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1화 (31/262)

<-- 31 회: 복수와 보복 -->

손끝으로 연검의 검면을 정확히 쳐내며 독사의 이빨을 피한 제갈 사혁은 발을 길게 뻗어 혜성의 정강이를 걷어차 발을 멈추게 한 후 혜성의 팔목을 붙잡아 그대로 날려버렸다.

천지유벽세(天地柔劈細).

“꺄!”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혜성이 날아가자 봉명공은 서둘러 혜성의 팔을 잡아주어 그녀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상체만 신경 쓰니 하체가 빌 수밖에.”

“화산파의 권법에 제갈세가의 천지유벽세라니?”

별다른 초식을 발현하지 않았음에도 권법이 주절기가 아닌 문파의 그것도..... 화산파의 권법임을 간파하다니 제법이었다.

“그는 제갈이고 무원의 사제이오.”

“무원인가?”

제갈 사혁이 화산파의 1대 제자 무진이라는 것보다 무원의 사제라 표현한 이유는 혜성이 무원의 친우임을 제갈 사혁에게 먼저 인지 시켜 더 이상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봉명공의 얕은 술수였다. 그리고 이는 제갈 사혁에게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럼 이쯤에서 관두지 하지만 어째서 곤륜파의 제자가 분광검 비급 진본을 책방에 헐값도 아닌 무료로 팔려했지? 그것도 자신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말이야.”

두 번의 삶을 산 제갈 사혁처럼 특이한 사람이 아닌 이상 한 문파의 젊은 제자가 문파 내에 모든 무공을 익히지는 않는다.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은 천재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하나의 무공을 고르고 그 하나의 무공을 대성하면 다음 무공을 익히는 식이다. 그러니 분광검은 혜성에게 있어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절기인 셈이다.

“그딴 걸 외지인인 네놈이 알 필요는 없다.”

“백호대주 앞뒤가 꽉꽉 막힌 게 예전과 다를 바 없군.”

“무슨 헛소리냐?”

“아니 그냥 혼잣말이다.”

“미친.”

혜성의 행동으로 보아 더 이상 싸우려는 건 아닌 듯 보여 봉명공은 서둘러 이 상황자체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대 노란 도포를 입은 사내들이 혜성을 감쌌다.

“너희는 누구기에 대 곤륜파의 혜성 사저께 무례를 범하느냐!”

어디서 많이 봐온 그림이다 싶은 제갈 사혁은 그 모습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분광검 비급이다. 받아라.”

“헛!”

제갈 사혁에게서 분광검 비급 진본이 던져지자 젊은 검사는 당황하며 진본을 두 손으로 받았다. 이미 분광검이 사저의 손에 의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진본을 손에 쥐고 있던 사내에 대해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본을 돌려준 것은 감사하나 어디의 누구요?”

“화산파 제 1대 제자 무진 그리고 이쪽은 혜성의 친우 주인공이다.”

제갈 사혁은 봉명공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나갔다. 봉명공은 속세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무림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본명을 아는 이는 이 자리에서 혜성이 유일하고 혜성의 친구임을 못 박았으니 의심을 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혜성이라면 흑사련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 줄 것이 분명했고.

“시... 실례했습니다. 화산파의 제자분과 서저의 친우분이시군요. 아침에 찾아오셨다던......”

“꼼짝 없이 쫓겨났지만 말이지.”

“지금 막 축객령은 해지되었으니 다시 방문해주신다면 곤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대접을 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제갈 사혁과 봉명공이 곤륜파에서 문전박대 당한 사실은 불과 한 시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축객령이 해제됐다니?

“멍청한 놈들 허례(虛禮)고 허식(虛式)이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혜성은 연검을 바닥에 던지고 사제들만 놔둔 채 어디론가 가버렸다.

“혜성....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것만.”

봉명공은 혼잣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뭔 소리야? 딱 백호대주고만.)

봉명공이 아는 혜성이 무엇이고 제갈 사혁이 아는 혜성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백호대주는 원래 저런 자였다.

곤륜파 대법당에 현 곤륜파 장문인이 제갈 사혁과 마주앉았다.

“분광검 진본을 찾아주었다고 들었네.”

“우연히 찾게 되었습니다.”

분광검 진본이 어떻게 헌책방에 팔리게 되었는지 알게 된 장문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문인과 마주보고 있는 제갈 사혁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장문인의 복잡한 심정이 전해지는 듯 했다.

“축객령을 내린 것은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문파의 비급이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지오.”

“마음 써주어서 고맙네. 무엇 때문에 화산에서 이 먼 곤륜까지 왔는지는 모르나. 편히 지내며 떠날 땐 마음 편히 가시게.”

제갈 사혁은 차를 마신 뒤 웃어른에 대한 예를 표하고 대법당을 나왔다. 그리고 제갈 사혁이 떠나자 장문인은 고개를 저었다.

“화산파는 대제자 무원에 이어 대단한 제자를 두었구나. 허나 혜성은......”

장문인의 탄식은 타 문파의 제자가 본문의 제자보다 뛰어난 것을 시기하여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기보다는 자책이었다. 혜성을 그리고 그 아이를 이리 만든 자신에 대한.

곤륜파에 신세를 지게 된 제갈 사혁은 조용히 혼자 붓을 들었다.

붓을 쥔 손끝으로 만들어진 글은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10살짜리 어린아이와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제갈 무진의 글은 형편없구려.”

옆에서 봉명공이 한마디 하자 제갈 사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음을 담아내는 글이지.”

“세상은 그것을 악필이라 부르오.”

제갈 사혁이 뜬금없이 붓을 든 것은 아니었다. 제갈 사혁에게 서예 같은 고상한 취미 같은 건 없다. 제갈 사혁은 바로 분광검을 떠올리며 글을 쓴 것이다.

제갈 사혁은 미간을 어루만지며 입 꼬리를 올렸다. 분명 분광검 진본이라 했다.

타문파의 진본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 읽은 분광검은 흡사 거대한 해일처럼 제갈 사혁을 사로잡았다. 딱히 그것을 익히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호기심이 동했을 뿐.

“그런가?”

종이에 불과한 서책에서 글자 이상의 힘을 느끼는 일은 분명 범상치 않았다.

올해는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 수하를 만나 연민의 정을 느꼈으며 봉명공과는 작지만 튼실한 우정을 그리고 촌마을의 장청 관장을 만나 분노와 회의를 느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의 성장이고 제갈 사혁은 그것을 알고 또 대비하고 있었다.

다음날 제갈 사혁은 봉명공과 함께 곤륜파를 나섰다. 의외다 싶은 점이 있다면 곤륜파의 혜성이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화운산(華雲山)에 혜성도 볼 일이 있소?”

“그러는 너희는?”

화운산은 마교의 지역과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때문에 혜성의 방문은 제갈 사혁과 봉명공으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우리보다는 제갈 무진 혼자 가는 것이오.”

제갈 사혁을 제갈 무진이라 부르는 것이 신경 쓰였던 혜성은 조용히 봉명공을 쳐다봤다.

“그와 함께 다니는 것은 호기심 때문인가? 주.”

그녀가 말하는 호기심이란 제갈 사혁의 도호인 무진이었다. 바로 봉명공의 법명과 같은.....

“나는 원래 그런 사람 아니오.”

봉명공은 원래 괴짜였다.

“그래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지. 그래서 네가 파계를 하고 사파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

“보이는 대로만 믿어주시오.”

“그래 지금은 그냥 묘운(妙雲)대사께서 네 손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겠어.”

묘운대사. 그는 봉명공의 사숙이며 강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봉명공의 파계 이유였다. 사실 봉명공이 파계승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었다. 워낙 그 내용이 은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성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의 성격상 조사했을 것이다.

“그것까지 알아낸 것이오?”

“그래 그것까지.”

“아~ 더럽게 말 많네. 우리가 지금 무슨 단풍구경 가냐?”

“!”

제갈 사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혜성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제갈 사혁의 목에 겨눴다.

“뭐하는 짓이야?”

“...........”

뭐하는 짓이냐며 묻자 혜성은 아무 말 없이 검을 거뒀다.

(제갈 시주의 기척을 느낀 건 소승도 한 순간이었소. 기척 없이 타인의 뒤에 서지 마시오.)

봉명공의 전음에 제갈 사혁은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분광검은 잘 익히고 있겠지?”

정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래.”

“절기라 할 수 있는 무공을 왜 팔려고 했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분광검 자체는 비급이라고 하나 본산 제자면 누구나 원할 경우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화산파로 따지면 마치 매화검법과 같은 위치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문파의 주축을 이루는 무공이다. 그것을 본산 제자가 헌책방에 팔려 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갈 무진은 왜 화운산에 가는 것이오?”

“하수오(何首烏) 백년짜리.”

너무나도 간단하게 하수오라고 말하는 제갈 사혁을 보며 봉명공은 어이가 없었다.

“하수오는 그리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게다가 백년 묵은 하수오라니 화운산에 백년 하수오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이 멍청아. 화운산에 하수오가 있다는 소문 터지는 순간 화운산에는 더 이상 하수오가 없는 법이야.”

봉명공을 말을 끊고 앞장 선 제갈 사혁의 표정은 영초를 찾으러 가겠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흡사 그 표정은 살인을 결의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기다려라. 금광수(金狂獸).”

금광수는 누구고 또 무엇 때문에 그를 노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심히 그 이유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제갈 사혁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화운산에 도착하자 여기저기 살벌하게 생긴 칼잡이들이 득실거렸다. 이를 본 봉명공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오?”

그도 그럴 것이 낭인들이 이렇게 많이 모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돈 많은 대부호가 한꺼번에 고용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춘풍지회(春豊智會)를 위해 모이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그때 화운산 돌담 위에 한 남자가 서더니 춘풍지회라 외쳤다. 제갈 사혁은 웬 미친놈이 하계(夏季)에 철지난 춘계(春季) 친목회를 열고 자빠졌는지 그 얼굴을 보려했다. 그런데

“황보세가(皇甫世家)에서 여기까지 나들이를 나오다니 별 일이야.”

황보세가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오호~라는 감탄사를 내뱉을 법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아주 건방이게.

“황보세가는 이번에 안휘성에서 열릴 춘풍지회에 참가할 요량이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한 검객인 여러분들을 모시고 경연을 벌일까하오.”

낭인들 모아놓고 경연이라니 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아아~ 물갈이야.”

물갈이라니? 혜성의 입에서 나름 전문용어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호기심을 보였다.

“무슨 말이야?”

“춘계지회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먼 제남(齊南)에서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물갈이지.”

즉 혜성의 설명은 이러했다.

무림대회가 열리면 대회자체에는 참가자의 자격요건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자격요건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 참가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대회에서 가장 불리한 쪽은 다름 아닌

“명문세가지.”

명문세가라 불리는 가문들은 대게 가문의 중요한 후계자나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대회에 내보내는데 가문의 핏줄 중에서만 대회에 내보내니 수가 적이다. 때문에 무림대회의 경우 체력적인 문제가 발생하며 그를 해결하기 위해 낭인들을 모아 그 중 뛰어난 이를 선별해 포섭한다.

“포섭한 낭인이 황보와 붙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그냥 지면 돼.”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그래서 최대한 많이 뽑는 거지. 이곳 말고도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짓을 하고 있을 거야.”

큰 대회 일수록 각 지역별 예선부터 행하니 변수가 없는 이상 명문세가에서 지역예선을 떨어질 리는 없고 운이 좋아 포섭한 이가 본선에 오르면 그 때부터는 살살 어귀를 맞추면 될 일 그렇게 하다가 결과가 중박이면 가문의 체면을 살리고 대박이면 우승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찌든 제갈 사혁이라지만 무림인으로서 실력이 아닌 술수를 부려 혜택을 누르려 하는 행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혜택이란 그것을 누릴 자격을 갖춘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법.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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