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회: 청해로 가는 길 -->
봉명공이 본 제갈 사혁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때론 갈팡질팡하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기지를 발휘하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넒은 마음을 가진 한편 무조건적인 흑백논리에 물들어 어리석은 언행을 할 때도 있었다.
도대체 제갈 사혁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봉명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것은 제갈 사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계승이지만 살인을 하지 않고 또 그러면서 고기도 먹고 머리도 기른다. 타락한 것은 아니지만 할 건 다했다. 그것이 임무 때문이든 뭐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터 그저 사파만 아니라면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었다.
“다음은 청해다.”
“제.... 제갈 무진 죽을 것 같소이다!”
그 시대 후기지수 중 화산의 대사형 무원과 함께 가장 강하다는 평가가 내려진 봉명공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줄까?”
반면 제갈 사혁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영약을 떡처럼 씹어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됐소! 소림은 절대 영약으로 무공수련을 하지 않소.”
청해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러다 보니 가는 길에 객잔을 보기가 힘들었고 빚쟁이 마냥 배고픔은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었다.
“약초라면 있는데.”
“됐소이다.”
소림이 영약을 먹지 않는 것은 영약에 의존하지 않고 무공을 익히면 자연스레 참을성과 끈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영약을 먹으면 무공이 강해질지 모르나 마음의 강함 키울 수 없다. 화산파만 해도 약관이 넘기 전까지 제자에게 영약을 복용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소림은 약관이 아닌 이립을 그 기준점으로 삼는다.
흡정마공인에게서 탈취한 영약은 제법 알아주는 문파의 것인지 상당히 그 효과가 괜찮았다. 물론 과거 제갈 사혁이 복용했던 옥진산에 비할 바 되지 못하지만 어차피 흡정마공의 완성으로 인해 내공이 의미가 없어진 제갈 사혁이었다. 다만 흡기를 하면 상대의 탁기가 몸에 쌓여 소변으로 배출 되는데 그때 냄새가 살짝 고약했다.
(요즘 들어 오줌 냄새가 조금 고약해졌지....)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봉명공은 급기야 쓰러지고 말았다.
“..............”
이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제갈 사혁은 나뭇가지를 꺾어 봉명공을 찔러봤다.
“죽었냐?”
아무 말이 없다. 그냥 시체인 것 같다.
정말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제갈 사혁이라고 왜 생각이 없었겠는가? 지나가는 길에 산적이라도 만나면 자그마한 도움의 손길 정도는 받아볼 셈이었다. 그런데 자기라고 알았겠는가? 오고 가는 길에 산적 한명을 안만 날 줄이야. 거기다 욕구자제를 기본으로 한다는 스님이 이렇게 배고파서 쓰러지다니 정말 놀랄 노자였다.
“하아~ 답답하다.”
그늘진 나무 옆에 봉명공을 내려놓고 제갈 사혁은 산을 올랐다. 어차피 무림인에게 곰은 살찐 강아지고 호랑이는 줄무늬가 특이한 고양이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거나 잡아서 입에 넣어주면 되겠지 싶었던 제갈 사혁은 비류보를 펼쳐 산을 종횡무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응?”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를 따라간 제갈 사혁은 그곳에서 새끼 새를 노리는 구렁이를 보았다. 구렁이는 얼마나 큰지 제갈 사혁의 팔뚝보다 더 컸다. 이를 본 제갈 사혁은
“좋았어.”
구렁이가 새끼 새를 잡아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구렁이가 새끼 새를 한입에 삼킨 뒤 유유히 사라지려 하자 구렁이의 꼬리를 재빨리 잡아챘다.
구렁이를 잡아 온 제갈 사혁은 곧바로 봉명공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구렁이의 껍질을 벗기고 불을 지펴 구렁이를 구웠다.
“일어났냐?”
“무진.”
너무 배가 고파서인지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귀찮게 저찮게 해도 결국 함께 길을 나서는 동행. 제갈 사혁은 노릇노릇하게 구운 구렁이를 반으로 뚝 잘라 봉명공에게 주었다.
“구렁이는 어디서 구했소?”
“구하긴 어디서 구해. 여기가 다 산 아니냐.”
제갈 사혁은 구렁이를 잡았던 것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뜬금없이 봉명공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무진 어째서 아기 새를 구하지 않았소! 구렁이에게 잡아먹힌 아기 새가 불쌍하지 않소!”
그 말을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어서 봉명공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런 미친 놈 살려놨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럼 너한테 잡아먹힌 구렁이는 안 불쌍하냐? 위선자 새끼 놀고 있네. 그게 참새 새끼지 사람새끼냐? 내가 왜 구해야 하는데.”
“하지만.”
“빨리 목구녕에 쳐 넣어. 청해가 코앞이다!”
고기 먹는 파계승 주제에 아기 새가 불쌍하다니 별 웃기는 소리 다 듣는 제갈 사혁이었다. 어차피 동물들의 세계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 인간처럼 어리다고 봐주는 인정 따위는 없다. 그렇게 새끼 새를 잡아먹은 구렁이를 맛있게 구워먹은 두 사람은 힘을 내서 길을 서둘렀다.
“저기 보시오. 무진.”
봉명공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곳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을을 보자 제갈 사혁과 봉명공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경공을 펼쳤다. 사천을 빠져 나온 지 이틀 만에 보는 사람 구경인 셈이다.
“시체네. 시체야. 조금 세상에 시체 반 사람 반이잖아.”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무진.”
“안 돼. 이거 사람 불러야 해. 우리가 시체 청소를 왜하는데 사람 불러 내고 있는 세금이 얼만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세납자일 경우는 없소이다.”
시체를 치우네 뭐네 쓸 때 없는 설전을 버릴 때 시체라고 단정 지었던 남자가 움직였다.
“으....”
“이보시오. 정신이 드시오.”
자세히 보니 남자는 폭행을 당한 듯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 봉명공은 의식을 붙잡게 하려는 듯 이리저리 흔들었고 이를 본 제갈 사혁은 한숨을 쉬며 봉명공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비켜.”
그리고는 품에서 침을 꺼내 남자의 몸에 꽂았다.
“침술도 할 줄 아오? 무진은 정말 못하는 게 없구려.”
“여섯째 사숙께 배웠어. 내가요상술이 효과는 빨라도 기력이 쇠한 사람한테는 부담이 되니까.”
제갈 사혁의 제법 전문성이 느껴지는 침술로 차츰 안정적인 호흡을 하자 제갈 사혁은 봉명공에게 떠밀었다.
“내가요상술 할 줄 알지?”
“물론이오.”
봉명공의 내가요상술로 정신을 차린 남자는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 제갈 사혁과 봉명공에게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일어나시지요. 저희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남자는 30대 후반 쯤으로 보였다.
“이형(箕門) 도장의 관장인 장청(長春)입니다.”
한 도장의 관장치고는 좀 심하게 얻어터졌지만 거기까지 제갈 사혁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소승은 봉명공이오. 이쪽은 무진이오. 성은 제갈 이름은 사혁이오.”
“오호~ 제갈세가분 아니십니까. 이렇게 귀한 분을 만나다니 영광입니다.”
이래서 명문이라는 간판이 중요하긴 했다. 어딜 가나 대접 받으니까.
“장 시주께서는 혹 이 근처에 살고 계십니까?”
행색은 그냥 젊은 강호인처럼 보이지만 시주라는 호칭에서 장청은 봉명공이 스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봉명스님.”
“하하 그냥 봉명공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장청의 안내에 따라 제갈 사혁과 봉명공은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외진 곳인지 중원바닥이면 어디든 찾아간다는 천하의 관군 징용병도 이곳에는 개병제(皆兵制)에 의거한 예비군 통지를 전달해주지 못할 것 같았다.
장청이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같이 장청을 환대해주었다.
“아이고 관장님!”
“무사하셨구만요.”
“그 나쁜 놈들 일은 잘 됐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걱정 했수다. 어디 다치진 않았소?”
그런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장청은 팔 근육을 내보이며 자신의 무사함과 건강함을 알렸다.
“저는 무사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무술로 단련된 제 몸을~ 이러지들 마시고 일 보십시오. 저는 손님을 대접할 테니.”
“이분들은 뉘요?”
“제갈 소협과 봉명공 스님이십니다. 저를 도와주셨지요.”
“젊은 사람들이 참말로 좋은 일 했구만.”
칠십은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제갈 사혁과 봉명공의 손을 잡자 두 사람은 어른에 대한 예의로 손을 마주잡아드렸다.
장청은 자신의 도장으로 제갈 사혁과 봉명공을 데려와 음식을 대접해주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마을잔치가 되어버렸다. 작은 마을의 넘치는 정쯤으로 생각한 두 사람은 부담 없이 대접 받은 것을 즐겼고 마을 잔치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나 끝이 났다.
“조금 요란했지만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잘 먹었으니 우리는 만족이야.”
“그런데 아까 들으니 마을 사람들이 관장님 걱정을 많이 하던데 무슨 근심 거리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장청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런 작은 산골마을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법에 그리 밝질 못합니다. 그래서 잘 속기도 하는데 그것이....... 마을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마을사람들의 가축이나 땅을 빼앗으려 하는 못된 놈들이죠.”
사채에 관한 거야 뭐 이런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문제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채는 그릇되긴 했지만 잘 못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 빌리고 갚는 데에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글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사채꾼들의 좋은 말에 속아 계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언변에 속아 서명을 하고 사채꾼은 자신에게 유리한 계약서를 빌미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계약상 잘못된 것은 없기에 관아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죠.”
확실히 계약서에 문제가 없다면 관아는 나서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관아에 있어서는 이런 촌구석까지 신경써줄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세금 징수원조차 파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럴 때 통용되는 건 법보다 주먹이다.
“놈들은 돈을 회수 못하자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서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제 힘으로 막아냈지만 놈들이 차츰 돈으로 사람을 고용해서.....”
도장의 관장이면 문파를 이룰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는 사람정도로 보는 게 강호의 통상적인 개념이다.
처음에는 건달 몇 놈 처리했겠지만 낭인 쯤 되는 진짜배기들이 나서게 되면 작은 마을의 관장 가지고는 힘 싸움이 되지 않는다. 한편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무언가 굉장히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다름 아닌
“용서할 수 없소이다!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에 따라 이 봉명공도 장청 시주를 돕겠소.”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결과는 뻔했다. 장청은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봉명공 성격으로 보아 나설 게 분명했고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싫어.”
“혼자 하겠소. 소승 봉명공이오.”
봉명공정도면 스스로 자부심을 가져도 됐다. 물론 약자를 돕는 것은 응당 정파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무슨 이득이 된다고 돕겠냐? 이 말이다. 사회적으로 자신의 체면이 선다던가. 물질적 이득이 있다던가. 뭐 그런 것 중 하나라도 걸려야 돕는 거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