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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협-26화 (26/262)

<-- 26 회: 청해로 가는 길 -->

제갈 사혁은 장청을 돕겠다며 마을에 눌러 붙은 봉명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자신이 무어라 불평할 수는 없었다. 봉명공의 생각은 분명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이형도장에 머물게 된 두 사람은 각자 전혀 다른 생활습관을 보였다. 봉명공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 밭도 갈고 청소도 하는 반면 제갈 사혁은 이형도장에서 탱자탱자 놀기 바빴다. 그나마 놀지 않는 날에는 개인적인 무공 수련을 하는 게 전부였다.

공기를 가르며 휘두르는 주먹은 빠르고 부드러웠다. 주먹 위에 계란을 올려 땅에 떨어트리지 않고 계속 정권 찌르기를 하는 이 훈련은 빠르고 부드러우며 또한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훈련으로 제갈 사혁이 아침마다 하는 훈련이었다.

“놀랍습니다.”

장청의 칭찬에 제갈 사혁은 목례를 하는 것으로 답했다.

“제갈세가라면 검종일텐데 권법사시군요.”

“뭐 검종을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같은 권법사로서 참으로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이형도장은 생각보다 그 역사가 대단했다. 지금은 전 무림의 가장 기초적인 초식으로 알려진 이형권을 창시한 무도가의 제자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형권은 화산파에서 보무제자를 가르칠 때 이용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권법이다.

“흔하다지만 이형권도 훌륭한 권법.”

“하지만 저의 내공이 일천하여 그리 큰 성취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장 수준으로 이렇게 오랜 시간 남은 것만 하더라도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명맥만 유지할 뿐 결국 시대에 뒤쳐져 남은 사람이라고는 도장의 관장 뿐 그 관장조차 무뢰배 몇 놈에게 얻어터져 길가에 죽은 듯이 쓰려져 있었으니 차마 무림인이라 하기도 안타까운 수준이다.

“솔직히 그대의 실력은.......”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제 주제는 잘 알고 있습죠. 하지만 제가 떠나면 마을 사람들만으론 이 마을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적어도 마을 아이들이 자라 자신의 손으로 마을을 지켜낼 때까지 버티고 싶었습니다.”

제갈 사혁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림에 있어 힘이 없는 것은 죄 그리고 그보다 더한 죄는 힘도 없는 주제에 타인을 지키겠다며 나서는 무모함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럼 수고하도록.”

“네 쉬십시오.”

도장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누운 제갈 사혁은 귓가에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하합! 얍!”

“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문뜩 잠에서 깬 제갈 사혁은 부스스한 눈을 한 채 도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곳엔 10살 정도 먹었을 법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합! 합!”

두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이 꽤나 엉성해보였다.

“뭐냐?”

“........”

제갈 사혁의 무름에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제갈 사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대뜸 다가와 제갈 사혁에게 삶은 완두콩을 주었다.

완두콩을 받은 제갈 사혁은 그 흔한 당과 하나 보기 힘든 이런 시골에서 이것이 이 아이의 유일한 군것질 거리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형은 장 관장님 제자에요?”

누가 그런 무림인도 안 되는 제자겠냐만은 제갈 사혁은 아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제자면 어쩌려고?”

“우와~ 그럼 저도 도장에 다니게 해주세요.”

“도장에?”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이 도장에는 어째서 제자가 없는 걸까? 장청 관장은 분명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마을을 지키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제자는 키우지 않았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지키고 싶다는 말은 아이들을 제자로 키워내 지키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던가?

“저도 도장에 제자가 되면 안 되나요?”

“그런 건 관장님께 여쭤봐야지.”

“하지만 관장님은 무공을 익히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며 배워선 안 된다고 하셔요.”

무공을 익히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다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림인의 목표가 우화등선을 해 신선이 되는 거라면 사람 죽이는 무공을 익히기보다 채식을 하며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신선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지만 무림인은 무공을 익히고 그 무공으로 사람을 해한다. 아무리 변호를 하고 변명을 해도 무공의 본질이란 결국 폭력.

“너는 사람을 때리고 아프게 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 거니?”

“아니오.”

“하지만 네가 배우려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란다. 결국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지.”

“............”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는 그로부터 한참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이 끝나자 아이는 말했다.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건 싫지만 하지만 그래도 배우고 싶어요.”

“무엇을 위해.”

“관장님처럼 나쁜 사람들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킬 거예요.”

아이의 대답은 모순적이지만 질문에 대답함에 있어서 굉장히 대견스러웠다.

고민할 줄 알며 고민에 답을 낼 줄 아는 이 나이 때 아니 어른도 하기 힘든 것을 아이는 해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내가 한번 잘 이야기 해보마.”

“우와~ 신난다.”

좋아서 폴짝 폴짝 뛰는 아이를 보니 제갈 사혁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이구~ 늙은 놈 하나 처리하니까 웬 새파란 놈이 있네 그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싶어 손을 뻗던 그때 웬 껄렁껄렁한 사내 다섯이 이형도장으로 찾아왔다.

“니 놈이 관장 놈 제자냐?”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절대 관아에서 파견 된 공무원은 아닌 것 같아보였다.

“장청 관장은 잠시 어딜 나갔으니 그를 만나려거든 기다리시오.”

“시부럴 놈 얌전떠는 거 봐라! 혓바닥이 어떻게 굴렸기에 말을 그렇~ 게 재수 없게 하냐?”

건장한 사내 4명을 대동하고 와서인지 건달의 기세는 굉장했다.

웃는 낯짝으로 실실 쪼개니 아주 그냥 생각 같아서는 누런 빛깔을 띤 옥수수를 털어버리고 싶지만 차마 아이 앞에서 이빨을 털어버릴 수 없기에 제갈 사혁은 최대한 상대를 존중했다.

“죄송합니다.”

(봉명공 이 자식은 어딜 간 거야. 이 놈팽이 땡초 놈.)

봉명공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을 순찰을 도는 중이지만 여태까지 낮잠이나 자던 제갈 사혁이 이를 알 리 없었다.

“어서 가보렴. 손님들이 오셨으니 대접해야겠구나.”

일단 아이를 보내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배꼽인사를 하며 떠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 제갈 사혁은 아이가 저 멀리 떠나자 도장 안에 더러운 가죽신을 신고 들어온 건달을 향해 말했다.

“신발 벗어.”

“뭐?”

“신발 벗어.”

“어쭈 말이 좀 짧다. 이 새..... 끄아아아~~~~~”

제갈 사혁이 정강이를 걷어차자 건달의 종아리는 피투성이가 되고 이를 보고 있던 건달의 부하들은 무기를 꺼내들었지만 쉽게 나서지 못했다. 아무리 삼류 무뢰배라지만 무기 하나 없이 사람의 정강이를 딱 한번 걷어차서 멀쩡한 다리를 저 지경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구시오.”

“장 관장 없으니까. 여기 이거 데리고 나중에 다시 와.”

제갈 사혁의 눈치를 보던 건달들은 도장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부여잡고 있는 건달 한명을 들쳐 엎고 서둘러 도장을 빠져나왔다.

건달들이 도망치자 제갈 사혁은 직접 걸레를 빨아 도장바닥을 닦았다. 삼류 도장이든 명문 문파든 몸을 단련을 하는 ‘이곳’은 힘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신성한 곳이기 때문이다.

“쳇! 보기 좋게 참견해버렸네.”

아까 그 어중이떠중이 놈들에게 장청 관장이 당하진 않았을 터 그 말은 곧 그 건달들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낭인인가.”

낭인 중에서도 협객은 있다. 하지만 협객이 있으면 양아치도 있는 법.

어차피 봉명공이 나서겠다고 한 순간부터 일행인 제갈 사혁도 이미 이 소동에 한축을 담당한 셈이었다.

“아~ 귀찮아.”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게 말이유. 막 그런단 말이유.”

다음 날 마을의 나무꾼이 찾아와 장청 관장에게 하소연을 한 것이다.

하루는 옆 마을에 나무를 팔러 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나무를 팔려고 자리를 잡으면 인상 험악한 사람들이 주변을 얼쩡거려서 손님이 좀처럼 나무를 살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물증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아무래도 그 사채업자 부하들 같혀.”

마을에 도자기를 팔러 나간 아주머니의 하소연이 이어지자 봉명공은 이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받아드렸다.

“아무리 사채를 빌렸다고는 하나 생계를 방해하다니 이는 심각한 문제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증거. 증거. 증거. 이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골머리가 아팠다.

그냥 사채업자 소굴로 쳐들어가서 몇 놈 잡아가다 다리를 부러트려서 건달 대지에 서다. 를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증거니 뭐니 답답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와 제갈이 나무를 팔러 마을에 가겠습니다. 장청 관장님은 도자기를 팔러 가시죠.”

순간 제갈 사혁은 혈관과 근육이 7대 3으로 수축하는 기분을 느꼈다.

“너 가만 보면 막 날 휘두른다?”

“애초에 무진이 도장으로 찾아왔다는 건달들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마을사람들이 피해 볼 일도 없소이다. 어찌할 것이오?”

아무리 막나가는 제갈 사혁이지만 그 정도도 모를 사람은 아니었다.

“알았으니 그만해.”

다음날 제갈 사혁과 봉명공은 나무를 한가득 등에 짊어지고 옆 마을로 향했다.

“장사해봤냐?”

“소림은 자고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그 말을 듣는 제갈 사혁은 비웃음을 날리고 싶었다. 속가제자로 장사해먹는 걸로는 무림문파 중 단연 최고.

한 해 일반 백성들에게 받는 공양(供養)만 해도 장원 열채를 운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소림이다. 오죽하면 효성이 지극한 한 소녀는 소림사 중놈에게 속아 아버지의 눈을 고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바다에 빠져죽고 그 아비는 눈도 고치지 못한 채 평생 늙어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소림이 장사 못하면 말이 되냐.”

“소림하고 장사가 무슨 상관이오? 소승은 이해를 못하겠소.”

“아니 이 새끼가!”

나무를 짊어진 지게를 내려놓고 본격적인 땔감 장사를 시작했다.

“자~ 쌉니다. 싸요.”

“아주 싼 장작입니다. 이것으로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밥맛이 기가 막힙니다.”

장사에 유달리 수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굴 잘생긴 총각 둘이 장사를 하면 반드시 손님이 꼬이기 마련이었다. 제갈 사혁과 봉명공이 장사하는 곳은 금세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며 손님들로 북적였다.

“아이고 총각 잘생긴 총각이 인심 좀 더 써.”

한 아주머니의 흥정에 봉명공은 무더운 여름 날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처럼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의 두 손을 꽉 마주잡아주었다.

“안됩니다. 아주머니. 저희도 먹고 살아야죠.”

비교적 남들 앞에서 잘 웃는 봉명공과 달리 제갈 사혁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제갈 사혁의 목적은 땔감판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파리들은 언제 꼬이려나.)

제갈 사혁이 날파리라 칭하는 이들은 지난 날 촌마을의 나무꾼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던 건달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험~”

수상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인상 더러운 남자들이 제갈 사혁과 봉명공이 장사하는 곳으로 걸어 왔고 이를 본 제갈 사혁은 여름날 땡볕과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

“으흠!”

건장한 사내들이 주변을 얼쩡거리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손님들은 하나 같이 떠나기 시작했고 봉명공은 이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나무를 깎아 만든 봉에 손을 댔다. 그러자 이를 제갈 사혁이 만류했다.

“장사해야지.”

“?”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제갈 사혁은 갑자기 장작하나를 들고 건장한 사내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형님들 장작 좀 사시겠습니까?”

“뭐?”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제갈 사혁을 쳐다봤고 제갈 사혁은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장작을 팔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맛있는 밥을 겨울에는 따뜻한 방바닥을!”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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