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회: 이래서 사천은 오기 싫었다. -->
“여인의?”
“괜찮은 곳이야. 직접 옷을 한번 입어볼 수 있으니까. 이런 곳은 중원 어디에도 없을 거야.”
당소진은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사실 옷이란 게 집에 와서 입어보는 것 말고는 그 전에 달리 몸과 옷의 치수를 맞춰볼 수 없어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곳은 옷을 얼마든지 입고 벗을 수 있는 탈의실에 전신 거울까지 갖추고 있어서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옷을 입어보고 구입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혁신적인 발상이란 말인가?
“소진도 저기를 이용하나 봐?”
“아니,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맞춤옷을 입는데 저런 수고가 왜 필요해.”
넉넉한 집안은 대부분 재단사를 불러 맞춤옷을 입기 때문에 저런 가게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집 시녀들이 많이 이용해서 어깨 너머로 이야기정도는 들었어. 들어보니까 하오문에서 운영하는 옷 가게래.”
“주루나 도박장, 뭐 그런 곳 말고 저런 사업을 하다니 제법이네.”
아이들은 놀이가 끝나자 각자 집으로 향했다.
“형, 다음에 또 봐요!”
아이가 손을 흔들자 사혁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도 이렇게 얻은 것 없이 하루가 끝나자, 정말이지 이제는 그냥 만사가 귀찮고 모든 걸 버리고 사천을 떠나버리고 싶은 사혁이었다.
“아이고,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는 집을 나가서 이렇게 말없이 돌아오지 않을 아이가 아닙니다.”
“아미타불.”
다음 날 아홉 번째 실종자의 부모가 아미파로 찾아와 떡을 돌리며 애타는 마음으로 딸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이미 청성파와 사천당가까지 다녀왔다니 자식을 보고 싶은 부모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 수 있었다.
“누구야? 저 사람들은.”
저들이 누군지 모르는 사혁은 당소진에게 저들에 대해 물었고 그들이 아홉 번째 실종자의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우는 그들 부모가 안심할 수 있도록 사혁 일행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분은 화산파에서 오신 무진 도사님이시고 이쪽은 사촌이신 제갈세가의 제갈 도진 소협, 그리고 이쪽은 저희 아미파의 제자인 주작인, 사천당가의 당소진 소저이십니다. 성도는 이분들이 조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모는 사혁의 두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도사님, 제발 저희 딸 좀 찾아 주십시오. 딸만 찾을 수 있다면 불교를 버리고 도교를 믿겠습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따님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부모는 봉명공의 손을 잡으며 그에게도 부탁을 했다.
“공자님, 제발…….”
“하하하, 부처님을 믿으며 기다리시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가 따님에게 닿을 것입니다.”
개종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기 때문인지 봉명공은 노골적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이야기하며 은근히 불교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사혁이 도교 설파에 관심이 없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종교 전쟁이라도 일어날 판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따님의 초상화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부모는, 특히 아비 되는 자는 딸의 초상화를 처음 본 듯한 반응을 보였다.
“저희는 딸의 초상화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은 저희 딸이 맞기는 하지만 어디서 이런 걸…….”
이건 또 무슨 소리란 개소리인가? 딸은 맞지만 초상화는 아니다?
“그럼 집에 초상화도 없고 하오문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온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부모가 모르는 초상화라니 아무리 이 세상 모든 정보를 취급한다는 하오문이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했다.
‘뭐야, 이거 무슨 장난이야?’
“어찌 되었든 그 초상화는 저희 딸이 맞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실종자의 부모를 떠나보내고 사혁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이것은 깨달음을 얻을 듯 말 듯한 그런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제갈 사혁은 그 후로도 계속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도 되도 않는 함정 수사를 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에 잡은 실마리는 확실했다.
이번 사건에 협력해 주고 있는 단체는 하오문이기에 정파는 아무 의심 없이 하오문이 제시한 지침서에 따라 움직였지만 그럼에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왜 잡지 못했을까? 물론 우리가 무능해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할 게 있다.
바로 이 초상화. 가족이 모르는 초상화란 있을 수 없었다. 하오문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이 초상화를 구한 것일까?
사혁은 고민하던 중 문뜩 최근 일을 떠올렸다. 그것도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되도 않는 추리는 집어치우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야.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정말 우습게 됐네. 하오문, 이 망할 자식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사천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한 명의 사람에서 하나의 단체로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지만 패배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물증도 없이 이런 일을 힘만으로 해결하는 건 우스웠다. 힘을 사용할 때는 따로 있는 법.
제갈세가에서 태어나 약속된 힘과 권력을 승계 받을 운명을 지녔지만 자라서는 화산파의 후계자로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뤄야 했다.
사혁은 하오문이 아닌 아미파를 통해 제갈세가에 전서를 띄웠다. 백부가 막지 않는 한 소가주로서의 권력은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소가주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제갈 사혁이었다. 충분히 그럴 권리가 있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약속된 힘과 권력이다.
우 총관은 들어라. 무풍대(霧風隊) 전원. 사천 성도로 내일까지 내가 지정하는 옷차림으로 …중략… 은밀하게.
그리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비둘기로는 화산파에 전서구를 띄웠다.
화산파에 있으면서 사혁은 사제들을 끌어주며 재능 있는 사제들을 매화검수로 만들었다. 화산파를 더욱 단단하고 끈끈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들은 사혁이 그들을 믿어준 것처럼 그를 믿고 잘 따라와 주었다.
망화각은 들어라. 3일 주겠다. 사천과 호남의 하오 분타주에 대해 조사하고 조사 시에는 되도록 직접 움직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미파를 통해 무당파로 전서를 보냈다.
청하 소저, 오랜만입니다. 혹여 그때 하오문을 통한 보고를 올리셨습니까?
받는 이는 청하였다. 마교와 관련된 용화장 사건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이는 필시 하오문의 짓이 틀림없었다.
무당파는 화산파와 달리 전서구와 같은 정보 전달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오문을 이용하지 않는 이상 호남에서 호북까지 정보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하오문은 점조직이다. 호남이 다르고 사천이 다르다. 하지만 청하의 답장이 필요한 이유는 하오문이 신뢰할 수 있는 문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난 멍청했어. 제갈 공자는 뭔 놈의 제갈 공자!”
제갈세가니 뭐니, 항상 가문의 이름을 듣고 주위로부터 머리가 좋을 것이라는 소리만 듣다 보니 머리가 굳은 게 분명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내가 아닌 너를 믿다니. 처음부터 왜 하오문을 그렇게 믿었을까?
“헛똑똑이 짝이 딱 내 꼴이군.”
그 날 사혁은 일행들과 형식적인 함정 수사를 끝내고 아미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새벽 차가운 아침이슬을 맞으며 아미파의 대문을 열던 여승은 깜짝 놀랐다.
“누… 누구시오?”
행색이 제각각인 약 50여 명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미파의 대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아미파가 발칵 뒤집어졌지만 곧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고 무풍대는 아미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풍대(霧風隊) 제3번대 대장 료장(寮帳), 소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무풍대 열다섯 부대 중 3번대가 왔다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제갈세가와 같은 곳은 수비 목적 이외에도 각 방계에 해당하는 집안의 핏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열다섯의 부대 중 1번 대부터 5번대까지만 본가를 위해 활동했다. 1번부터 5번까지 오로지 가주를 지키기 위한 부대. 이런 소사한 일에 3번대를 보낸 백부의 마음에 사혁은 깊은 정을 느꼈다.
“의문과 항명은 받지 않는다. 하지만 군(君)으로서 부당한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따라라. 이것이 유일한 명령이다.”
순간 무풍대 전원은 피부를 찔러오는 커다란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소가주라지만 20대에 불과한 젊은 사내에게서 40대의 절대적인 여유와 굳건한 기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화산파를 택하고 그로 인해 언젠가 소가주가 아니게 된다 하여도 지금의 그를 본 무풍대는 그가 소가주가 아니라 해도 언제고 따를 수 있었다.
명령을 하달 받은 무풍대는 그 이름 그대로 짙은 안개가 바람에 실려 사라지듯 사라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감히 아미의 성역에 허락 없이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혁은 현재 수뇌부가 자리를 비운 아미파에서 가장 어른인 하우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하우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이슬을 맞지 않도록 미리 이야기해 주십시오.”
사혁은 제멋대로이나 언제나 지켜야 할 도리를 알고 있었다.
사천은 평소와 같이 조용했다. 다만 외지에서 온 상인들이 아주 조금 많아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천은 원래 음식점을 중심으로 거대한 상권이 자리 잡은 곳이어서 상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렇게놀고만있어도되는거야?”
주작인은 수사는 하지 않고 오늘 하루 놀고만 있는 사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이야, 무진?”
당소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계속 그에게 묻고 또 물었다.
“이 세상에 모든 걸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혼자 할 수 없으니 사람은 내가 아닌 모두가 되어야 하는 거야.”
얼핏 들어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냥 아랫사람에게 일시키고 노는 거잖소.”
현실은 그런 것이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사혁은 갑자기 소금 장수 앞으로 다가갔다.
“점포는 몇 개야?”
소금 장수 앞에서 이상한 말을 하자 봉명공과 당소진, 그리고 주작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확인 결과 총 다섯 개의 점포가 있었는데 사건이 일어난 지역에 각각 하나씩 있었습니다.”
“봐, 내가 아닌 모두가 함께하니까 이런 것도 금방 알잖아.”
“이게무슨…….”
“사람 잘 다루네.”
주작인과 달리 거대한 장원을 가지고 있는 당가의 당소진만이 지금 굴러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혁에게 정확한 사실을 듣기 위해 일행은 낡은 서점으로 향했다. 일행이 서점에 들어오자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 일행이 앉은 의자 양옆으로 각각 한 명씩 젊은 남자들이 자리에 앉았다.
“확인 결과 소가주님께서 이야기하신 대로입니다.”
서점까지 제갈세가의 사병이 따라 들어오자 다른 일행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런 그들을 본 사혁은 책 한 권을 꺼내 읽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의심하고 있는 건 꽤 많아.”
첫째는 하오문의 정보력이었다.
“사실 초상화라는 게 그렇게 흔한 물건은 아니야. 일반 사람들은 초상화 같은 건 사치로 여기니까 없는 게 당연해.”
“당연하다니무슨?”
“확인해 보니까 피해자들 부모 중 그 누구도 하오문에서 화공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어.”
“하지만우리에게는.”
“우리에게는 초상화가 있다? 그럼 부모도 모르는 이 초상화는 도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걸까? 천하제일의 정보력을 가진 하오문이라지만 이건 뭐, 사기잖아.”
주작인이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다. 사혁은 품에서 잔뜩 구겨진 초상화를 꺼냈다.
“여기 표정을 봐봐. 직접 보고 그린 것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표정 하나까지 생생하잖아. 화공이 너무 잘 그렸어. 화가 난 표정까지 제대로 그렸으니까 말이야.”
“그 말은… 그러면?”
“화공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종이에 옮길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납치된 장소에서 화공들이 피해자들의 얼굴을 그렸다 이거지.”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