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6화 (16/262)

<-- 16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터에서 오징어를 씹으며 납작한 바위에 앉은 제갈 사혁은 살을 베어내는 초여름의 날카로운 칼바람을 맞으며 상대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절제된 움직임에서는 결투를 앞둔 사나이의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비룡 마가장(飛龍 馬家莊) 귀보(鬼堡).”

비룡 마가장이면 흑사련에서 제법 알아주는 살수 집단이었다. 어쩐지 그 사파 여인의 기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었다.

“화산파 제1대 제자, 무진.”

무림인으로서 사문의 명예를 걸고 생사를 다투는 자리에서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은 의미가 없었다.

“!”

사혁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상대는 그에게 다가와 공격했다.

“쳇!”

사혁이 상대를 인지했을 땐 이미 검에 베인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팔이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외공으로 단련된 그였기에 약간 깊은 검상 정도로 끝이 났다.

솔직히 상대를 얕잡아 본 것도 한몫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이 이상 기세를 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천룡반선공(天龍返禪功).

강력한 기공 공격을 가하자 귀보는 몸의 중심을 잃고 잠시 휘청거렸다. 바로 이때를 사혁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조금 따끔거릴 거다.”

비스듬하게 정강이를 후려친 하단 발차기는 짧고 간결했다. 여타 다른 각술과 달리 강력하지 않지만 하반신에 충격을 축적시키기 아주 좋은 초식이었다. 그 뒤에 연계되는 나한천공(羅漢天功).

하반신이 잘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귀보는 아래에서 위로 턱을 후려치는 나한천공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과연 귀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몸놀림.

“거기까지다!”

도망가는 상대를 쫓아 일권복호를 날리려는 순간 귀보는 칼은 사혁의 주먹을 찢어발길 기세로 길게 뻗었다. 귀보의 비기 팔겸(捌鉗)이었다.

비록 살가죽이 찢겨나가진 않았지만 사방으로 튀기는 피는 오히려 사혁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어 쾌락을 이끌어냈다.

보법을 사용할까, 허초를 섞은 초식을 발현할까 등의 생각도 수십 번 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귀보와의 치고 박는 원초적인 대결이 재미있었다.

“하하하! 바로 이거야!”

귀보는 사혁이 주먹을 두 번 휘두르면 두 번을 모두 피했지만 세 번 연속으로 휘두르면 마지막 한 대는 피하지 못했다. 반면 사혁은 귀보가 검을 두 번을 휘두르면 한 번 피하고 나머지 한 번은 베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주먹을 욱여넣었다.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몸으로 맞아가며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러도 귀보는 그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사혁이 단단한 팔뚝을 휘둘러 목뼈를 부러트리려 하자 검집을 꺼내 막아내는 기지도 보였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사혁이 작정하고 손날을 세워 휘두르자 검으로 방어하여 응수했다. 그 결과 사혁의 피가 사방에 튀김과 동시에 귀보의 검이 부러졌다.

“뭐야?”

승기(勝機)를 잡았다고 생각한 그 때 귀보는 분신술이라도 하듯 빠르게 움직였고 사혁의 눈을 어지럽힌 뒤 부러진 반쪽짜리 검으로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요괴한테 홀린 기분이군!’

귀보의 움직임을 도저히 눈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사혁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착시 효과일 뿐이야. 실체가 있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공격이 들어올 때, 그 때가 기회다!’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기세로 귀보의 다음 공격을 기다린 사혁은 귀보가 복부를 때리자 이를 악물고 매화산수(梅花散手)를 발했다. 그리고 뱃가죽을 벗겨낼 기세로 귀보의 배를 움켜쥐며 흡정마공의 묘리를 이용해 내공을 역으로 강제 주입시켰다.

“크악! 푸웃!”

귀보는 비명과 함께 검붉은 피를 쏟아내며 뒤로 넘어갔다.

사혁이 자신의 허벅지를 꿰뚫은 반쪽짜리 검을 거칠게 뽑아내고 천근추(千斤錐)의 묘리를 발휘해 쓰러진 귀보의 머리를 오른발로 밟아 아작 내버리려는 순간,

“!”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왔다. 이에 반응해 발을 거두고 암기가 날아온 곳을 응시하자 수풀 사이로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이것저것 기운 옷가지와 머리에 두른 녹색의 두건. 자세히 보니 재수 없게도 그 사람은,

“봉명공.”

자신에게 첫 패배라는 쓴맛을 알려준 봉명공이었다.

‘낙산대불(乐山大佛)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에?’

그러고 보니 이곳이 낙산대불로 가는 가장 큰 길목이었다.

‘이런 미친!’

사혁에게 던진 암기가 젓가락이었는지 그는 젓가락 대신 손으로 밥을 퍼서 먹고 있었다.

“소승은 지나가던 중이온데 살생을 금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례를 무릅쓰고 결투를 방해했습니다.”

봉명공에게는 앙금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 없이 봉명공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지난 생애가 아닌 현재를 기준으로 봉명공은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살생 운운하기 전에 마파두부에 있는 돼지고기나 숨겨라, 봉명공.”

“소승을 아시오?”

“한때 정파 제일이라 불린 봉명공을 모르면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지.”

“그러고 보니 시주는 소림의 권법과 화산의 권법을 사용하시더구려.”

“권법에 있어 소림의 권법을 빼놓을 수 없는 법. 파계승 주제에 사문을 자랑하고 싶은가?”

소림에서 나온 권법이라곤 하지만 널리 공개가 된 만큼 무당이나 화산 등 다른 문파에서도 사용 중이었다.

“화산파라면 그대가 장백영(蔣伯英) 무원이겠구려, 반갑소.”

“그분은 대사형이시고 난 제갈 사혁, 무진이다. 네놈은 사형의 친우였다 하던데 일부러 나를 놀리는 것이냐?”

“호, 제갈인데 무진이란 말이오? 제갈 무진… 무진이라는 도명은 정말 멋지구려! 귀하게 여기시오.”

남의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치자 사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참았다. 봉명공은 그보다 윗세대인 대사형 무원과 같은 세대의 후기지수이며 동시에 사형의 친우였기 때문이다.

“제갈 무진 시주, 이쯤에서 손을 그만 빼시는 게 어떻겠소? 팔겸은 사파의 검술이오. 사파 출신이고 사도 무림인인 이 사람이 이곳 사천에서 죽임을 당하면 일이 시끄러워지지 않겠소?”

봉명공이 사파에 몸을 투신했다곤 하지만 그의 성격상 틀린 말을 하진 않기에 사혁은 예를 지켰다.

“좋다! 원래대로라면 사파의 무리 앞에서 깽판 치고 막나가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봉명공의 체면을 세워주지.”

“장백영과 같은 세대인데 이왕이면 선배 대접해 주지 않으시겠소? 제갈 무진.”

“일부러 사람 이름을 틀리는 놈이 무슨! 그리고 사파 주제에 선배 대접 받고 싶냐?”

“살기 위해 사파에 협력하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정파이오만?”

그러면서 봉명공은 귀보의 혈을 점해서 출혈을 막았다. 소림사 특유의 치유법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꼭 손가락으로…….’

침술을 구사하는 듯 보이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인 치유 방법이었다.

“제갈 무진 시주는 놀랍구려. 그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다니, 화산파는 인재 복이 참 많으오. 그런데 왜 그랬소? 이만큼 실력 차이가 나는데 왜 일부러 맞아주었소?”

일부러 맞아 주었다니 보기완 다르게 꽤나 사람 치켜세울 줄 아는 놈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정말 여우같았다. 경극 구경을 하듯 저녁 식사를 하며 남의 결투를 처음부터 몰래 훔쳐보다니.

“첫 일격은 방심했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귀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상대더군.”

“귀보가 분명하오? 이 시주가 분명 비룡 마가장의 귀보요?”

“그렇다더군.”

“그렇다면 방금 그 보법은 무림에서 신묘하기로 이름난 귀섬귀보(鬼殲歸步). 그것을 파훼한 시주도 참으로 대단하시오. 그 신묘한 수를 간파하다니.”

“실체가 있는 건 결코 사라지지 않아. 정말로 귀신이 아니고서야 존재하는 게 사라질 리 없다. 나는 보법을 파훼한 게 아니다. 단순히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취했을 뿐이다.”

사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매화산수를 너무 강맹하게 펼친 것 아니오?”

“단전을 부수기보다 대가리를 박살내서 끝내려 했는데 어디 사는 누가 방해를 해서 말이야.”

사마대적(邪魔大敵)이라고 해도 단전을 부수는 것보다는 단숨에 숨통을 끊어주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였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일 아니오. 나는 그저 올바른 일을 했을 뿐이오.”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패성각(覇成脚).

위협용으로 사용한 무공이었지만 족히 1장(丈) 범위의 땅바닥이 주저앉아 버렸다.

“그 다리, 칼에 찔려서 다치지 않았소?”

“너랑 농담 따먹기 하는 사이에 다 나았다.”

사혁 특유의 치유 능력 덕분에 무공을 펼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신묘하오, 제갈 무진 시주. 무공도 대단하고 신묘한 육신도 타고났구려. 정도 무림에 시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진심으로 기쁘오.”

사혁 정도의 실력을 갖춘 고수는 기감이 발달해 상대가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 사소한 거짓말과 진담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때문에 사혁은 봉명공의 말과 행동이 모두 진심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짜증을 느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잘만 하면 또다시 만날 일 전혀 없을 봉명공이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까 또 만나버렸다.

이래서 사혁은 사천에 오기 싫었다. 어찌 되었건 지난날 정신적인 외상과 압박을 준 봉명공이기에 사혁은 근본적으로 봉명공이 싫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제갈 무진 시주.”

뭐가 예쁘다고 부상당한 귀보까지 들쳐 엎고 따라오는지 여간해서 봉명공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사파 놈이니 확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지난 생애에는 막 강호에 출두한 애송이였기에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분노를 뛰어넘는 이 위화감은 무어란 말인가?

“그럼 제갈 무진 시주, 귀보 시주를 치료해 주고 오겠소이다.”

그러던가 말든가 사혁은 나무에 기댄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옛날엔 정파를 배신하고 파계승이 된 봉명공에게 적의를 가지고 달려들었다가 패하고 목숨만 건졌다. 솔직히 말해 그와는 과거에도 두 마디 이상 나눠본 적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지난 생애란 말이야.”

기연을 빼앗은 종방영을 시작해 스승님이었던 도산에게 아들이 생긴 것과 죽었어야 할 청하를 살린 것, 덤으로 무공을 익힌 혜아. 그리고 지금 과거에 단 한 번밖에 인연이 없었던 봉명공과의 통성명.

“이상하네. 원래 사파라는 소리만 들어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야 하는데.”

봉명공이 무서운 건 맹세코 아니었다. 이미 내공의 유무와 상관없이 권각술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사물을 부셔버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기에 같은 세대에서는 상대가 없음을 자부했다. 그런데 왜 봉명공에게 대적하고 싶지 않은 걸까?

“의원에게 잘 보냈소. 귀보 시주가 다음에 다시 붙어보자고 했소.”

“흥! 주제도 모르고 건방진. 다음엔 쫑알거리지도 못하도록 목을 부러트리지.”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시오.”

“그런데 넌 왜 나를 따라오냐?”

“이것도 다 인연 아니겠소?”

인연은 개뿔이!

다음날 학사관으로 간 사혁은 혜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또 보자.”

“오라버니도 잘 지내세요.”

여전히 동생이란 존재는 돌아서면 또 걱정이 되고 나이를 먹었어도 쉽게 마음 놓이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집에 가보니 현종이 없더구나?”

“글공부를 위해 외가에 가있어요.”

이제 9살이 된 혜아의 남동생 현종은 아기였을 때 말고 만난 적이 없었다.

“백모의 친정이라.”

백모 한미욱의 친정은 예로부터 학자 집안이었다. 만나진 못했지만 현종에 대해서도 알았기에 사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작별을 고했다.

“오라버니!”

영영 못 만날 것도 아닌데 이 아이가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혜아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오라버니는 잘 모르시겠지만 소화… 라고 해요.”

소화. 그 이름에는 정 같은 건 없었다.

“그래.”

한참 혜아를 바라보던 사혁은 별 감흥이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가 저 멀리 사라지자 혜아는 아쉬운 듯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숙모님도 오라버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계세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이미 저만치 떠나고 없었지만 그래도 말해 주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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