ‘출세하려면 재치 있어야 하고 고생하지 않으려면 영리해야 한다’가 맞다고 따져보려 했지만 이름 모를 뒷산에 피어난 한 떨기 인화(人花)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토 다는 것을 포기했다.
“앞으로 아무한테나 힘자랑하지 말고, 아니, 정파가 사마 세력에 힘자랑해야지. 우리는 명색이 전 무림의 평화를 지키는 정파인데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면 골불견은 흑사련 련주의 목도 따올 수 있었다.
“원하시면 흑사련 련주 놈 목도 따오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혁은 감동이 밀려왔다.
“흑사련 련주 목은 내가 딸 거니까 넌 그냥 떨거지들이나 죽여. 어렵지 않잖아. 마화천, 흑도섬, 뭐, 그런 떨거지들. 걔들이 힘들면 십야성주라던가? 많잖아. 유명한 애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위무사들은 마화천과 흑도섬은 절대 떨거지가 아니며 십야성주는 진짜로 강한 마교의 강자이고 흑사련 련주는 투표로 뽑힌 공무원 나부랭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할 수 있지?”
“믿어주십시오. 꼭 십야성주를 죽이겠습니다!”
십야성주가 흑사련 련주보다 10만 배는 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름 모를 뒷산에 피어난 한 떨기 인화(人花)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토 다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앞으로 잘하리라 믿는다.”
이를 끝으로 골불견이라는 이름의 꽃을 심고 내려오는 동안 우 총관은 제갈 사혁에게 이것저것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가주께서 이리 훌륭하게 성장하시다니 정도 무림의 미래는 참으로 밝습니다.”
우 총관은 본래 아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웬일이야? 우 총관이 아부를 다하고. 평소에는 내 성격 더럽다고 잔소리를 그렇게 하더니.”
“글쎄요, 저도 나이를 먹었나 봅니다.”
* * *
그 시각 하오문 분파의 육각으로 된 좁은 방 안에서는 중년의 남자와 노인이 마주보고 있었다.
반지며 팔찌 등의 비싼 장신구로 온몸을 치장한 노인은 비좁은 방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다리를 연신 떨었고 그와 마주보고 있는 중년 남자는 새끼손가락에 낀 자신의 반지를 연신 만지며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얼마 후 육각의 좁은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중년 남자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좌호법께서 원하시는 정보는 얻었지만 조금 시간이 걸릴 걸 같습니다.”
그 말에 좌호법이라 불린 노인은 아편이라 짐작되는 걸쭉한 무언가를 특수 제작된 곰방대에 넣어 피우기 시작했다.
“그렇군. 한데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인가?”
“설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자, 이것을 보시지요.”
남자가 좌호법에게 건넨 것은 종이였다. 하지만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가 찾던 본론에 미치지 못하지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좌호법이라 불린 노인이 불같이 화를 내며 살기를 내뿜자 그의 옆에서 술을 따르던 기녀가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있어서 이렇게 사고를 미연에 방지했지 않습니까?”
“정보를 파는 정보 상인이면서 이런 짓을 하다니.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정보를 말이야.”
“그 정보를 전해서 얻는 이득과 좌호법님께 드렸을 때 얻을 이득이 같을 순 없잖습니까. 엄연히 두 정보의 무게가 다른데.”
“나는 자네의 그런 점을 참 좋아하지.”
“빨리 처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것은 필사본에 불과합니다. 진짜 전서는 지금 목적지로 향하고 있을 겁니다.”
“어째서 진짜를 가져오지 않았지?”
진짜가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는 말은 곧 그들에게 꼬리가 잡힐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좌호법에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잖습니까. 계약을 한 이상 저희는 계약을 충실히 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완벽하게 전해준 뒤에 장독에서 물이 세건 말건 그게 저희와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그 말은 곧 정식적으로 체결한 계약도 성공시키고 밀약을 해서 번 돈도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하오문 입장에서 정파니 사파니 마교니 하는 것들은 의리를 지켜야 할 동지가 아니라 단순히 거래를 하고 돈을 댓가를 받는 대상일 뿐이었다.
“자네는 정말 대단한 장사꾼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하오문주가 알면 큰일 나지 않겠는가?”
“저희 문파는 주종 관계로 이뤄진 곳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깟 노인네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하오문은 주종 관계가 확실한 다른 무림 문파와는 확연히 달랐다. 때문에 이런 썩은 부분도 도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까지 좌호법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당장 이곳을 불 싸질러 버려라.”
그 말과 동시에 좌호법의 왼손에 쥐어진 종이와 이 방에 ‘있었던’ 어느 누군가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추후에 크게 보상을 하겠네.”
크게 보상하겠다는 말에 정보 상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에 젖었다.
연회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하는 기지개를 쭉 펴며 나른한 기운을 쫓아냈다.
“으~~”
“그냥 앉아서 먹기만 했는데도 많이 피곤했죠? 노는 것도 일이라니까요.”
“그보다 갈사 소협, 팔은 좀 어떠세요?”
수하는 골불견에 의해 부러졌던 사혁의 팔을 유심히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관절이 빠졌던 것뿐이니 염려 마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치료를 한다며 수하가 한 행동은 대뜸 두 손으로 사혁의 팔을 감싼 것이 전부였다.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한 행동은 다름 아닌 내가요상술(內家療傷術)이었다.
순간 사혁은 깜짝 놀랐다. 하오문의 문도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내가요상술 같은 엄청난 기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뭐하는 거냐는 말에 수하는 어린아이처럼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가르쳐 드릴게요. 그때까지 비밀이에요.”
석양을 등진 채 웃는 그 모습을 본 순간 사혁은 넋을 잃고 수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이성에 대한 호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사혁은 자신의 입을 막으며 얼굴을 붉혔다.
‘사… 사랑은 언제나 폭풍처럼!’
그 시각 용화장에는 검은 인영들이 아직 저물지 않은 태양을 등진 채 용화장 지붕에 서있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검을 꺼내들었다.
“시작해라.”
인간의 목소리라 생각되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살기는, 살의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의 목을 조르기 충분했다.
“윽!”
그 날 제갈 사혁을 대신해 마당을 쓸던 노인 한 명의 죽음을 시작으로 멸문의 겁화가 용화장을 덮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괴한들이 덮쳐오자 시종들은 살기 위해 맨발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여시종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살아야 했다. 살고 싶었다. 자신은 아직 죽기엔 너무 젊고 고향에는 책임져야 할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인을 무정하리만치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버렸다.
흑의인들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칼을 휘둘렀다. 죽어간 이들이 누구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임무를 위해 죽여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흑의인이 문을 발로 차고 나타나자 대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이 천하의 못된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발로 들어오는 것이냐?! 썩 꺼져라!”
하지만 무자비한 폭력 앞에 대부인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들을 향해 못된 놈들이라 욕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수단이었다.
죽음은 절대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을 가리지 않았다.
“금괴를 회수하라.”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저택에서 나온 흑의인들은 일사분란하게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용화장의 대문이 작살나며 부서진 대문의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웬 놈들이냐!”
문을 부수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수하였고 그녀는 단숨에 흑의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무림인인 수하가 몇 장 밖에서 피 냄새를 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피 냄새는 용화장에서 나는 것이었고 그녀로서는 그 후 뒷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흑의인 중 한 명이 수하를 보자마자 검을 휘둘렀고 수하는 권각술을 발휘해 흑의인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발등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쓰러진 흑의인의 검을 빼앗아 재빨리 손에 쥐었다.
회선도(回旋刀).
검을 잡은 그녀에게서 회선도의 초식이 강맹하게 발현되자 흑의인 두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무당?”
흑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복면 사이로 미간을 찡그리며 무당의 무공을 알아보자 수하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마교의 무도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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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