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응?”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제갈 사혁은 짐을 뒤져 먹다가 수하 몰래 남긴 당과를 꺼내 여동에게 주었다. 그러자 여동은 사혁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었다.
“뭐 좀 먹고 싶은데.”
“무엇으로…….”
기어들어 가는 기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냥 팔보 월병이라던가? 뭐, 대충 그런 거. 산사고 같은 것도 좋고 매실… 매실로 만든 걸 뭐라 하더라. 옛날에 자주 먹었는데.”
“청매예요. 우리 집 청매, 아주 맛있어요.”
여동이 과자 이름을 말했지만 사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뭐 그거.”
잠시 후 각종 계절 과일과 다과가 한 상 가득 오자 여동의 눈은 다과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루에서 교육받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사혁이 싫어서인지 다과상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를 본 사혁은 과일 몇 개를 집어먹더니 먹는 것을 관뒀다.
“다 먹었으니 이제 전부 치워.”
“그만 먹게요? 먹을 걸 남기는 사람은 정말 정말 나쁜 사람이랬어요.”
“그냥 버려.”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그럼 네가 대신 먹어줄래?”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여동은 망설였고 그 모습을 본 사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참을성이 많아도 결국 애는 애였는지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청매부터 집어 먹는 걸 보니 좋아하는 음식인 듯 보였다.
“한 송이 아름다운 모리화~ 한 송이 아름다운 모리화~”
여동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불렀고 이내 사혁의 눈치를 보더니 노래를 멈췄다. 그러자 사혁은 그 뒷부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지마다 넘치는 그윽한 향기의 하얀 꽃…….”
“…….”
“왜? 어릴 땐 나도 이 노래 부르고 놀았는데.”
사혁이 계속 노래를 부르자 여동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몇 분 후 여동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방 안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수하와 잠든 여동, 제갈 사혁, 그리고 수하의 수발을 들기 위해 온 기녀뿐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죽자(竹笛)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하는 곡은 강정정가(康定情歌)였다.
“이런 걸 부탁한 적은 없다만? 그리고 난 이호(二胡)로 켜는 이천영월(二泉映月)파라서 그 곡은 내 취향과는 전혀 안 맞는데.”
“이호는 켤지 모릅니다.”
적자로 연주하는 강정정가는 슬픈 느낌이 드는 노래였다. 사혁이 조금만 더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강정정가는 취향에 조금 어긋나는 음악일 뿐이었다.
“이걸 연주하는 이유는 호림을 웃게 해주셨기 때문이에요. 호림이 웃는 일은 자주 없는데 좋은 분 같네요.”
“강호인 중에 좋은 놈은 하나도 없어. 밖에서 논밭을 갈고 땀 흘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지.”
“이 아이는 평생을 이곳을 지나는 남자들만 봐와서 우리들 앞이 아니면 남자들 앞에선 잘 웃지 않아요.”
사혁은 그냥 좀 어린 시절의 혜아 생각이 나서 조그마한 변덕을 부렸을 뿐이다. 어차피 호의는 여기까지였다. 게다가 좋은 사람이라니. 사람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은퇴하면 데려가려고요. 이 아인 어차피 팔려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이곳에서 태어났을 뿐이니까.”
기방에서 태어난 아이라……. 어딜 가나 들을 수 있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모아둔 돈이 있다면 상단에 돈을 맡겨. 조정에서 운영하는 금융체는 이자가 낮으니까 그런 곳은 피하고. 단, 투자는 하지 마. 그냥 그 돈을 가지고 있는 채로 일을 해. 모아놓은 돈이 마음 한쪽에 자리 잡아 힘든 일을 할 때도 든든한 힘이 되어줄 거야.”
그러면서 사혁은 서찰 한 장을 써 줬다.
“꼭 이 상단에 돈을 맡겨. 아, 그리고 평생 혼자 사는 건 힘드니 남자를 구해. 나같이 잘생긴 놈은 대부분 놈팡이니까 안 돼! 애 딸린 홀아비라도 좋겠지. 어차피 그쪽도 볼 장 다 봤잖아? 애가 딸린 홀아비는 책임감이 강해서 이 아이도 잘 보살펴 줄 거야. 그쪽 얼굴이면 누구든 꼬실 수 있을 테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애 딸린 홀아비이니 볼 장 다 봤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강호인은 안 되지만 쟁자수는 괜찮아. 자주 얼굴 못 보지만 못 본 만큼 애틋해질 거야. 아니지, 애가 딸린 쟁자수 같은 건 없으니까 안 되려나?”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투 속에 스며든 진심 어린 충고를 생각하면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
“진지하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그냥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고맙기는.”
눈앞의 청년은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빠처럼 퉁명하면서 아버지처럼 자상했다.
“저기, 아까부터 언제 일어나야 할지 적기를 잡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 때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하 소저.”
수하가 일어나자 기녀는 여동을 안은 채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하와 사혁은 남녀 둘이서 기루에 있는 게 어색해 금자 10냥으로 방을 정리한 뒤 그곳을 나와 길을 걸었다.
“다시 소개할게요. 무당 제1대 제자이신 성제 진인의 제자이자 2대 제자인 청하예요.”
“화산파 제1대 제자 무진, 제갈 사혁입니다.”
스승이 아직 1대 제자인 수하와 달리 사혁은 이미 차대 장문인인 도호 진인의 제자였기에 따로 스승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청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사혁은 한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당신이 청하였구나.’
청하. 죽어버렸다고 알려진 무당파의 제자. 그녀가 바로 용화장에 객으로 있었다던 무당파의 제자였다. 원래는 죽어야 했을 사람의 운명을 바꿔 버렸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갈사, 아니, 제갈 소협이 용화장에 오신 게 혹 저와 같은 이유였나요?”
“마교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습니다. 결국 이제는 모두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용화장은 자신들과 마교가 거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소저께서 밀서를 무당에 보냈을 때 이미 한발 먼저 마교가 행동했다는 사실은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뜻이니까요. 어쩌면 흑사련이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흑사련을 언급한 것은 제갈 사혁 개인의 악감정에 불과했지만,
“명심하고 흑사련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겠어요.”
마교 아니면 흑사련.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이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수하, 아니, 청하는 무당파가 있는 호북으로 가야 했고 사혁은 정파의 중심인 사천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여기서 헤어져야만 했다.
“갈사… 아니, 제갈 소협.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갈사 소협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그 이름이 더 좋거든요.”
좋을 리 없었다, 그딴 이름.
“알겠어요, 갈사 소협.”
좋을 리 없지만 그 이름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그녀만이 불러주는 이름이기에 사혁은 그녀에게만큼은 그렇게 불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만.”
“네.”
헤어지는 길이 아쉽지만 가는 길이 다르기에 이만 헤어져야 했다.
“갈사 소협.”
“?”
그 때였다. 청하는 사혁을 불렀고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때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잘생긴 얼굴, 훌륭한 무공, 그리고 제갈세가와 화산파라는 든든한 배경.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렇군. 여자라면 당연히 나같이 완벽한 남자에게 끌려 좋아한다고 고백을!’
“갈사 소협에게 검은 옷은 너무 안 어울려요. 앞으로는 밝은 색으로 된 옷을 입으세요.”
“…….”
호감이라는 감정은 쉽게 생겨도 연모라는 감정은 쉽게 생기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또 봐요.”
그녀의 미소와 재회를 약속하는 무심한 한마디. 지금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네, 또 봐요.”
사랑은 언제나 폭풍처럼.
“안녕, 나의 서른다섯 번째 첫사랑.”
하지만 1이라는 숫자를 넘겨버린 순간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첫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화산파에 전서구를 날려 보내는 것으로 용화장 사건을 마무리하고 난 후 제갈 사혁은 사천으로 향했다. 지난 생애 사천에서는 썩 좋은 기억이 없었다. 그렇지만 혜아를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사관(學士串)이었지.”
사혁은 지나가는 마차를 얻어 타고 팔자 좋게 수레에 드러누웠다. 미간에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과 쩌렁쩌렁 울리는 매미 소리를 들으니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는 여유가 없었지.”
지난 날 이맘때의 자신은 굉장히 여유가 없었다. 첫 무림행이었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일에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와 같았다. 힘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무림인은 제멋대로였다.
스스로도 무림인의 무지함을 알고 있지만 무림인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지루하니까.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은 지루할 게 분명했다.
“젊은이, 성도에 도착했네.”
“고생하셨습니다.”
사천의 성도에 도착하자 사혁은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 마차를 몬 농부에게 건넸다. 그러자 농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기뻐했다. 표정으로 보아 오늘 하루 거하게 한잔 걸칠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천은 정파의 중심지이다. 구파일방 중 청성파, 공동파, 아미파가 있고 오대세가로는 사천당가가 있다. 그러다 보니 무림맹 또한 사천에 있었다.
사혁이 그토록 자부심을 갖는 정파의 중심지이지만 그는 이곳에 오는 게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지난 생애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생애 처음으로 져버렸기 때문이다.
상대는 굉장한 고수였고 그런 자에게 패한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자가 사파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찾아가서 죽여 버릴까?”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이가 바득바득 갈릴 정도로 화를 참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마음의 상처가 되어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자를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봉을 잘 다뤄 봉명공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소림의 파계승이었다. 당시 사파인이었지만 태생은 소림사 출신이었기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치욕스럽지만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사나이가 되서 지난날에 연연하면 안 되지.”
사천은 음식이 대단히 발전했기 때문에 사천을 밑천 삼아 여러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음식점들에 의해 시장이 활성화되어 유동 인구도 굉장했다.
“쌉니다, 싸요! 돼지머리 고기 두 근에 열두 냥! 하지만 네 근을 사면 스물세 냥 밖에 안 됩니다!”
“오리 구이 한 마리에 열아홉 냥! 오리 구이 두 마리를 사면 39냥! 한 마리는 그냥 덤입니다!”
‘그게 싼 거냐?’
어딜 가나 사기꾼들이 많았다.
학사관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여기저기 입학 행렬이 눈에 띄었다. 학부모의 공식 방문이 허락되는 건 입학 기간뿐이다.
“다행히 시간 맞춰서 왔네.”
학사관 방명록에 이름을 쓴 뒤 제갈 사혁은 혜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학사관은 원래 여인들을 가르치는 곳이라서 학도들의 스승을 제외하면 남자는 흔치 않았다. 특히 사혁처럼 젊은 남자는 더더욱.
“어머, 저 남자 좀 봐.”
사혁은 굉장한 미남이었다. 일부러 얼굴에 상처를 크게 내고 용화장에 잠입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잘생기면 눈에 띄니까.
‘이런 걸 즐기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지.’
학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사혁은 이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남자가 얼굴이 다는 아니니까 조심해야 해. 저런 남자는 얼굴값 하게 된다니까. 조강지처 버리고 나중에 딴 여자랑 살림 차릴 게 분명해.”
“그건 맞아. 저런 남자는 꼭 얼굴값 한다니까.”
하지만 학사관의 학도로 있는 여인들은 현명했다.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젠 그 대상이 사혁이라는 점이었다.
‘어이! 아가씨들, 이 오라버니는 지난 생애에서도 일평생 혼자였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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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