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회: 청해로 가는 길 -->
계속되는 판매행위에 사내는 짜증을 냈다.
“이 놈이 미쳤나?”
사내는 제갈 사혁을 발로 걷어찼다. 평소 같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상대의 목뼈를 부러트렸을 제갈 사혁이었지만 이게 웬일인가?
“흑..... 흑....”
갑자기 제갈 사혁이 우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그런다고 우냐?”
사내가 당황하자 제갈 사혁은 그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형님! 제발 사주십시오. 집에 가면 곧 칠순을 바라보시는 노모께서 오늘내일하십니다. 여름에 이 땔감이라도 팔아야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어머니~”
제갈 사혁이 울기 시작하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자거리 상인들의 커다란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쯔쯔쯔! 웬만하면 좀 사주지.”
“젊은 사람이 안됐구먼.”
“거 왜 불쌍한 사람을 때리고 그려?”
제아무리 인생을 개떡처럼 사는 건달이지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무안을 주면 피가 흐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인 이상 동요되기 십상이었다.
“알았어. 이 새끼야. 사줄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손님.”
제갈 사혁은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눈물을 닦고 건달들에게 장작을 팔았다. 장작을 다팔아내는 제갈 사혁을 보며 봉명공은 감탄을 내뱉었다.
“대단하오. 무진. 소승은 제갈 무진이 저들을 죽일 줄 알았소.”
그런 봉명공을 보며 제갈 사혁은 아직 멀었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건 떡밥이야.”
“떡밥이 무엇이요?”
“생각을 해봐라. 저 놈들이 누군가의 시주를 받고 장사를 방해하러 온 건달이면.”
“건달이면?”
“시주한 놈이 있을 거 아니야.”
“그렇소.”
“그런데 건달들이 오히려 장작을 사줬다면..... 방해 대상을 도와줬다면 어떻게 될 것 같냐?”
그거야 당연히....
그제야 봉명공은 무언가를 알았다는 눈치였고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사혁에게 대단한 묘책은 없지만 이 정도 잔꾀를 부릴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그리고 제갈 사혁의 잔꾀대로 건달들은 돌아가자마자 난리가 났다.
“무어야! 땔감을 사고 와?”
빼빼 마르고 제법 성질이 있을 것 같은 수전노상을 가진 노인은 책상 위에 있는 자신의 벼루를 건달을 향해 집어던졌고 벼루에 맞은 건달은 끽소리 한번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장 가서 그 놈들 끌고 와!”
“예!”
기합이 잔뜩 들어간 건달들은 일사분란하게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인은 화를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그 촌동네 땅을 매입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제갈 사혁의 예상대로 이번에 온 이들은 건달이 아닌 무공을 익힌 낭인들이었다. 다들 하나 같이 살기가 등등한 게 그냥 넘어가지 않을 기세였다. 드디어 붕어가 떡밥을 문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일부러 맞아줄 필요가 있었다.
낭인들은 제갈 사혁과 봉명공을 신나게 두들겨 팬 뒤 자신들의 고용주에게로 데려갔다.
제갈 사혁과 봉명공이 끌려간 곳은 화려하진 않지만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저택 사이사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대인. 놈들을 끌고 왔습니다.”
대인이라 불린 노인은 고상한 척 차를 훌쩍거리며 제갈 사혁과 봉명공을 쳐다봤다.
“니놈들은 내게 진 빛이 얼마냐?”
당연하다는 듯 빚부터 꺼내는 것을 보아 이 노인네가 바로 그 사채업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사채업자는 무림인이었다. 단지 돈만으로 중원에서 사채업자 노릇을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젊은 놈들이니 촌동네 늙은이들보다는 이야기가 통할 거라 믿는다.”
그러면서 사채업자는 꽤나 많은 양의 돈을 제갈 사혁과 봉명공에게 던져주었다.
“내가 제시한 일을 수락하도록 사람들을 회유해라. 그러면 그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
(제시한 일?)
사채업자주제에 빌린 돈만 갚으면 됐지 조건제시라니?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미 돈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마을에 제시한 듯 보였다. 급할 것 없었다. 어차피 마을에 돌아가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터.
“아이고 어르신 살려만 주시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
제갈 사혁이 갑자기 넙죽 엎드리자 이를 본 봉명공은 서둘러 제갈 사혁에게 맞췄다.
“저는 3대 독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시키시는 대로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제갈 사혁과 봉명공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채업자는 그렇지 않아도 주름으로 자글자글한 얼굴을 심하게 구기며 웃었다.
“흘흘흘! 네놈들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 잘 알아들었다 믿겠으니 이 돈을 받고 내가 말한 대로 마을 사람들을 회유하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어르신.”
사채업자를 향해 절을 하며 제갈 사혁은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꺼져라!”
건달 4명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사채업자의 대문 밖으로 거칠게 밀쳐진 봉명공은 문이 닫히자 옷을 툭툭 털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무진 어째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오?”
제갈 사혁의 성격이라면 대판 날뛰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봉명공은 제갈 사혁의 갑작스러운 연극에 맞춰주기도 급급했다.
“촌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빌미로 마을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어딘가 부자연스럽잖아.”
마을로 돌아간 제갈 사혁은 봉명공과 함께 장청 관장을 대작(對酌)했다.
“웬 술입니까?”
“아니 그냥 물어볼 것도 있고 여차저차 이것저것.”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다 말해드리겠습니다.”
“사채업자가 왜 마을을 괴롭히는 거지? 단지 돈을 못 갚아서라기엔 무언가 어귀가 맞지 않아. 분명 이 마을에 무언가가 있는 거야. 내말 맞지?”
채무능력이 없는 촌마을에 돈을 빌려주다니 그것부터가 이상했다.
사채업자의 집안에 주거하는 낭인들을 고용하는데 드는 돈이나 이것저것 다 따져보면 엄청난 자산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만한 자산가가 촌마을을 쥐어짜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남기에 촌마을을 괴롭히는 것인가?
그냥 성격이 괴팍해서라기엔 사채업자가 그 정도로 실없어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확신했지. 마을에 정말 뭐가 있구나. 라고 말이야.”
제갈 사혁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내자 장청 관장은 술잔에 든 술을 훌쩍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보자기를 하나 가져오더니 그 보자기를 풀자 검은 석탄덩어리가 나왔다.
“그가 마을을 노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석탄 때문이라니?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 마을 산에서 석탄이 발견되었습니다.”
석탄탄광을 이용하는 것은 조정(朝廷)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탄광을 이용하는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특히 지속적인 인건비가.....
“그렇군.”
촌마을이라지만 마을 인구는 200여명 가량 된다. 일을 할 수 있는 젊은이들과 아이들 같은 잠재 일꾼들을 생각하면.
“탄광을 점유하고 마을사람들을 탄광에 투입하기 위해서군.”
“네. 그렇습니다.”
그 후 장청 관장은 왜 탄광에 대해 숨겨야 했는지도 말해주었다.
탄광이 발견되면 조정이 나서서 운영을 하는데 이 때 마을 사람들은 강제이주를 당하게 된다.
조정은 도시에서만 세를 거둬드리고 거둬드린 만큼 도시를 관리한다. 하지만 촌마을은 고정된 수입이 없어 세를 거둬드리지 않는 대신 관리하지 않는다. 때문에 강제이주를 당하면 땡전 한푼 못 받고 사는 곳에서 내쫓기게 된다.
탄광에 대해서 알게 된 사채업자는 이 점을 빌미로 마을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밖에 정보가 새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반면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면 탄광에 대해 알 것이고 조정에서 군대가 와 마을을 강제 이주시킨다. 하지만 계속 숨기면 사채업자는 이를 빌미로 마을을 쥐락펴락할 것이고 결국 이주할 돈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살기위해 사채업자에게의 제시조건을 받아드릴 것이 분명했다.
금광이 아닌 이상 일반사업자도 벌어드린 금액의 육할만 내면 탄광정도는 운영이 가능하기에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니 조정에 탄광발견 사실만 발설하지 않으면 조용히 개발을 진행 한 뒤 그 후에는 정당하게 탄광을 운영할 수 있다. 그것도 마을 사람들을 이용해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면서.
빚을 볼모로 탄광의 노예로 부릴 생각을 하다니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사채업자였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계속 탄광이 발견 된 사실을 숨길 셈인가?”
“숨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제갈 사혁도 인정이 있는 사람인 이상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도울 수는 있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힘을 빌리면 되니까. 하지만 이득의 문제였다.
탄광을 운영해 100을 벌면 60을 나라에 내어주고 나머지 40을 인건비를 해결해야 한다. 결국 돈이 남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이득이지만 사할도 안 되는 이득을 내자고 나설 재당숙이 아니셨다. 그리고 도덕적인 측면에서 탄광에 가까운 마을을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이주지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처음 1~2년 적자는 뻔했다. 1~2년이 지나면 지속적으로 수입은 내겠지만 자원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1~2년 안에 자원이 떨어진다면 그 막대한 적자를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그 점을 알기에 사채업자도 마을사람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결국 제갈 사혁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사채업자를 없애는 일 뿐이었다.
“간사한 새끼.”
모든 것을 정리한 제갈 사혁은 장청 관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죄송합니다.”
결국 이럴 요량으로 도움을 청한 것이다. 애초에 증거가 없다는 말로 장청은 제갈 사혁과 봉명공을 더 깊숙이 끌어드린 것이다. 인생경험 지난 생애라고 해봐야 20대의 세상물정 모르는 나이일 뿐 그것이 두 번 더 산다고 해서 중년의 노련미가 가해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는 마당으로 나온 제갈 사혁은 곰방대를 꺼내 쑥을 피워 그 연기를 마셨다.
세상에서 자기 혼자 잘난 줄 알았던 제갈 사혁이 촌동네 관장의 얕은 수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괜찮으시오.”
“보기 좋게 속았는데 괜찮을 리 있냐?”
제갈 사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눈치 채지 못했다면 모를까. 눈치 챈 이상 기분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
“강호에 환멸을 느낄 때 가끔 소승은 이런 생각을 하오. 세상에 정말 무림인이 필요한 것인가?”
“거기에 대한 답을 말해줄까? 무림인 따윈 이 세상에 필요 없어.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농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야. 그럼에도 내가 무림인을 하는 이유를 말해줄까?”
“그것이 무엇이오?”
“농사짓고 살기가 싫어서. 책을 보며 학문을 연구하기가 싫어서. 구파일방이니 뭐니 다들 거짓말이야. 애초에 검을 잡지 말아야지. 도를 닦고 불경을 외우며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치를 깨닫는데 왜 검이 필요하고 힘이 필요한데? 다들 똑같아 평범하게 사는 게 싫으니까. 평범하게 살 수 없으니까. 서로의 살을 베고 뼈를 깎아서 존재의미를 찾는 거야. 정. 사. 마로 나눠서.”
다시 한 번 태어났지만 결국 제갈 사혁은 또 다시 무림인의 삶을 택했다.
제갈 사혁이 아닌 다른 이들도 무의식중에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제갈 사혁처럼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외면할 뿐.
“대립한다는 것은 곧 싸우는 것. 싸우는 것이야말로 무림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존재의미.”
“그래서 그렇게.”
그래서 그렇게 제갈 사혁은 흑백논리에 목을 매는 것이었다. 흑백논리가 잘못되었을지언정 그것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무림인이 아닌 삶은 의미가 없어.”
어차피 무림인의 본질이니 뭐니 떠들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굳이 윤리나 도덕이 아니어도 좋다. 스스로의 신념과 정의라면 그것이 의(義)고 그것이 협(俠)이다.
악은 용서치 않는다. 아이들에게서 웃음을 빼앗는 이는 용서치 않는다. 그렇기에 이 삶에 용서란 없다.
이 세 가지가 지난 날 제갈 사혁을 지탱해주는 신념이었다. 일생 단 한 번도 영웅이라 불린 적 없지만 화산의협. 그 이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채업자를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 그리고 이 상황을 외면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악(惡)이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