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더 앉아있어 봤자 알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으니 저희는 일단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제갈 사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하우는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안내에 따라 아미파의 손님방에 도착하고 나서 조금 쉬려는 그 때 아미파의 속가 제자들이 사혁과 봉명공이 묵게 된 손님방을 찾아왔다.
처음엔 사건에 대해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도진 소협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넷?”
제갈 도진이라 이름을 속인 봉명공이 동안에 매우 잘생겼다지만 봉명공은 올해로,
“이립이오.”
서른이다.
“어머, 딱 좋아라. 저는 올해 열여덟이 되었답니다, 소협.”
언제부터 띠동갑이 딱 좋은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 밑도 끝도 없었다.
“뭐하는 거예요, 도진 소협과 딱 달라붙어서는 암여우처럼!”
“뭐예요!”
속가 제자들은 모두 제갈 도진, 즉 봉명공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외모에 반했다고 하기엔 제갈 사혁도 만만치 않음은 분명하나…….
“아깝네요. 무진 소협은 같은 사촌인데 도사라니.”
“도사는 조금 그렇죠?”
속닥거리지만 들릴 건 다 들리는 사혁이었다.
‘이게 다 도사복 때문이다!’
계속 이 모습을 지켜보려니 사혁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했기에 얼굴을 대면한 지 만 하루도 안 된 사람에게 한눈에 반할 수 있단 말인가? 한눈에 반하는 건 보통 발정 난 남정네들이나 가능한 일 아닌가? 어떻게 능력, 집안, 성격 등 다양한 특징을 싹 무시하고 눈만 마주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 일어난 여인 실종 사건보다 봉명공이 더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제 것도요.”
“낭자들, 저는 소식을 즐기오.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소.”
“어머, 남자가 소식을 하면 정작 필요할 때 힘을 못 쓰는 법이랍니다.”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지 저녁 식사 시간에는 신체 접촉보다는 자신들의 반찬을 나누어 주며 호감을 표현했다.
옆에서 마른 더덕 쪼가리나 씹고 있던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이곳은 정말 누굴 위한 천국인가?
* * *
쥐새끼가 득실거릴 것만 같은 석실은 여인들의 비명과 애원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만! 그만!!”
“아파요, 제발…….”
여인들은 하나같이 손과 발이 묶인 채 배를 드러내고 있었다.
“흐윽…….”
중년인의 손이 한 여인의 드러난 배에 닿자 여인은 밀려오는 수치심과 분한 마음에 신음을 내뱉었다.
옷을 다 벗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인이 아닌 이에게 배를 드러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젊은 여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크크크…….”
중년의 남성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자 여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면 늘 그것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의 손이 붉게 변하자 여인의 온몸에 핏줄이 터질 듯이 부풀러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인들은 이를 악물며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곧 저런 일을 당하기 때문에 그게 두려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저 짐승 같은 놈에게 당하고 있는 여인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것은 여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이었다.
“이거 굉장하네요.”
“목련 소교(木蓮 小嬌)인가?”
석실 안으로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여인이었다. 머리를 정갈하게 땋아 귀여워 보이는 인상에 나이도 이제 막 스물둘이나 다섯 정도 되었을 법했다. 그리고 온몸을 장신구로 도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부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머, 울고 있네.”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자 울고 있던 여인의 눈동자는 어느새 분노로 가득 찼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을 이 지옥으로 끌고 온 여인의 얼굴을!
“목련 소교, 남의 먹이에 손대지 마라.”
“어머, 먹이라니 설마 진짜로 먹는 건 아니죠? 그쪽, 사내구실 못하잖아요.”
“닥쳐라, 죽여 버리기 전에!”
실로 엄청난 살기였지만 목련 소교는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내가 제공해 주는 건 알고 있죠? 날 죽이면 곤란할 텐데요.”
“썩어빠진 하오문에 너 같은 년 하나 더 없겠느냐? 널 죽이고 다른 놈이나 다른 년과 계약하면 그만이다.”
“에이, 너무하시네요. 그래도 이쪽은 그쪽을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움직이고 있는데.”
토라진 듯 말하고 있지만 가증스러운 연기일 뿐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아미파에서 끈질기게 조사를 하고 있어요. 곧 공동파는 물론이고 사천당가까지 움직일걸요. 나아가서는 무림맹 전체가.”
“흥!”
중년의 남자가 콧방귀를 뀌자 목련 소교는 들고 있는 부채를 접어 자책하듯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에요.”
“꼬리가 밟힐 때쯤에는 완성이 된다. 바로 이 흡정마공(吸精魔功)이!”
흡정마공, 그것은 실로 놀라운 발언이었다.
“위대극이 실종된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흡정마제(吸精魔帝)이다!”
그 말과 동시에 다른 여인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댄 중년 남성의 눈동자 속에는 일그러진 자부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련 소교는 남자가 보지 못하도록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며 남자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뭐, 좋아. 나야 장사만 하면 그만이니까. 저 남자가 무엇을 하든 돈만 벌면 그만이야.’
“이 쪽은 당소진(唐昭陳) 소저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주작인(周作人) 소저입니다.”
다음 날 사혁과 봉명공은 하우에게서 사천당가의 당소진과 아미파 속가 제자인 주작인을 소개받았다.
“반갑습니다, 소협들.”
“주작인이라고해요.”
자신 있게 인사를 건넨 당소진과 달리 주작인은 다소 빠르게 말하며 약간 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루 동안 보았던 다른 아미파의 속가 제자들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혁은 요란한 성격의 다른 사람들보다 그녀들에게 믿음이 갔다.
“화산파의 무진입니다. 제갈 사혁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이쪽은 사촌인 제갈 도진입니다.”
“반가워요.”
특히 허물없이 악수까지 건네는 당소진은 사교성이 매우 뛰어났다. 거기에 얼굴까지 예쁘니 호감이 안 생길 수 없었다.
당소진과 주작인을 아미파에서 소개시켜 준 이유는 간단했다. 당소진과 주작인을 이용한 함정 수사를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혁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사 자료에 실종자 중 무림인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를 함정 수사에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계획은 공동파 쪽에서 건의했기 때문에 일단 공동파에 의견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당소진의 말은 백번 옳았다. 수사에 자기 한 몸 지키지 못하는 평범한 여인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주작인이 말했다.
“무림인이납치되지않았다하지만일반인과무림인을구별하기란힘든법이에요.굳이구별한다면무기를소지하고있는가,가지고있지않는가,정도겠지요.”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전혀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미끼를 던지고 미끼를 물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첫날은 당소진을 미끼로 삼아 일이 진행됐다. 피해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이 혼자 다니는 여인이라는 점을 염두해 두고 당소진은 항상 혼자 다녔다. 그리고 그 뒤를 제갈 사혁, 봉명공, 주작인이 은밀하게 뒤따랐다.
주로 사람 없는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일부러 범죄의 표적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지금 도대체 몇 시진째야? 이거 어렵겠는데.”
제갈 사혁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건 퍽퍽한 옥수수떡이지만 허기가 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옥수수떡을 철근같이 씹어 먹으며 눈에 불을 켜고 당소진을 노려봤다.
처음 사혁이 당소진을 보는 눈빛은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사내의 바로 ‘그것’이었는데 지금은 30년 이상 산 마누라를 보는 권태기 중년 남편마냥 호감이라고는 개뿔도 없었다.
“아으래더 무리인이라서가?”
“떡이나 다 먹고 이야기해라.”
“도진소협은아무래도무림인이라서인가,라고말하고계십니다.”
슬슬 귀찮은 기색을 보이는 사혁과 이제 곧 귀찮아지려는 봉명공, 이 두 사람과 달리 주작인은 전혀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그녀가 이 한심한 남자들보다는 백배 믿을 만했다.
“이동하지요.당소저께서는오늘점심도거르셨습니다.”
“옥수수떡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는데 있는데 이제서 밥을 먹자니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음식에 민감한 사혁의 원망 섞인 말투에도 주작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우리는당소저와함께먹지않습니다.식당에들어가는것을지켜만볼뿐이지요.”
처음엔 다른 아미파의 제자들과 달라서 믿음이 간다 생각했지만 사람을 잘못 본 것이었다.
주작인은 너무 깐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작인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제갈 사혁과 봉명공을 휘어잡는 그녀의 위엄은 이번 수사에 가장 필요한 점이기 때문이다. 자기주장이 강한 제갈 사혁도 주작인 앞에서는 겉으로 성질만 낼 뿐이지 비교적 협동적이었다. 현재로선 오직 그녀만이 제멋대로인 두 남자를 제어할 수 있었다.
객잔으로 들어간 당소진은 고작 옥수수떡으로 끼니를 때운 사혁 일행과 달리 사천의 얼큰한 탕 요리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애초에 이런 일은 그냥 하오문을 이용하면 쉽지 않나?”
사혁이 투덜거리며 말하자 주작인이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구겼다.
“하오문과사건에대해공조를이루고있지만별다른진전이없습니다.하지만이지역분타주는여인이기때문에이번사건에매우협조적이죠.”
“아? 분타주가 여자였습니까?”
첫날 수사는 완전 허탕이었다. 수상한 자도 없었고 하다못해 혼자 다니는 당소진에게 말을 거는 남자도 없었다. 하지만 사혁 일행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날 사천에서 또 다시 여성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전 무림이 다시 한 번 떠들썩하게 되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신출귀몰(神出鬼沒)! 그야말로 전 무림이 농락당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수사 3일째 되는 날.
못 잡으면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버리겠다. 도산.
무진아.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구나. 지난번에 화운 룡도 제대로 못 잡았다지? 도상.
우리가 잡아한다. 도경.
믿는다. 도청.
‘뭐예요, 도청 사숙. 믿는다니요? 과거 시험 준비하는 아들 둔 엄마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그런 말이 오히려 더 부담된다고요. 차라리 도상 사숙처럼 비난을 하시던가, 도산 사숙처럼 욕을 하세요!’
이 수많은 전서 때문에 오죽했으면 닭둘기라는 별명을 가진 통통한 녀석이 지금은 참새마냥 앙상해졌을까?
그 다음 날에도 전서구 다리에는 쪽지가 한 가득이었다. 이번에는 대사형과 스승님의 쪽지도 함께 달려 있었다.
사제, 정말 힘들어 보이는군. 난 이번에 현무신검(玄武神劍) 연작 15번을 구입했다네. 아주 날이 잘 들더군. 무원.
“현무신검 연작 15번이라니! 나도 이거 갖고 싶었는데… 가 아니라! 아니, 이 사람은 뭐하려고 쪽지 보냈데!”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스승.
역시 도움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스승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사혁이었다.
“급할수록이라?”
스승님의 말은 잘 이해가 됐지만 문젠 그게 아니었다. 뭐가 있어야 시작점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번 사건은 미해결 사건이 절대 아니었다.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다름 아닌 흡정마공의 진정한 후인이었던 흑요칠마의 삼마인 흡정마 종방영이기 때문이다.
이 일로 종방영은 전 무림에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흑사련에서 사건을 처리를 했기 때문에 범인에 대해서도 그 목적에 대해서도 무림맹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 생애에서 종방영의 존재를 없애버린 사혁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오늘도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며 의처증 걸린 중년 남편처럼 당소진을 감시하는 수밖에…….
“일주일째 옥수수떡으로 배를 채우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흉폭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거라면 훌륭해, 실험은 성공했어. 그러니까 밥 내놔!”
“우리는식당이나번화가를돌아다니며팔자좋게당소저를감시할수없습니다.우리는어디까지나멀리서지켜만볼뿐이죠.”
이쯤 되니 의문이 생겼다. 사천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사가 모두 이런 식인가? 하는 의문이 말이다.
“다들 이런 식이야?”
“대충은다이렇습니다.아미파가하오문을통해조사한것이기때문에자료의신빙성은보장합니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