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한편 학사관에 간 제갈 사혁과 달리 봉명공은 주점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고 있었다. 그는 파계승이기 때문인지 고기를 먹는데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 봉명공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방년(芳年)도 안 된 여인들이 사천에서 사라지고 있다. 주인공(主人公) 무진(無榛).”
“법명은 몰라도 이름은 부르시지 마시죠, 사형.”
이 남자와 대화할 때 봉명공은 하오, 시오, 같은 말투를 사용하지 않았다.
“속가인 사형이 이름 좀 불렀기로서니 무엇이 문제더냐?”
“그보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없다. 사건을 공식적으로 조사 중인 곳은 아미파다. 그러니 나머지 정보는 알아서 얻어라. 그래, 아미파에서 정보를 얻어 보면 어떻겠느냐?”
소림은 대외적으로 다른 정파에 비해 강호행을 하지 않기로 유명해서 현재 밖에 나와 있는 이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중원 전역에 널리 알리는 포교승이 전부였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파계승이나 무공을 할 수 있는 이라고는 봉명공뿐이었다.
“저는 지금 파계승이며 사파입니다만?”
“소림에서 온 승려인 척하면 되지 않느냐?”
“방장께서는 제자를 너무 굴리십니다. 정보 하나 없이 사천에서 여인들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만 달랑 하시고서는.”
그 말에 크게 공감을 한 남자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그보다 흑사련 생활은 어떠냐?”
“덕분에 사파인으로서 신뢰는 얻었지만 임무 같은 건 안 주더라 말입니다. 이래서 태생이 중요하구나, 깨닫는 중입니다.”
“사형께서 걱정 많이 하신다. 원래 이 일은 사형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이라며.”
“희생은 불도를 닦는 자의 덕이며 도리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라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저의 업입니다, 사형.”
이들의 대화는 사파이자 파계승인 봉명공이 마치 소림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이뤄지고 있었다.
“참, 화산파의 무진이라는 자와 만났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 아닙니까? 같이 다니면 참 재미있겠다, 생각합니다.”
“신분상 흑사련 소속이니 정파인과 같이 다니면 조금 문제 있지 않겠느냐?”
“말했지만 임무를 하달받거나 하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나는 계륵(鷄肋)입니다.”
“그래, 그럼 몸조심해라.”
굳이 사파를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림은 봉명공을 흑사련에 두었다. 대체 봉명공으로 인해 소림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기에?
* * *
그 시각 제갈 사혁에게는 전서구가 도착했다.
어디서 날려 보내든 반드시 화산파를 찾아가지만 문젠 다시 돌아올 때였다. 귀소본능이 생길 정도로 한군데에 오래있질 못하다보니 보내는데 하루면 충분할지 몰라도 돌아오는 데는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
비밀유지를 위해 전서구를 사용하고 있지만 어지간하면 하오문을 이용해야했다.
전서의 내용은 항상 망화각으로부터 오는 흑사련 관련 정기 보고였지만 오늘은 정기 보고가 아니었다.
사천에서 여인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미산(峨嵋山)으로 가주십시오. 아미파와 협조하되 단, 공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주십시오. 망화각.
망화각에서 임무를 주는 경우는 단 하나. 사문으로부터 정식 임무가 떨어졌을 때뿐이다. 그리고 사문의 제자인 사혁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임무를 최우선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번 일은 누가 먼저 사건을 해결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정도는 함께 지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공적(功績)은 함께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혁은 내공을 발휘해 종이의 수분을 증발시켜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응?”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계기랄 게 없었는데 무공이 한층 성장한 듯 느껴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흡정마공이 말이다.
보조 격으로 사용하는 흡정마공이기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저절로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하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불길한데.”
아무리 대단한 무공이라 해도 근본은 마공에 불과했기에 사혁에게는 썩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이유 없는 성장은 더더욱.
객잔을 나서자 누군가 호쾌한 경공을 발휘하며 지붕을 타고 내려왔다.
“선문청운보(禪門靑雲步)인가?”
소림 특유의 경공치고는 다소 느리지만 험한 절벽 지대에서는 탁월한 경공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경공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봉명공뿐이었다.
“안녕하신가? 제갈 무진.”
이젠 시주라는 호칭도 빼고 대놓고 친한 척이니 당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 두 놈 있는데 하나는 미친 척하는 놈이고 나머지 하나는 친한 척하는 놈이다.
“네놈 상대할 시간 없다. 아미파로 갈 생각이니까.”
“나도 아미파로 살 생각이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사혁이 발차기를 날렸다. 결코 위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는 봉명공도 등줄기가 싸늘해질 정도였다.
“워워, 진정 좀 하시오,”
“사파 놈이 아미파엔 무슨 볼일이지?”
“사천에서 여인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다 들었소.”
“사파 놈이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엄청난 살의였다. 단지 죽이고자 하는 ‘마음’일 뿐이지만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사파 역시 추구하는 것은 정의 아니겠소.”
“세상의 모든 정의는 정파로부터 이뤄진다.”
어떻게 된 사람이 이 정도까지 흑백 논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봉명공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 세상의 정의를 추구하는 제갈 무진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하겠소.”
“마음대로 해라.”
일단 따라오는 것 자체에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지만 머릿속으로는 냉정하게 고민 중이었다.
아미파에 도착하는 순간 이놈이 사파 놈이라는 것을 까발릴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아미산이 가까워지자 사혁은 짜증을 내며 봉명공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야, 그 옷 벗어!”
등짐을 내려놓고 옷을 벗은 사혁은 등짐에서 매화검수임을 나타내는 도복을 입었고 원래 입고 있던 용이 그려진 흰색 도포를 봉명공에게 주었다.
“후딱후딱 입어라.”
“잘은 모르지만 알겠소.”
잠시 후 사혁의 흰 도포을 입고 나온 봉명공을 보자 사혁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사혁이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면 봉명공은 곱상하니 그야말로 꽃을 연상케 하는 미남이었다.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뭐가 말이오?”
“그냥 그렇다고.”
아미산을 오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화산파의 가파르고 비정한 절벽에 비하면 아미파는 동네 뒷산이나 다름없었다.
아미파는 무림의 규수들이 학사관처럼 예의범절을 익히거나 무공을 익히는 등 속가 성향이 짙어서 비구니보다는 여인들이 많았다. 특히 그들이 아미파 안에 있는 폭포에서 발을 담구며 물놀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천국이다!”
라고 방금 전 아미파에 도착한 사혁은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갈 무진! 뭐하는 것이오. 이런 행동은 사내대장부답지 못하오.”
사혁보다 뒤늦게 도착한 봉명공은 꽉 막힌 스님답게 사혁의 눈을 가렸다.
“이 멍청아,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이거 좀 놔. 훔쳐보면 못된 짓이지만 인기척을 내면 아니라 이거야.”
“무슨 소리이오?”
“이럴 때 보통 멍청한 남자는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다가 그 모습을 타인에 의해 들켜서 변태로 오해받지만 나는 아니라 이거야.”
그 말을 하고 사혁은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허벅지까지 치마를 걷고 발을 물에 담구고 있지만 외간 남자가 보아서 크게 문제될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나갈 수는 없는 법이기에 사혁은 일부러 돌멩이를 던져 소리를 냈다.
“누구냐!”
역시 아리따운 겉모습과 달리 무림을 살아가는 여인들이기 때문인지 검을 뽑으며 외치는 모습에서 특유의 자신감과 섬뜩함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낸 사혁은 최대한 어수룩하게 고개를 숙이며 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미파로 가는 길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반응이 뒤숭숭했지만 제갈 사혁의 복장이 화산파의 매화검수임을 나타내자 다들 침착하게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시군요. 하지만 다음에는 조심하여 주십시오. 아미의 검은 무례한 남자들에게 한없이 매서우니까.”
“다행입니다. 저는 무례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웃으면서 말하는 아미파의 제자를 본 순간 사혁은 목 주변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들이란....’
여인들을 따라 아미파의 정문에 당도하자 중년의 비구니가 사혁과 봉명공을 맞이했다.
“하우(夏雨)라고 합니다.”
“저는 화산파에서 온 제갈 사혁입니다. 도명은 무진입니다.”
“저는 봉… 푸웃!”
사혁은 재빨리 팔꿈치로 봉명공의 옆구리를 때리고 그의 입을 막았다.
“하하하, 제 육촌인 제갈 도진이라고 합니다. 봉을 좀 다루지요.”
아미파에서 봉명공이라는 별호를 꺼내려 하다니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었다.
“사태께서는 무림맹의 일로 인해 출타 중이십니다. 이쪽으로.”
“혹시 이번에 일어난?”
역시 그 일 때문인지 하우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길을 가다 보니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속가 제자의 비율이 아미파는 다른 문파에 비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꽃밭이니 천국이 따로 없었지만 불가의 가르침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소림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것이 꼭 거대한 서당 같은 느낌이오.”
“그러고 보면 아미파는 불도를 닦는 것과 거리가 멀긴 해.”
“화산파도 가만히 보면 도를 닦는다기보다 그냥 칼잡이들이 모인 곳 아니오?”
‘도사가 칼잡이면 스님은 부처냐? 이 새끼가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지들도 종교로 사업하는 주제에!’
봉명공의 말에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외쳤지만 내심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인지 달리 무어라 대꾸는 하지 못했다.
하운 스님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속가 제자인 듯했다.
‘본산 제자 보기 힘드네, 정말.’
“마교 아니겠습니까? 거대 세력이니 흔적도 남기지 않는 거죠.”
아마도 사건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교가 단일 문파로는 최고라 하나 단지 그것만으로 의심하기에는 충분한 증거가 없습니다.”
“여인들만 잡아가는 수법이 왠지 좀 걸립니다.”
‘하긴, 솔직히 마교가 이 업계(業界) 최고지. 종교도 잘 나가 싸움도 잘해, 난 솔직히 요즘 우리 사문이 도를 설파하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그냥 뭐, 객잔 보험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게 목적인지 그걸 모르겠어.’
객잔 위주의 보험 사업은 지난 생애에는 없었던 사업 방식이기에 더욱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제갈 사혁이었다.
“여러분 여길 봐주십시오. 화산파에서 오신 무진 소협과 사촌이신 제갈 도진 소협이십니다.”
“어머!”
“...........”
여인들로만 이뤄진 조사단에 남자가 들어오자 기분이 들뜬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거리감을 두려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간단한 소개를 끝내고 그들은 바로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실종자들이 실종된 장소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아미파는 조사 자료를 내보이며 신속한 협조를 보였다. 실종 장소의 공통점이라고는 사천이라는 것뿐이었다. 그야말로 사천 전역을 무대로 벌어진 실종 사건.
“그냥 젊은 여자만 납치하는 것 같습니다만?”
“나 역시 그렇게 보이오.”
사혁과 봉명공에게서 자신들과 같은 해답이 나오자 아미파 제자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미파는 무림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을 위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을 상대로 하는 강력 범죄에 특히 민감했다.
사혁은 실종자들의 공통점보다 범행 목적에 초점을 두었다.
“범인의 목적을 알아야지요. 강간이냐, 인신매매냐, 그도 아니면…….”
별 해괴하고 괴상망측한 일이 벌어지는 무림이다 보니 그도 아니면 이라는 대목에서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사건이 일어나면 범인의 목적이 무엇인가 파악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했다. 최근에 화운 룡 사건만 해도 그랬다.
“실종자들 중 무림인이 있습니까?”
여성 무림인의 경우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무공 실력이 높은 여자와 낮은 여자이다.
뭐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지만 여성 일단 자신의 무공수위가 낮으면 호위를 데리고 다니거나 친구 등과 몰려다닌다. 때문에 무공 수위가 높은 여자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해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조사한 바로 무림인은 없습니다.”
‘피해자 중에는 무림인이 없다?’
범행 시간도 제각각이었다. 새벽은 물론 대낮도 말할 것 없었다. 결국 아미파에서는 무언가를 알아낼 건더기가 없었다. 그냥 아미파의 온 수확이라고는 사건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가 전부였다.
자료를 천천히 읽어보던 사혁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공통점을 하나 찾았습니다. 방년이 넘지 않았음.”
“가장 어린 낭자가 15세이오.”
범인은 피해자의 나이를 알고 범행을 저지른 것인가? 나이를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면 그것도 나름 웃겼다. 실종자는 열 명이 넘는데 그중에 한 명도 스무 살을 넘긴 사람이 없다니 지극히 확률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능할 리 없었다.
수 시간째 조사를 한 결과 얻은 것은 세 가지였다. 피해자들은 방년을 넘기지 않았으며 범인은 피해자들의 하루 일과에 맞춰 계획된 시간에 범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모두 무림인이 아니다.
어린아이도 추리할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정론이지만 이번 일은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 봐선 범인은 여러 명이겠죠?”
뒤처리가 이렇게까지 깔끔한 걸 보면 개인이 아닌 조직적인 인신매매일 가능성이 높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