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회: 흡정마공 -->
알고 싶은 것을 안 사혁은 필사본이며 정리 요약본이며 잡서며 할 것 없이 서재에 있는 모든 종이를 흡기를 이용해 수분을 빼앗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안 이상 다른 이가 볼 단 1할의 확률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무림인의 지독한 독점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편 동굴을 돌아다니며 실종자들을 찾는 봉명공과 당소진, 그리고 주작인은 거대한 석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비키시오.”
봉명공은 여태까지 허리에 매고 있던 천을 풀었다. 그러자 옥처럼 녹색을 띠는 봉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소림의 보물인 비룡승천봉(飛龍昇天棒)이었다.
항마 타청봉(降魔 打靑峯).
가벼운 타격음과 달리 항마 타청봉의 일격에 거대한 석문이 박살 나버렸다.
그 때 사혁이 어디선가 나타나 봉명공을 비웃었다.
“돌로 만든 문이 뭐 대단하다고 항마 타청봉씩이나 쓰고 자빠졌냐?”
“제갈 무진.”
모두 귀신처럼 나타난 사혁에게 이목이 쏠린 순간 부서진 석문에서 범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음산하고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당소진과 주작인은 긴장했다. 드디어 범인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사혁이 보기에 흡정마 위대극의 사제라기에는 상당히 젊어 보였다. 그가 아는 한 위대극은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음… 그러고 보니 내시들은 잘 안 늙는다 했던가?’
내시 이야기는 농담이고 아마도 여인들에게서 흡수한 생명 탄생의 기운을 빨아먹어 젊은 나이를 유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상에…….”
석문 너머의 광경은 실로 해괴망측했다. 거의 다 벗은 거나 다름없는 옷차림의 여인들이 쇠고랑에 매달려있는 모습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뭐하는 놈들이냐?”
“이잔학무도한놈!”
주작인이 화를 내며 뛰어나가려 하자 그런 그녀를 사혁이 말렸다. 상대는 흡정마공의 소유자. 주작인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침착해, 놈은 고수다.”
“오호, 그렇지 않아도 슬슬 무림인의 생기가 필요했던 차였는데 잘됐군.”
주작인을 노리고 다가오는 흡정마공인을 향해 봉명공이 비룡승천봉을 휘둘렀다.
가벼운 봉을 휘두를 때마다 마치 육중한 곤을 휘두르는 듯 엄청난 파공음이 울렸고 봉이 내리찍는 족족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구나!”
흡정마공인의 장타가 봉명공을 노렸지만 모조리 비룡승천봉에 막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막을 테니 두 사람은 인질을 구해!”
그 말과 함께 비류보를 펼쳐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보인 사혁은 그대로 흡정마공인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흡정마공인이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박히자 사혁은 주먹을 불끈 쥐며 몸에서 기를 미세하게 흘려보냈다.
“일어나, 이 새끼야!”
“크크크……. 아주 팔팔한 놈들이 왔군. 오늘로서 흡…….”
사혁은 흡정마공인의 면상을 발로 차 얼굴을 석벽을 이루는 바위 속에 완전히 묻어버렸다.
‘눈치 없는 새끼! 흡정이니 마공이니 뭐니 지껄이지 마라. 다른 사람이 들으면 피곤해지니까!’
흡정마공은 위대극이 사용하다 사라진 무공이다. 쓸데없이 수면 위로 오르면 귀찮아지는 건 흡정마공의 계승자인 사혁이었다.
“좀 도와줘요!”
주작인과 함께 실종자들의 손발을 묶은 쇠고랑을 풀기 힘들었는지 당소진은 도움을 청했고 사혁은 이때다 싶어 봉명공에게 외쳤다.
“어서 데리고 나가!”
“하지만… 제갈 무진.”
“별거 아니야. 나 혼자로도 충분해. 기억해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봉명공이 머뭇거리자 사혁은 실종자 구출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의 장법을 조심하시오. 무언가 이상하오.”
장법? 이건 그냥 타인의 노력을 빨아먹는 지저분한 무공일 뿐이다.
“내 금방 오리다. 기다리시오!”
봉명공이 저 멀리 사라지자 사혁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뭐해, 안 덤벼?”
“크크크… 여유 부리는 것도 여기까지다.”
순식간에 사혁의 복부를 걷어 찬 흡정마공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싸워보는 것도!”
“컥!”
반면 복부를 얻어맞은 사혁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태을신단의 효력으로 엄청난 외공의 고수가 되었는데 내장을 휘젓는 통증이라니, 정말 환장할 정도로 아팠다. 역시 흡정마공으로 흡기를 해 힘을 키워온 놈답게 만만치 않았다.
“이래야 재미있지!”
빠르건 늦건 제갈 사혁의 나이대에 누구는 하수가 되고 누구는 고수가 된다. 배우고 있는 무공의 위력, 환경, 신체, 재능 등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말 심하게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재미이다. 싸우는 게 재미있지 않으면 그 때부터 무림인은 하수가 되고 나아가 겁쟁이가 되는 거다.
사혁은 흡정마공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뛰어올라 무릎으로 얼굴을 찍어버렸다. 그러자 흡정마공인은 휘청거렸고 사혁은 이때를 노려 복부에 왼손 장타를 때려 넣었다.
“푸악!”
흡정마공인이 검은 피를 뱉어내자 사혁은 얄미울 정도로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이다. 어때 환장할 정도로 아파서 고환이 다 쪼그라들걸!”
그는 흡정마공인이 고자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고환을 언급했다.
“크아!”
흡정마공인은 피를 내뱉으며 이마로 사혁을 들이받았다. 하지만 두 발로 강건하게 선 그는 쓰러지지 않고 발목의 힘으로 박치기를 버텨냈다. 그리고 팔꿈치로 눈을 압박해 흡정마공인의 왼쪽 눈의 실핏줄을 터트려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흡정마공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사혁의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후려치더니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갈빗대를 보릿자루마냥 때리고 또 때렸다.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집념은 사혁 못지않았다.
“아프잖아, 새꺄!”
처맞기만 하던 사혁은 주먹으로 목을 쳐서 흡정마공인을 쓰러트렸다.
“하아… 하아…….”
그렇게 엉망이 되도록 얻어맞았지만 오히려 사혁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
옛날에는 권법사로서 공격을 피하는 것에 최선을 했다. 맞으면 아프니까.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그때의 나약한 화산파 후기지수가 아니다. 지금은 오히려 상대에게 맞으면 아프기보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맞은 걸 되돌려 주지 않으면 미칠 지경이었다.
사혁은 자신도 모르게 자하신공을 발휘했다. 자하신공이 발현되자 온몸에 내공이 끌어오를 듯 날뛰기 시작했고 전신은 자색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의 엄청난 내력에 의해 흡정마공인은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전신을 압박하는 기의 파동은 온몸을 짓눌러 마치 몸이 무거워진 듯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거 놀랍군, 정말 대단해! 흐하하하하하~”
자하신공의 파동에 눌려 힘겹게 서있던 흡정마공인은 사혁의 기세에 광소를 터트리며 기뻐했다. 그런 그를 향해 사혁은 미소를 지으며 발을 들어올렸다.
“어디 끝까지 웃어봐라.”
패성각(覇成脚).
지금의 패성각은 봉명공을 위협할 때 썼던 패성각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동굴 내부를 완전히 주저앉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끄악!”
흡정마공인의 오른발을 이루는 뼈가 모조리 부러졌지만 그의 눈에서는 예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 번 물면 놓치지 않는다는 광견처럼 왼손으로 사혁의 목을 붙잡은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사혁을 향해 외쳤다.
“어떠냐! 기분이?”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크하하하! 이 몸은 흡정마공의 정통 후계자다! 이제 곧 너의 내공은 모두 내 것이 된다.”
“뭐? 흡정마공? 젠장… 여태까지 날 가지고 논 거냐?”
“당연하지 않느냐. 흡정마공으로 너무 쉽게 죽여 버리면 재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의 말에 사혁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네까짓 게 나를 가지고 놀아?”
그 말과 동시에 사혁의 모든 내공이 흡정마공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사혁의 내공을 손에 넣은 흡정마공인은 희열에 찬 광소를 터트렸다.
“흐하하하하하! 네놈의 내공이란 내공은 전부 흡수해 골수까지 빨아먹어 주마.”
그런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흡정마공의 흡기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미 열두 명이나 되는 여인들의 순수한 생명 잉태의 기운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기를 전부 빨아드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흡기는 점점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흡정마공인의 몸은 고도 비만에 걸린 사람처럼 뚱뚱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기가 폭발하며 동굴이 무너졌다.
“흐하하하!”
사람의 몸통만 한 바위덩어리를 터트리며 대지에 서서 웃음을 터트리는 이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고 그의 핏줄은 곧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세 시진 후 새벽 서리가 나뭇잎에 앉을 때쯤 뼈만 남은 사람처럼 삐쩍 말라버린 흡정마공인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된 일인지 제갈 사혁에게 내공을 모조리 빼앗기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아직 안 끝났어! 멍청한 놈, 내가 죽은 줄 알고 돌아갔군. 설마 내가 세운 가설이 실패할 줄이야. 그게 아니면 생명을 잉태시키는 기운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건가?”
무너진 곳은 실험실에 불과했고 또 동굴이 워낙 넓기 때문에 아직 은신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굴 구석까지 간 그는 장판 밑에 있는 작은 비밀 문을 열었다.
“흐흐흐흐…….”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영약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것은 모두 오랫동안 흡정마공을 사용해 중소 문파와 상단을 털어서 훔친 영약들이었다.
혹시라도 위대극이 자신을 먼저 흡기하지 않아 일이 틀어질 경우, 혹은 지금처럼 알 수 없는 변수로 인해 실패했을 때 살아남으려고 남겨둔 비장의 수였다.
“일단 잃어버린 기를 회복하자.”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흡정마공인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어떻게?”
“네놈이 안 죽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일부러 내가 다 죽어가는 네게 내공을 주입해서 살려뒀거든.”
“너… 넌 도대체 누구냐?”
“흡정마공을 익힌 사람.”
“뭐라고?!”
사혁이 흡정마공을 익혔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나도 우연히 발견했어. 그냥 우연히 흡정마공을 익히고 우연히 너 같은 놈을 만나게 됐고 우연히 일이 이렇게 됐어. 우연이라는 게 참 밑도 끝도 없이 거지같지?”
사혁은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너도 흡정마공을 익힌 거냐? 그럼 너는 위대극의 제자이냐?”
위대극에 대해서는 제갈 사혁도 할 말이 없었다.
모용세가에서 태을신단을 훔치고 부상을 입어 사망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
“내가 죽였다.”
“이 개자식, 네놈이 감히 사형을!”
사혁의 거짓말에 흡정마공인은 얼굴이 불게 물들었다. 여차하면 자신의 사형을 흡수하려 한 주제에 사혁 자신이 위대극을 죽였다고 하자 개자식이라며 욕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젠장!”
흡정마공인은 눈물을 흘렸다.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원래대로 흡정마공을 사용해 맹위를 떨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자가 그 희망을 꺾어버렸다. 분했다.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으아아!”
어째서 하필이면 이자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눈앞에 보이는 바로 이자가 흡정마공을 익히고 있던 것인가!
흡정마공을 완성시키는 방법은 같은 흡정마공인의 내공을 흡수하는 게 아닌 같은 흡정마공인에게 흡기를 당하는 것이다.
“그럼 너는 지금!”
“그래, 덕분에 흡정마공을 완벽하게 터득했지.”
같은 흡정마공인의 내공을 흡기할 경우 두 사람의 내공은 폭주하게 되고 그로 인해 흡기를 하는 이의 기가 모조리 역류해 흡기를 당하는 이에게 다시 넘어오는 역류 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흡기당하는 이의 육신에 엄청난 운동 효과가 발생하여 혈관의 크기가 확장되고 더 이상 흡정마공의 마성에 구애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네가… 네가 다 망쳐버렸어! 나의 것이었어! 너만 아니면 나의 것이었어!”
너는 무엇이기에 나의 노력을 앗아가는 것인가? 네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나의 모든 것을!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인을 발로 차버렸고 온몸에 힘이 없는 흡정마공인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날 위한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고!”
“널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오직 나를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닥쳐! 닥쳐!”
그는 입술이 터져가도록 열변을 토했지만 이미 그 눈동자에는 절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 이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 널 살려둔 거다!’
사혁은 흡정마공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얼마나 세게 붙잡았는지 그의 뼈가 부러지기에 이르렀다.
“날 봐, 나를 봐.”
사혁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닿자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흡정마공을 얻었을 때 세상을 다가진 것 같았지? 그렇지? 기연을 얻었잖아. 모든 이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무한한 내공을 말이야! 무림 고수가 되는 꿈을 꿨을 거야. 돈도, 여자도, 권력도, 모두 손에 넣는 그런 무림 고수 말이야. 그런데 지금 너를 봐.”
그 말과 동시에 사혁은 흡정마공인의 왼쪽 손목을 부러트렸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