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회: 청해로 가는 길 -->
이를 옆에서 지켜보단 봉명공은 어이가 없었다. 제갈 사혁의 강함은 이미 그 나이 때에 오를 수 있는 상식적인 선을 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왜 죽이지 않는 것이냐?”
“그대와 원한도 없는데 죽일 필요 있겠소? 선배. 그냥 이 길로 은퇴나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칠망검에게는 원한도 그렇다고 흑백논리로 싸잡아 죽일 명분도 없었다. 명분 없이 죽일 정도의 모난 성격은 아니었다.
“네놈이 한수 위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는 듯 칠망검을 쳐다본 제갈 사혁은 곧 말뜻을 알아채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선배를 이겼으니 당연한 것 아니오?”
그런데 칠망검의 말은 제갈 사혁이 생각한 그것과는 좀 달랐다.
“아니 당시의 흑도섬보다 네가 한수 위다.”
당시의 흑도섬보다 한수 위라니 뭐 이름난 고수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주니 기분은 좋았다.
“허나 지금의 흑도섬과 싸우면 필패(必敗)를 면치 못한다.”
기분이 좋은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뭐 흑도섬이니 뭐니 언젠간 만날 상대.
“지금 이것이 나의 본 실력이라 믿으면 곤란합니다.”
흑도섬은 분명 상식적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꺾이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한때 낭인계에서 최고라 불리던 칠망검이 젊은 날의 흑도섬에게 꺾이고 오늘날 제갈 사혁에게 꺾이듯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럼 다음에 서로 볼 일이 없을 것으로 믿겠습니다. 선배.”
그것을 끝으로 제갈 사혁은 날쌘 제비처럼 도망친 낭인들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봉명공 또한 칠망검에게 목례를 하고 떠나려는 순간.
“후배는 왜 그와 함께 다니는 건가? 함께 다니면 세작 일이 힘들어질 뿐이라네.”
칠망검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자 봉명공은 깜짝 놀랐다. 흑사련에서 자신을 중용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나 그 정체를 의심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사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칠망검이 자신을 알아보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비룡승천봉을 만들 때 그 재료 중 하나를 내가 구했다네.”
“그렇습니까?”
칠망검은 봉명공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 시대 사람이야. 그 시대에도 강호에 내 이름을 남겼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네.”
힘이 없는 자. 불혹을 맞이하지 못하고 힘이 있는 자는 세력을 얻어 불혹을 넘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무림에서 천수를 제대로 누리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칠망검은 홀로 지천명을 훌쩍 넘긴 육순의 노 강호.
“신지무의(信之無疑).”
봉명공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칠망검의 말을 믿었다. 칠망검 덕에 정보를 얻게 된 봉명공은 제갈 사혁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가는 일을 잠시 멈췄다.
“저 그런데 제 정체가 드러날 일은 앞으로도?”
“그 신물을 버리고 다니지 않는 한.”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들고 다닐 순 없었다. 자신이 이 비룡승천봉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다.......
“하지만 그것이 소림에게 가능할 리 없지. 그 날은 소림이 눈물을 흘린 날이니까.”
이 이상 지체할 순 없기에 봉명공은 가벼운 목례를 하고서 제갈 사혁이 향한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봉명공이 사라진 곳을 보며 칠망검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마는 법.”
칠망검은 슬슬 진지하게 은퇴를 생각했다.
4인의 낭인이 뿌린 어둠을 쫓으며 제갈 사혁은 기어이 낭인들을 쫓아왔다.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진 것도 아니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 할만도 하지만 제갈 사혁은 달랐다.
이미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고 무엇을 위해 이러한 행위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쫓는 이가 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살의(殺意)는 대의(大義)고 명분(名分)이었다.
제갈 사혁은 절대 멈추지 않았고 멈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오기란 이래서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제갈 사혁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달은 이들은 각자 자신의 병장기를 뽑았고 이를 본 제갈 사혁은 감정에 의해 복받쳐 오르는 거친 기운을 침착하게 제어해냈다.
사람은 다섯이지만 그 실력은 칠망검 한 사람에 비할 바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단숨에 간다!”
복호백열격(伏虎百閱拳).
백대를 때린다 하여 백열격이지만 실제로는 스물다섯 대를 때리는 제갈 사혁의 강맹한 권법은 낭인 사인의 공격과 방어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뻗어나갔다.
낭인들의 팔과 허벅지에는 제갈 사혁의 주먹자국이 선명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온정을 베푼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 한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
“이런 젠장!”
한 낭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지 않는 육신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자 제갈 사혁은 더 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법에 점혈을 더했을 뿐이다. 그러니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라.”
권법에 점혈을 더 하다니 젊은 나이에 노련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청년은 힘으로도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절대 넘을 수 없는 산과도 같았다.
“이놈! 숨겨진 한수는 있는 것 같다만 나는 사은(蛇慇)....”
별호가 나오기도 전에 제갈 사혁은 사채업자의 목을 한손으로 휘어잡았다.
“백성의 땀과 노력을 담보로 장사하는 네놈 별호 따위 입에 올리지 마라. 그 알량한 별호 어차피 들어도 모른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사채업자의 목을 붙잡은 채 다른 한손으로 사채업자의 복부를 때렸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었고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괴롭히기 위한 폭력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모.....”
모른다고 말하기도 전에 제갈 사혁은 사채업자의 복부를 또 한 차례 가격했다.
“그래 모르겠지. 그런데 앞으로 자주 듣게 될 거야. 그리고 내 이름을 듣는 순간마다 밤에 무서워서 벌벌 떨 거야. 너 같은 놈들이 세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이거든 내가.”
그리고는 사채업자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오직 제갈 사혁과 사채업자 두 사람만이 알 수 있었고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제갈 무진!”
봉명공이 뒤따라 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후였다.
봉명공이 아는 한 아무것도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시체는커녕 뼈다귀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봐온 제갈 사혁은 용서를 모르는 이였고 죽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필살(必殺).
“그럼 도대체?”
그럼 도대체 사채업자를 쫓아갈 때 뿌려대던 그 살의는 누구를 향한 살의였달 말인가?
동백나무의 잎사귀에 이슬이 맺힐 때쯤 촌마을로 돌아온 제갈 사혁은 이형도장으로 향했다.
“............”
바람도 제대로 못 막아줄 것 같은 문을 열자 그곳에는 무릎을 꿇은 장청 관장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사채업자는 처리했다. 아마 절대 이 마을을 노리지 않을 거다.”
“그렇습니까.”
제갈 사혁에게 확답을 들은 장청 관장은 한시름 마음에 놓였는지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매듭지어야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제갈 사혁의 살의는 장청 관장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낭인들을 쫓을 때 뻗어 나오던 살의가 장청 관장에게 향하다니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도움을 청했을 뿐이고 제갈 사혁은 그를 도왔다. 의협을 표방하는 제갈 사혁이 해야 할 의무고 도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 사혁은 장청 관장과 자신의 일을 매듭이라 말했다.
“힘이 있으면 돕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인간과 짐승의 다른 점이다. 허나 너의 잘못은 도움을! 호의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모르고 당했으면 모를까. 알면서 유야무야 사람 좋게 넘어갈 정도로 나는 대인(大人)이 아니다. 도움을 받는 자가 도움 주는 자의 선의를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도움이라 하지 않는다.”
장청 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갈 사혁도 그 말을 끝으로 이형 도장에서 조용히 나갔다.
이형 도장의 마당에는 봉명공이 비룡승천봉을 팔에 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것이오?”
필시 제갈 사혁의 성정으로 보아 목숨을 거두리라 생각했던 봉명공이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재빨리 장청 관장을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장청 관장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털끝하나 손대지 않았다.
“그저 원래대로 돌려놓았을 뿐이야.”
“그게 무슨 말이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서서 저만치 걸어가는 제갈 사혁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아무 일도 없었으니 이만 이곳을 떠나도 되리라 생각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형도장의 대관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던 장청 관장은 문틈 사이로 햇살이 새어나오자 도장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이형도장의 마당에서 한동안 마을을 내려다봤다.
참으로 평화로웠다.
“장청!”
그런데 그때였다. 평화로운 이형도장의 아침을 방해하는 이가 나타난 것은.
“이걸로 끝이다!”
이형도장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사채업자였고 사채업자의 칼은 그대로 장청 관장의 폐부를 찔렀다.
“억울하다는 표정 짓지 마라. 나으리께서 마을에 손대지 마라하셨지 네놈을 살려두라고 하진 않으셨으니까!”
장청 관장을 처리한 후 사채업자는 데리고 온 건달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사채업자의 호통에 건달들은 서둘러 도장 지붕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제갈 사혁이 그 마을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 장청 관장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마을을 위해 싸웠으리..... 결국.
(원래대로 됐잖아. 결국 마을은 지켰으니까. 다 잘됐네.)
붉은 깃발을 본 제갈 사혁은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