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회: 흡정마공 -->
“끄아아아!”
“약하고.”
그리고 오른손 손가락을 꺾었다.
“비루하고.”
“그만!”
이 위기만 빠져나가면 되는데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볼품없어.”
사혁은 흡정마공인을 따듯하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나를 위해 흡정마공을 완성시켜 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숙’!”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사혁은 흡정마공인을 유린(蹂躪)하기 위해 그를 사숙이라 부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지 마!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그녀들도 사숙께 말했을 거야. 제발 이러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이에요.”
그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얄미운 표정으로 흡정마공인을 자극했다.
“힘없는 그녀들을 괴롭히면서 즐거웠나요? 쾌감을 느꼈나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어. 즐겁지 않았어!”
그 말과 동시에 사혁은 흡정마공인의 목을 움켜쥔 채 사정없이 주먹으로 때리고 동굴 벽에 패대기치며 그를 괴롭혔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이야. 너의 야망을 부수고 너의 희망을 짓밟는 일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들어.”
살가죽뿐인 흡정마공인의 목을 다시 한 번 움켜쥐며 사혁은 그의 인격을 계속해서 유린했다.
“나는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도 아니야. 하지만 네가 악당이기 때문에 천하의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런 너를 괴롭혀도, 너를 죽여도, 세상은 내게 돌을 던지지 않아. 나를 비난하지 않아.”
뼈마디가 만들어내는 기괴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이 아주 즐거워. 나의 폭력은 정당해.”
그 말을 끝으로 무너진 동굴의 입구를 다시 한 번 박살 내 그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 사혁은 바로 옆에서 삽이며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있는 무풍대와 눈을 마주쳤다.
“니들 뭐하냐?”
“…….”
그것이 그들의 소가주가 오른손에 시체를 인형마냥 들고 나타나 내뱉은 첫마디였다.
아미파로 돌아온 후 사혁은 따로 봉명공과 당소진, 그리고 주작인을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하오문 일은 함구해. 이것은 아주 사소한 엇나감일 뿐이야. 세상일은 때론 얼마든지 엇나갈 수 있어. 설사 이번 일을 뒤에서 조종한 곳이 하오문이라 해도 분타가 꾸민 일이지 결코 하오문 전체의 잘못이 아니야.”
“어쩐지 제갈 소협이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이네.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베풀다니. 꼭 우리보다 스무 살은 많은 사람 같아.”
“그런 게 아니야. 단지…….”
단지 하오문과 무림, 아니, 정파와의 거리가 멀어질 것을 걱정했을 뿐이다. 하오문과 정파가 서로 등을 돌릴까 두려웠을 뿐이다. 기득권 세력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이득을 잃어버릴까 그게 두려웠을 뿐이다.
하오문이 정파에 등을 돌리는 건 흑사련과 마교에 도움을 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오문이 정파를 이용해서 이득을 챙긴다 해도 흑사련이나 마교에 붙어 정파에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오문의 과오를 오늘 이 자리의 세 명만 입 다문다면 그걸로 됐다.
한편 아미파 법당은 실종자들과 재회한 가족들로 인해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사혁 일행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은혜가 대대손손 전해질 겁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놈이 성불구자라서 몸을 욕보이거나 하진 않았지만 납치된 실종자들은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무림인도 아니고 일반 백성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됐다는 것은 사회적 불이익이었다.
때마침 전서구가 도착하자 사혁은 비둘기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꺼내 읽었다. 망화각에 명령을 내린지 딱 3일 째 되는 날 새벽이었다.
호남 하오 분타주, 도박마 흉조(賭博魔 凶鳥). 나이 45세. 도박장을 운영해 그 돈을 바탕으로 하오 분타주가 되었으며 불법 도박장 운영 말고는 걸리는 게 없습니다.
사천 하오 분타주, 목련 소교. 나이 26세. 최연소 분타주며 상권을 활용한 사업 수완이 좋습니다. 건물을 짓고 상인들에게 임대해 일정량의 수익을 얻는 방식으로 돈을 벌며 밀거래를 통해 장물을 유통합니다.
망화각에서 조사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도박장, 그리고 장물 거래. 이 두 가지만 빼면 의외로 깨끗했다. 사실 도박장이나 장물 거래는 하오문의 생계 수단이라서 죄라고 하기 민망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사혁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오문도 중에 깨끗한 놈이 있는 것부터가 뒤가 구리다는 증거야. 흉조는 어차피 시간이 너무 지났으니 문제없지만 목련 소교는 다르지.”
내공을 일으켜 쪽지를 제거한 사혁은 뜬금없이 재회의 기쁨으로 눈물바다가 된 법당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아깝게 사건의 흉수는 놓쳤지만 안심하십시오. 사문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흉수를 반드시 잡겠습니다.”
제갈 사혁의 갑작스러운 말에 실종 피해자들은 몸을 덜덜덜 떨었다.
주작인은 사혁의 등을 세게 치며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내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다. 그러나 곧 실종자 가족들 중 한 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 그렇고말고. 딸자식도 구해주신 분들인데 그깟 놈이야 금방 잡아 주시겠지!”
“맞습니다. 나리, 저는 나리만 믿겠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은 그들의 딸, 그들의 동생, 그들의 누나를 구해준 사혁을 신뢰하고 있었다.
“정말 범인을 놓친 거야?”
당소진이 진위를 캐묻자 사혁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미파에서 배정해준 방에서 나와 할 일 없이 마루에 누워있던 사혁에게 아미파를 통해 한 장의 서신이 전해졌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꽤 시간이 지났네요. 궁금하신 점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당시 갈사 소협의 신분을 몰랐기 때문에 몰래 하오문을 통해서 보냈습니다. 궁금하신 점이 풀리셨는지요? 그런데 갈사 소협은 잘 지내십니까? 저는 스승님께서 장로직에 오르셔서 이번에 1대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젠 소협과 같은 위치가 되었네요. 그때는 소협의 신분을 몰라 소협을 무당파로 이끌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창피하기도 합니다. 갑자기 연통을 주셔서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저에게 연락해 주는 이가 있어서 조금은 기쁩니다. 그럼 다음에 뵐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청하 올림.
서신을 읽은 사혁은 덜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뭐… 뭐, 뭐지. 같은 위치라니 무슨 뜻이지? 호… 혹시 나랑 같은 마음!”
그리고 남자 특유의 아주 곤란한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기뻐? 나 때문에, 내가 연통을 보내서?”
착각은 자유라지만 너무 광분한 나머지 그는 서신을 찢어먹기에 이르렀다.
“사랑의 시작인가! 어떡하지, 어떡하지?!”
혼자 좋아 죽으면서 마루를 방방 구르는 몸뚱이는 아미파의 마루를 옷으로 전부 닦아내기 이르렀다.
“저기…….”
“!”
그 순간 사혁은 당소진의 기척을 뒤늦게 느끼고 재빨리 평소의 절도 있는 가부좌를 취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무슨 일이야.”
“방해했나 봐?”
“방해는 무슨, 이 아름다운 여름날에 방해되는 게 있다면 남자 특유의 암내와 여름의 불청객 모기뿐이야.”
청하의 서신 한 장으로 이미 정신 상태가 한껏 맛이 가버린 사혁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
당소진은 갑자기 마루 위로 올라오더니 사혁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평소와는 다른 그녀의 말투와 붉게 물든 양 볼은 바라보고 있는 사혁을 긴장시켰다.
‘이 행동은? 이 상황은? 혹시 이 녀석 나에게!’
“제갈 도진 소협에게 정인(情人)이 있나 해서.”
‘지엔장, 이 놈이나 저 놈이나 그 놈의 봉명공 타령은.’
“정인,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통하는 친한 친구. 그게 바로 나지, 그 녀석에게는 내가 정인이야.”
“아니, 알잖아. 사전적 의미의 두 번째인 남몰래 정을 통하는 남녀 사이에서 서로를 이르는 말.”
그러면서 당소진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본 사혁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도진한테 반한 거야?”
“그… 그렇지.”
“말이 되냐? 여태까지 아무런 낌새도 호감이 일어날만한 사건도 없었는데! 뭐? 반해? 왜! 그게 말이 돼?!”
“마음이 그렇게 말로 설명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몇 번 봤다고. 이거 뭐, 간이고 쓸개도 다 내어줄 판이네, 아주.’
“아무튼, 없는 거지? 제갈 도진 소협에게 그런 분은 없는 거지?”
제갈 도진이라는 건 사혁이 만들어낸 허상의 인물이었다. 결국 존재하는 건 소림의 승려였지만 파계승으로 사파에 몸을 둔 봉명공이다. 이 아이를 위해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사실은 말이야.”
“아니야, 그냥 마음속으로 혼자 연모하는 거니까 정인이 없다면 그것으로 만족할래.”
정인이 없다는 그 사실만으로 만족한 당소진을 보며 사혁은 곰방대를 꺼내 쑥을 피웠다.
“에효, 정인(淨人)이라면 있겠지. 사전적 의미는 속인(俗人)으로서 절에서 살며 승려의 시중을 드는 사람.”
파계승이니 뭐니 해도 결국 중은 중이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연모한다면 그것까지 무어라 할 수 없는 법.
“애들은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쪽은 슬슬 어른의 일을 해볼까.”
사혁은 그렇게 밤까지 곰방대를 물며 기다렸다.
초승달이 구름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 볼 때쯤 밤공기를 마시며 사혁은 아미파를 나섰다. 그런 사혁의 양옆으로 두 명의 무풍대원이 곰방대의 연기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명하신 대로 시신은 화장을 한 뒤 가루를 내어 산에 뿌렸습니다.”
흡정마공인의 시신을 처리했다는 말에 사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대편에 있는 무풍대원은 사혁에게 초상화 한 장과 전신을 가릴 수 있는 흑의를 건네주었다.
“말씀하신 물건과 목표의 위치입니다. 대외적으로 활동을 많이 해서 은신처랄 것도 없었습니다. 초상화에 그려진 이자가 목련 소교의 오른팔입니다.”
“알았다.”
하오문은 은밀히 활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오문 분타주가 살고 있는 집은 대단히 호화로웠다.
흑의를 걸쳐 얼굴과 전신을 감추고 있었지만 애초에 목적은 잠입하는 것이 아니기에 사혁은 당당히 대문으로 걸어갔다.
두 명의 문지기가 창을 가로질러 문을 막아서자 사혁은 망설이지 않고 문지기 두 명의 목을 부러트리곤 대문을 발로 찼다. 나무로 된 대문은 박살이 나버렸고 저택을 경호하고 있던 경비병들은 손에 병장기를 쥐고 사혁에게 달려들었다.
사혁은 권법을 쓰지 않고 오직 본능적인 주먹질과 발차기만으로 경비병들을 제압했다. 정강이를 걷어차면 다리가 부러졌고 배를 걷어차면 입에서 피를 뿜었으며 머리를 후려치면 목이 돌아가 버렸다.
이전의 제갈 사혁과는 확연히 다른 가공할 만한 힘이었다.
“죽어라!”
사혁은 경비병들의 모든 공격을 피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경비병 한 명이 운 좋게 공격에 성공했고 사혁은 검에 베였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상처를 입었다.
“…….”
피가 흐르자 사혁은 대수롭지 않게 피를 닦아냈고 그 자리에 더 이상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분타주는 어디에 있나?”
“미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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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