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회: 흡정마공 -->
제법 거한의 남자가 사혁을 번쩍 안아 들어 양팔로 허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보아가면서 사용해야 했다. 다리를 치면 다리가 부러지고 복부를 때리면 내장이 상하고 머리를 치면 목이 부러지는 상대에게 접근하여 허리를 조이다니, 용기는 가상하나 어리석음이 명을 재촉했다.
사혁이 거한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쥐자 거한의 양팔이 풀리며 맥없이 사지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가 의식을 잃은 순간 두골이 으스러지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하오문 분타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녀석들이라고는 하지만 내공이 일천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제갈 사혁에게 일반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검을 든 경비병들이 우르르 계단에서 내려왔다.
복호백열격.
내공을 주입하지 않은 채 초식만 발현한 복호백열격이었지만 여기저기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봐주는 건 없다. 죽고 싶은 놈부터 튀어나와!”
“염화작(炎花炸)이라 하오. 이곳의 총책임을 맡고 있소이다. 귀하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염화작이면 제법 이름이 알려진 낭인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사혁에게는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사파 놈들이랑 동급이었다.
진정한 낭인이란 돈을 위해 검을 휘둘러도 결코 집 지키는 개가 되지는 않는 법. 늑대는 길들이지 못하며 길들여진 늑대는 더 이상 늑대라 할 수 없었다.
온몸을 이용한 붕권으로 불시에 일격을 노리자 염화작은 화기를 내뿜으며 검막을 발했다.
공격이 무산되자 사혁은 왼손으로 장타를 쳐서 검막을 이루는 검을 때렸다. 검막을 맨손으로 쳤기 때문에 그의 손에는 약간의 화상과 함께 검상이 생겼다.
공수일체의 실로 대단한 기술이지만 이런 대단한 수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을 터.
“죽어라!”
그 때였다. 사혁의 뒤에서 경비병이 도끼를 들고 달려왔다. 그러나 가볍게 공격을 피한 사혁은 그의 뒷목을 붙잡고 그대로 염화작의 검막을 향해 밀어버렸다.
“끄아악!”
살이 타는 지독한 고통을 느끼며 경기병이 비명을 지르자 깜짝 놀란 염화작은 검막을 풀었다.
“이런 사악하기 짝이 없는!”
“전장에는 적군과 아군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검으로 베서 죽이나 도끼로 찍어서 죽이나 죽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예의를 갖추고 고상하게 상대를 죽이는 거추장스러운 일 따위를 신경 쓰는 무림인은 없다.
염화작이 검막을 거두자 사혁은 염화작의 복부에 장타를 날렸다.
“이게 무슨?”
복부를 통해 단전으로 일순 기가 우겨 넣어지자 염화작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격을 하기 위해 기격을 넣는 경우는 있지만 내공을 우겨 넣는 방식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격으로 때리기보다는 기를 넣어준 것에 불과했다.
“무엇을 했는지 모르나 다음 공격에 모든 걸 걸겠소.”
염화작이 눈에서 휘광을 번득이며 둔기처럼 둔탁한 검공을 날리자 사혁은 오른팔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예사롭지 않은 기세와 달리 일반적인 내려치기에 불과했기에 공격을 한 염화작은 무척 당황해했다.
“필시 검초와 함께 내공이 운용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평생 검을 휘두른 이가 내공 운용하는 법을 깜빡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 같은 이치.
“여기까지다.”
그 순간 사혁의 일권복호가 염화작의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염화작이 내공을 운용하지 못한 것은 사혁이 장타를 때린 순간 그에게 넣은 기공이 흡정마공의 묘리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기로써 기를 흡수하는 일종의 산공독(散功毒) 형태의 방법인데 단점이라면 시전자가 흡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고 장점이라면 그 누구도 이것을 흡정마공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사혁의 흡정마공은 한 단계 더 완벽해졌고 마공(魔功)이 아닌 신공(神功)이 되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흡기가 목적인 흡정마공에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
“대주!”
염화작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경비병들의 검은 꺾이지 않았다. 그 기개에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결국 무림에서 약자는 존재 가치가 없는 법.
“파(破)!”
제갈 사혁이 외침과 함께 전 방위로 휘두른 주먹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후 일어난 일은 모두 사혁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했다.
“도대체 분타주는 누구냐!”
그렇게 외치며 분타주의 방문을 걷어찬 순간 그 앞에 펼쳐진 광경에 사혁의 정신이 멍해졌다. 여자가 여자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이라니…….
“죽어라!”
하지만 뒤에서 달려들어 오는 경비병 덕에 정신을 차린 그는 경비병의 허벅지를 후려쳐 쓰러트린 후 여자 둘이 뒤엉킨 난잡한 곳에서 목련 소교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끌고 나왔다.
“이… 이거 놔!”
목련 소교를 끌고 저택 마당으로 나오자 수백 명의 무사들이 사혁을 맞이했다.
“이놈, 분타주님을 풀어드려라!”
수백 명의 무사들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후덕한 인상의 남자는 분명 초상화에 나온 목련 소교의 오른팔이었다. 그렇다면 이로써 목련 소교의 죽음을 흡정마공인의 짓으로 뒤집어씌우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목련 소교를 들어 올린 사혁은 그대로 흡정마공을 발휘해 목련 소교의 진기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흡정마공과 달리 사혁의 흡정마공은 흡기하는 이의 외모에 변화가 없었다.
흡기 대상자에게 아무런 징조가 없다는 것은 흡정마공의 진정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흡기 흔적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아미파를 도왔다고 들었다. 그 덕에 내가 죽을 뻔했음을 알고 있나? 이는 계약 위반이다.”
계약이라는 말에 목련 소교의 오른팔은 눈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다… 당신이 살아있다니. 하지만 어째서 분타주님을!”
예상대로 목련 소교의 오른팔은 ‘아미파’ 그리고 ‘계약’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언급하자 제갈 사혁을 흡정마공인으로 착각했다.
“목련 꽃에는 향기가 없다.”
어중이떠중이 무사들이야 수백 명이 아닌 수천 명이 달려들어도 전부 죽일 자신이 있지만 목적을 달성한 이상 더 이상의 살생에 의미는 없었다. 사혁은 경신법을 발휘해 저택 건물을 밟고 올라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하오문의 한 지역을 맡고 있는 분타주가 죽었음에도 하오문은 침묵했다. 그 흉수가 하오문을 이용한 고객인 탓도 있었고 그의 얼굴을 알고 있다고 해도 도저히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보고 받은 사혁은 읽고 있던 책으로 부채질을 하며 웃었다.
“모르지, 뒷산 흙이라도 뒤지면 손톱의 때만 한 놈의 뼛가루 정도는 찾을 수 있을지도.”
이렇게 사천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 사건은 범인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실종자들을 찾은 것으로 해결됐고 이 일로 화산파의 무진 도사, 제갈 사혁과 제갈 도진으로 이름난 봉명공, 그리고 당소진과 주작인의 이름은 강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날 새벽 무풍대 대원은 사혁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말했다.
“흉수에 대한 언급만 했을 뿐 흉수의 특징에 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수고했다. 이제 일러준 대로 처리해도 좋다.”
사혁 입장에서는 목련 소교가 누구에게 죽었는지 하오문에 알릴 필요가 있었기에 그를 살려둔 것이었다. 그리고 무풍대에게 그가 흡정마공인의 무공에 대해 하오문 상부에 보고하면 그 자리에서 암살하라 지시를 내렸었다.
결과적으로 흡정마공인에 대한 내용 없이 하오문 분타주를 죽인 자에 대한 것만 보고가 올라갔고 사혁은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확실해지자 그자에 대한 암살 명령을 내렸다.
아미파에서의 일이 끝나자 사혁은 봉명공과 함께 아미파를 떠났다. 물론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아미파의 속가 제자들을 떼어놓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서도 봉명공 스스로가 승려로서의 자각이 있기에 떠나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기회가되면다음에봐.”
“안녕히…….”
주작인은 늘 변함없이 빠른 말투를 구사했으며 당소진은 처음과 달리 조금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거기까지였다.
“강호는 좁으니까.”
“부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과 헤어지고 떠나는 길에 봉명공은 대뜸 사혁에게 물었다.
“아직도 있는 것이오?”
뜬금없는 물음 같았지만 이는 다름 아닌 무풍대 대원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분부하신 물건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무풍대 대원은 사혁에게 상자를 건네주었고 그 상자에는 목련 소교를 보좌했던 오른팔의 수급이 들어있었다.
“수고했다. 모두 본가로 귀환해도 좋다.”
그렇게 무풍대 대원들은 무풍대의 이름처럼 바람에 쓸려 사라졌고 사혁은 놈의 목을 아무렇지 않게 길목에 버렸다.
“아이고, 피곤하다.”
수십 명이 희생됐지만 사혁에게는 고작 피곤한 정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비정한 무림인. 자신의 손에 죽어간 적에 대해 생각해 줄 만큼 상냥한 마음씨 따윈 없었다.
“범인 잡혔단다, 봉명공.”
“정말이오?”
“도망치다가 우리 애들이 잡아서 댕강.”
흡정마공인을 잡았다 거짓말을 했지만 봉명공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혁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악덕한 짓을 하면 그 업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 그야말로 인과응보(因果應報) 아니겠소.”
“오, 뭘 좀 아는데.”
“인과응보라는 말은 원래 불가에서 나온 말이오.”
이번 임무도 끝냈겠다. 이제 앞으로 어디로 갈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였나? 그래, 청해(靑海)나 가볼까?”
“청해로 갈 생각이오? 좋소이다.”
역시 생각대로 녀석은 청해까지 따라올 셈이었다.
사혁은 이제 봉명공이 사파니 뭐니 하는 생각은 접었다. 숭산 소림의 보물인 비룡승천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니가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파계승이 비룡승천봉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말이 되지 않았다. 신력이 깃들거나 하는 보물은 아니기 때문에 사파나 마교에서는 이 물건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비룡승천봉은 소림사에서 상징적 의미로 만든 무구였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나네. 이걸 나도 전에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놈의 기억력도 요즘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기에 사혁은 비룡승천봉에 대해 생각하는 걸 관뒀다. 그 대신…….
“야, 지금 소림에 누구냐, 수호신승(守護神僧)? 그거 20년마다 바뀌잖아.”
“무한(無限) 학승이…….”
넘겨짚어 봤는데 역시나였다.
수호신승에 대해서는 방장과 그 사형제, 그리고 문파 내에서 중요 인물들밖에 모르는 일. 그런데 그것을 파계승이 알고 있다? 그걸 아는 제자를 파계승으로 두었다? 그리고 그는 비룡승천봉을 들고 돌아다니고?
수호신승은 방장을 제외하고 소림의 모든 무공을 익히고 소림이 위기에 빠졌을 때 소림의 근간을 지키며 무예의 실전(失傳)을 막는 중요한 직책 때문에 그 정체는 비밀이었다.
봉명공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너 정말 사파냐? 어떻게 비룡승천봉에 수호신승의 이름까지 알아?”
정말 당황했는지 느긋느긋하던 봉명공은 땀까지 흘렸다. 이로써 이 녀석에게 직감적으로 적의가 생기지 않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너, 소림의 세작(細作)이지.”
그간 봐온 제갈 사혁에게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봉명공이었다.
“반은 맞…….”
“됐어, 정말 사파가 아니다 정도만 알면 돼. 너는 그냥 네 말대로 봉명공이잖아.”
봉명공이 본 사혁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때론 갈팡질팡하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기지를 발휘하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넒은 마음을 가진 한편, 무조건적인 흑백 논리에 물들어 어리석은 언행을 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제갈 사혁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봉명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사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계승이지만 살인을 하지 않고, 또 그러면서 고기도 먹고 머리도 기른다. 타락한 것은 아니지만 할 건 다했다. 그것이 임무 때문이든 뭐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터. 그저 사파만 아니라면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다음은 청해다.”
============================ 작품 후기 ============================
2013년 3월 20일 수정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출판 교정본 기준으로 1권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