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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협-15화 (15/262)

<-- 15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청하가 서른다섯 번째 첫사랑인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제갈 사혁은 얼굴도 잘생기고 집안도 좋고 사문도 훌륭하고 화산의 다음 장문인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연인이 없었다. 숫기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단지 그것만으로 연인이 생기지 않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몰라 화산파 장로들 중 결혼을 한 사숙 세 분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답변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도복 입고 다니면 도사 냄새나니까 당연하지, 라고 하셨지, 아마?”

도사는 일반적으로 혼인을 안 하지만 혼인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일 화산파 도인임을 나타내는 도복만 입고 강호를 누볐기에 여인들이 애초에 연정의 대상으로 봐주지 않았다. 아니, 분명 누군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 해도 도사라는 신분이 가진 편견은 대단했다.

‘소림승도 아닌데 뭔 도사가 대수야!’

사혁이 도복을 입고 다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청춘사업의 실패를 되새기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학사 제2관에 도착했지만 아직 수업 중이었다.

“도련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웬 모르는 여자 하나가 사혁에게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도련님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제갈세가의 사병인 듯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얼굴을 내보여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지?”

“제5호위대 대원, 미림이 인사드립니다.”

어차피 상관은 아랫사람 얼굴을 몰라도 아랫사람은 상관의 얼굴을 아는 법. 대충 상황을 이해한 사혁은 미림을 일으켜 세웠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수업이 끝납니다.”

호위무사라지만 딱히 자신의 부하는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교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종 아니면 호위무사였다.

수업이 끝나자 혜아는 제일 먼저 학당에서 나와 미림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림, 오래 기다렸지? 점심 먹자.”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혜아는 사혁을 못 본 사람처럼 지나쳐 버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는 호위무사인 미림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사혁은 혜아가 자신의 얼굴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실제로 혜아를 마지막으로 본 게 8년 전 학사관에 입학하기 전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내심 서운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사혁은 혜아의 뒤에 서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누구……!”

후팔각(後捌脚).

갑작스러운 초식에 사혁은 턱을 내주고 그만 복도 끝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혜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품에서 단도를 꺼내 날렸다.

가전무공 중 하나인 소리비도(小莉飛刀)의 천궁뢰(天穹雷)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혁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천궁뢰는 상대의 두 눈을 찌르는 살초였기 때문이다.

‘이 오라비를 죽일 셈이냐!’

사혁이 황급히 두 손가락으로 허공에 원을 그리며 기파를 날리자 날아오던 비도는 그 자리에서 힘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8년 만에 본 오라비를 죽일 셈이냐?”

“?”

“혜아야, 나는 널 알아보는데 너는 날 모르겠느냐?”

“오라버니?”

“그래, 오라비다.”

“오라버니!”

“컥!”

평범한 소녀라면 오라버니의 품에 살포시 안겨야 했지만 혜아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자신의 어깨로 사혁의 배를 들이받아 복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야……. 떨어져… 아파 죽을 것 같아. 떨어져! 제발 좀 떨어져!”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죽을 것 같은 사혁과는 달리 오라버니와의 재회가 기쁜 나머지 그녀는 사혁의 허리를 붙잡고 교실 복도를 세 번이나 굴렀다. 그 덕에 사혁의 갈빗대는 금이 가버리고 말았지만 차마 자존심 때문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감격의 재회를 가진 후 학사관 내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한 두 사람은 오랜 회포를 풀었다.

“화산파를 사문으로 두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오라버니랑 놀기 위해 얼마나 무공을 열심히 수련했는데요.”

“나랑 놀고 싶어서 무공을 수련하다니, 어째서?”

“에이, 어렸을 땐 다 그렇게 생각하죠. 원래 동생들은 언니나 오빠가 하는 걸 따라하고 싶기도 하고.”

지난 생애에서는 어디까지나 행방불명이었고 이번 생애에서는 자신의 행적이 모두 제갈세가에 연통이 갔으니 이 정도 변화는 있을 수 있었다.

“어머! 다과가 떨어졌네요. 가서 가지고 올게요.”

혜아가 다과를 가지러 가자 사혁은 더없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혜아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지 않을 때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사천에 웬 사파 놈들이 이렇게 많아.

“!”

미림은 사혁의 전음에서 느껴지는 투기에 깜짝 놀라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조정에서 운영하는 곳입니다.”

확실히 사파의 기도를 가진 호위무사가 몇몇 보였지만 그들이 호위하는 소녀들에게서는 무림인 특유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천당가와 아미파는 이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몇 년째 별다른 대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호위무사를 한 명 두는데 반해 확실히 이 상황에 민감한 사천당가와 아미파의 호위무사들은 3인 1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넓고 조용한 식당에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뺨을 맞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도 중 한 명이 시중을 드는 시녀의 뺨을 때린 것이다.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사혁이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황당한 일에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 옷이 얼마나 비싼 옷인데 마파두부를 엎지르면 어쩌겠다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시녀는 딱 보기에도 그 아가씨의 할머니뻘이었다.

“이 옷은 네년이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사지 못하는 그런 옷이야! 그런데 이런 짓을 저질러?”

“아가씨, 보는 눈이 많습니다.”

그 아가씨의 호위무사가 주인을 제지했지만 주인의 화를 전부 담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지금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는데 그깟 보는 눈에 신경 쓰게 생겼어!”

“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죽을죄를 졌다고 하자 그녀는 기세가 오른 듯 오히려 더 불같이 화를 냈다.

“닥쳐라! 여기서 네년의 목을 쳐도 옷값을 갚을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이냐?”

그 나이 때에 체면이나 자존심이 중요한 것은 남여를 떠나 당연한 일이지만 사혁의 눈에는 품위 없어 보였다. 나이가 많건 적건 시종을 혼내는 것은 당연하나 이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이 난리라니, 격조가 없어도 한참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상황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오지랖이 그 정도로 넓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오지랖 넓은 사람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말이 심하잖습니까!”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혁은 진심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문제의 당사자가 사파 출신의 호위무사를 달고 있다는 것과 오지랖 넓은 사람이 아미파 출신의 비구니라는 점이었다.

“감히 본녀의 시녀와 본녀 사이의 일에 끼어들다니 어디서 배워먹은 예절인가?”

“아무리 물질이 최고라지만 사람의 목숨이 어찌 한낱 비단옷과 비교될 수 있단 말입니까!”

“비교되느니라. 시녀는 본녀의 소유물이고 본녀는 시녀의 주인이다.”

“저분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저분은 저분의 것입니다.”

원래 남자들 주먹다짐보다 여자들 말싸움이 살벌하기로 따지면 배는 더했다. 몇 마디 주고받은 것뿐이지만 이미 마음속으론 서로 한두 차례 검을 나눈 것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 때 절대 나와선 안 될 말이 입에서 나왔다.

“정파의 위선자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군.”

해마다 정파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 중 단연 최고인 바로 그 말, 위선자.

“감히!”

“이봐, 당신!”

자리에 있던 사천당가의 호위무사와 몇몇 중소 정파 출신의 호위무사들이 검을 뽑자 같은 사파 출신의 호위무사들 역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혁은 ‘이봐, 당신!’이라고 패기 넘치게 외친 사람이 혜아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인원을 따졌을 때 사파가 불리하지만 상황이라는 것이 사파무사들을 싹 죽이고 끝날 만큼 깔끔하지 않았다. 이곳이 학사관이고 나라에서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파의 위선자라니. 우리는 지금 정파도 사파도 아닌 학관의 학도입니다.”

혜아의 외침에 사건의 당사자인 사파 여인은 더욱더 언성을 높였다.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나 제갈 혜는 본교 학관의 학도로서 이 사건에 나설 자격이 충분하다 봅니다.”

“이제 보니 너도 썩어빠진 정파구나,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하다니!”

여자들 일에, 그것도 애들 일에 끼어드는 게 모양새도 좀 우습고 해서 넘어가려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가족이 관계된 이상 이것은 오지랖이 아닌 의무가 돼버렸다.

‘이래서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되는 거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감히라는 말을 사용할 자격은 없다.”

그 때 사파 여인을 호위하던 호위무사가 사혁의 목소리에 반응해 우발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에 사혁은 고개를 틀어 검을 피했다.

“…….”

완벽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서 성질이 났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를 썼다.

“학도의 신분은 모두 같은 것이다. 아래위가 없는 동등한 관계니 말을 가려 하도록.”

“뭐야?”

“좋아, 이 시녀와 너의 문제이니 간단하게 해결해 주도록 하지. 거기 너.”

“말조심하라, 본녀에게 감히!”

“한 번만 더 본녀니 뭐니 지껄이면 죽여 버리겠다. 본좌니 뭐니 자기 입으로 자기 자신을 높여 부르던 놈들 중에 내 손을 안 거쳐 간 놈이 없었다.”

그 때 다시 한 번 여인의 호위무사가 반응을 보이자 사혁은 살기가 짙게 깔린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객기 부리지 마라! 두 번은 없다.”

아무리 사파를 경멸해 마지않는다지만 사촌 동생이 있는 앞에서, 그리고 동생의 학우들 앞에서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연출할 수는 없었다.

“이 시녀와 그 옷값을 지불하겠다.”

옷값은 몰라도 시녀를 사겠다는 말은 파격적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지만 옷값을 해결해 주는 것도 예삿일이 아닌데 시녀까지 사겠다니.

“흥! 좋다. 금자 200냥을 내놔라!”

금자 200냥이면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사혁은 200냥이라는 말에 오히려 한술 더 떴다.

“500냥을 주지.”

500냥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아무리 부잣집이라 하더라도 겨우 치기 어린 자존심 때문에 500냥씩이나 걸진 않는다.

“조… 좋다.”

끝까지 당당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사파 여인은 500냥이라는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500냥이 누구 집의 개 이름은 아니지만 용화장에 있는 갖은 보물을 손에 넣어 빼돌렸기 때문에 그 정도는 지금의 사혁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이쯤에서 모두 해결 본 걸로 하지.”

사혁이 사건을 해결하자 모든 호위무사들은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대의 이름은 뭐지?”

사파 여인이 사혁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모르는 게 나을 겁니다, 아가씨.”

순전히 놀리는 투였기에 사파 여인은 미간을 구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사혁의 입장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할 리 없었다.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언젠가 내 이름은 너의 부모 형제를 죽인 원수의 이름이 될 테니까.’

정사지간에 통성명이라니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였다.

모든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다과를 즐길 때쯤 사혁은 미간을 구겼다. 아까부터 한차례 언쟁이 오고 갔던 사파 여인의 호위무사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끼리 남사스럽게 호감이 있어서 보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주제도 모르고 감히!’

“우와, 오라버니 정말 멋있어요.”

사혁의 깔끔한 일처리에 감동한 혜아는 그의 입에 포도를 넣어주며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하지만 이런 동생의 애교에도 사혁의 눈은 사파의 호위무사에게 닿아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사혁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상대를 도발했다.

‘두 번은 없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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