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0화 (30/262)

<-- 30 회: 복수와 보복 -->

“주인장 재미있는 거 없수?”

한량과 같은 행색으로 헌책방을 기웃거린 제갈 사혁과 봉명공은 곰팡이 냄새나는 책장을 뒤지고 또 뒤졌다. 이 근방에서 가장 오래 된 헌책방이라서인지 책방에는 온갖 잡서가 가득했다.

“제갈 무진 이게 어떻겠소?”

그러던 중 봉명공이 제법 읽을 만한 책을 찾았고 제갈 사혁은 복수 무정이라는 책의 줄거리를 읽었다. 줄거리는 대략 이랬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고장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우연히 천마대제의 비급과 심득을 손에 넣고 자신을 배신한 이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우와 이거 재미있겠는데.”

마침 볼거리도 없던 차에 잘됐다 싶은 제갈 사혁은 책방 한쪽에 자리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복수 무정 1권.

“고장 죽어라!”

남철의 검에 고장은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그런 남철의 등 뒤에는 미정과 친구 강사가 있었다.

“호호호~ 고장 나는 당신 같은 사람보다 강사 소협이 더 좋아요.”

변하지 않는 의리를 맹세했던 친우와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해 피눈물을 흘리는 고장을 싸늘하게 외면하는 미정의 얼굴에는 미소가 띠었다.

“이런 미친 감히 배신을 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제갈 사혁은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권을 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2권을 읽었다.

2권의 내용은 천마대제의 심득을 얻어 새로운 천마대제가 되어 나타난 주인공 고장이 자신을 배신했던 친구 남철에게 검을 겨눴다.

“용서해라. 친구여. 사실은 집안이 어려워서 그의 꼬임에 넣어갈 수밖에 없었다.”

“닥쳐라! 집안 사정이 어렵다 하여 친구를 배신하다니! 죽어라 천마대제 오의 암흑 멸살 천지요동 패왕권!!!”

첫 번째 배신자를 처리한 고장의 복수행은 멈출 줄 모르고..... 복수 무정 3권에서 계속.

2권의 마지막장을 넘기자 제갈 사혁은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과 함께 조금은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화끈한 건 좋은데 왜 하필 마교고 왜 하필 천마대제인데? 이 책 쓴 놈 혹시 마교놈 아니야?”

제갈 사혁은 기회가 된다면 복수무정을 쓴 글쓴이를 찾아 한번 이 점에 대해 따져보고 싶었다. 사파 놈이 주인공이어도 시원찮을 판에 마교 놈이 주인공이라니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갈 사혁은 복수 무정 2권을 덮고 들뜬 마음으로 3권을 읽었다.

“고장 내가 잘못했다.”

강사가 무릎을 꿇으며 빌자 고장은 말없이 강사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복수 앞에 무정하던 고장도 옛 사랑이었던 미정을 차마 베지 못하고

“사실은 집안이 어려워서 그에게 시집 갈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전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미정! 내 그대를 용서하겠소.”

모든 원한의 근원인 강사를 베고 난 후 미정을 사랑으로 용서한 천마대제 고장은 미정과 함께 영원히 행복할 것을 맹세한다. 그들의 앞날에 축복 있으리........ 복수 무정 마침.

마지막장을 넘기면서 제갈 사혁은 책을 던져버리며 소리쳤다.

“이런 미친 장난 하냐? 개새끼야! 복수한다면서 왜 안 죽이는데!”

“왜 그러시오. 사랑하는 이를 차마 베지 못한 것 아니오!”

함께 책을 보던 봉명공이 주인공 고장을 대변하자 제갈 사혁은 봉명공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장난 하냐? 그럼 2권에 친구 놈은 왜 죽이는데? 얘랑 죽은 친구 놈이랑 주인공 등에 칼 꽂은 건 똑같잖아! 도대체 이 놈이랑 이 년이랑 뭐가 다른데!”

“사랑하는 이 아니오.”

사랑하는 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분노를 넘어 기가 막혔다. 황당함이 분노를 넘어선 것은 이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와~ 이 여자도 그래 1권에서는 딴 남자가 좋다며 죽여 놓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마지막 권에서 완전 인물이 확 다르잖아. 1권에서는 완전히 무슨 달기(妲己) 뺨치는 악녀더만. 마지막 권에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뀌냐?”

“그녀도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던 것이오.”

“누가 봐도 1권이 천번만번 진심이잖아. 1권과 마지막 권은 그냥 이름만 같지 등장인물이 바뀐 거잖아. 누가 봐도 1권에서의 주인공보다 돈 많고 잘난 놈 따라서 시집간 이 모습이 진심이잖아!”

제갈 사혁은 별것도 아닌 일에 진심으로 화를 냈다.

“배신한 놈이랑 배신한 년의 땟국물 좔좔 흐르는 그 모가지를 얼마나 통쾌하게 자르나 그게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읽었는데 딴 놈은 다 죽여 놓고 뭐? 여자가 사랑한다니까 용서를 해? 이게 말이 되냐! 독자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끝을 보고 싶어서 마지막 권까지 읽었던 거야. 사랑과 용서? 제목이 복수 무정(復讐 無情)인데 사랑과 용서가 말이 돼냐!”

짜증을 있는 대로 내는 제갈 사혁과 달리 봉명공은 세권의 책을 품속에 넣었다.

(이 봉명공의 서른여섯 번째 명작이오.)

그런데 과연 이 두 사람은 헌 책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제 아침이었다.

아침이 되서야 곤륜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제갈 사혁의 화산파라는 배경을 이용해 하루 묵으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문지기는 두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본산에 큰 변고가 생겨 외부인의 출입은 불가합니다.”

“뭐?”

산세가 험하기로는 화산 뺨친다는 곤륜산을 어떻게 올라왔는데 축객령(逐客令)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지 않소. 내려갑시다. 제갈 무진.”

“곤륜이 그렇지 뭐! 내가 여기 아니면 묵을 때가 없냐?”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강호유람이라지만 그래도 객지인데 같은 정파로서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축객령이라니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제갈 사혁 일행이 물러난 뒤 곤륜파의 본당에서는 어떤 노인이 목검을 휘두르며 불같이 화를 냈다.

“무어야! 분광검(分光劍) 진본을 팔아버려?”

분광검. 곤륜의 검법으로 환(幻)을 기본으로 하는 쾌검이다. 비록 사본이 있다고는 하나 상징적 의미가 대단한 진본을 팔다니 도대체 어떤 무도한 자가?

“그것이 혜성(惠惺) 사매가.....”

30대 초반의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노기가 하늘을 찌르던 노인은 금방 화가 꺾였다.

“일(佚)아. 정말 성이 그 아이냐?”

일이라 불린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를 어찌할꼬.....”

한편 헌책방에서 책을 잃던 제갈 사혁과 봉명공은 이래저래 책 속에 빠져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책방 주인의 웃음소리가 책방을 가득 매웠다.

“껄껄껄! 공자께서 돈을 받지 않겠단 말이오?”

“그렇소. 돈은 받지 않을 터이니 이 책을 무료로 사주시오.”

“책장사를 평생해왔지만 돈이 없어 책을 파는 공자는 보았어도 돈이 필요 없다 책을 파는 이는 공자가 처음이오. 좋소이다. 이 책을 사겠소.”

이를 지켜보던 제갈 사혁은 특유의 호기심이 생겨 책을 판 공자가 책방을 나서자 주인에게 다가갔다. 공짜로 팔아버린 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보려는 심산이었다.

“무엇이오. 주인장.”

“모르겠소이다. 오래된 고서 같소이만 혹? 공자는 아시오.”

책이라면 당연히 읽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책에는 어떠한 이의 사상이 스며들어 있었고 제갈 사혁은 서책을 읽으며 3번의 감정변화를 느꼈다. 호기심. 감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노였다.

“사겠네.”

“하지만 그 책의 가격은 아직 어떻게 정할지.”

“이걸로 하지.”

그러면서 꺼낸 것은 금자 3냥이었다. 거의 책방의 몇 개월 수입과 맞먹는 거금이었고 주인은 그 책이 무엇인지 모르나 주인을 만났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봉명공!”

제갈 사혁의 부름에 책을 잃고 있던 봉명공은 서둘러 책방을 나왔다. 어찌된 일인지 제갈 사혁의 목소리가 다급했기 때문이다.

책방을 나오자마자 제갈 사혁은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를 밟으며 인파 속을 유유히 헤쳐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다니던 이를 발견한 순간 제갈 사혁은 상대의 등을 향해 불과 종이 한 장차이로 권격에 거리를 두며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등 뒤에서 공격하였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제갈 사혁의 위협을 인지한 상대의 목소리는 떨렸고 제갈 사혁은 맹수와 같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는 누구기에 분광검의 진본을 아무런 값도 받지 않은 채 처분하였느냐?”

분광검은 곤륜의 검법이다. 그런데 진본이라니 그것도 곤륜파의 앞마당인 청해에서? 이는 같은 정도무림인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모습을 보아하니 상대는 무림인이 아닌 학사였다.

“아니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

이미 비급은 자신의 손에 있고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제갈 사혁은 알 가치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제갈 사혁은 기격을 내뿜었고 단순한 기의 일격에 불과했지만 상대는 기막을 형성하며 제갈 사혁의 기격을 막아냈다.

“이런!”

기격을 방어해낼 줄 꿈에도 몰랐던 제갈 사혁은 적잖은 동요를 보였고 그 틈을 타 배후를 빼앗겼던 무명 학사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제갈 사혁과 눈을 마주했다.

학사는 남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운 얼굴을 하고..... 아니 사내의 옷으로 가려도 태어날 때부터 갖는 여성스러움을 완전히 감출 순 없었다. 하지만 천하의 제갈 사혁에게는 상대가 여자라는 점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세상의 반이 사내고 나머지 반이 여인인데 사람인 이상 그 둘 중 하나인 것은 당연한 일.

“정체를 밝혀라!”

다시 한 번 주먹을 쥐고 강맹한 기파를 내뿜자 남장여인도 허리에 손을 댔다. 아마도 혁대처럼 차고 있는 것은 연검이 분명했다.

“제갈 무진.”

서둘러 그 자리에 나타난 봉명공은 제갈 사혁의 손목을 쥐었다.

“이거 놔!”

“왜 그러시오. 제갈 무진. 무엇 때문인지 모르나 정파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대가 왜 같은 정파인을 공격하려는 것이오?”

같은 정파인이라니?

“오랜만에 뵙소. 혜성. 안 본 사이에 조금 특이한 취미가 생겼나보오.”

“주.....”

봉명공의 성씨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상대도 봉명공을 아는 눈치였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는데 기억해주니 다행이오.”

“파계승이 되어 흑사련에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되었소.”

“옛정을 생각해서 모른 척 넘어가주겠다. 나는 그대가 흑사련일지언정 마음만은 정파라 생각한다. 그러니 비켜라.”

말하는 투로 보아 제갈 사혁을 상대하겠다는 식의 말투였고 이를 본 봉명공은 절대 그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하오.”

가만히 두 사람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의 눈이 그 순간 빛났다.

혜성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호대주.

눈앞에 있는 상대는 바로 지난 생에서 무림맹의 백호대주였던 여인이었다. 무림맹 회의 때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얼굴은 익혀두지 않아 실제로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해는 뭔 놈의 오해. 무림인이 언제부터 오해를 말로 풀었어? 덤벼봐.”

제갈 사혁이 철없이 혜성을 도발하자 봉명공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갈 사혁도 알고 혜성도 아는 봉명공으로서는 이 이상 상황을 호전시킬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실력차이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천에서 괴인을 제압하고 최근에 상처하나 없이 칠망검을 이긴 제갈 사혁이다. 봉명공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미 그 나이에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혜성은 다르다. 자신 세대의 후기지수 중 가장 아래가 아닌가?

“하앗!”

연검을 뽑아든 혜성의 검은 가벼운 연검에 걸맞게 쾌검이었다. 하지만 이를 본 봉명공은 오랜만에 본 혜성의 검법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같았던 그녀의 검이 왠지 모르게 상대의 목덜미를 노리는 독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봉명공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만졌다.

한편 봉명공과 달리 직접 혜성의 검을 접하는 제갈 사혁은 이 검법이 분광검이라는 사실에 한번 그리고 여인의 검이 이토록 살기가 짙다는 점에 두 번 그 특유의 호기심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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