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2화 (32/262)

<-- 32 회: 복수와 보복 -->

“춘계라 남궁세가에서 또 여식을 요란하게 시집 보내는 구만.”

그때 제갈 사혁 일행 옆에 있던 한 등산가가 언뜻 지나가는 말로 남궁세가를 입에 올리자 제갈 사혁은 서둘러 등산가의 팔을 붙잡았다.

“노인장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갈 무진. 어르신께 예를 갖추시오.”

등산가는 미천한 신분의 노비도 아니며 제갈 사혁과 안면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장유유서(長幼有序)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선 아니 되었다.

봉명공이 예를 따지자 그때서야 예의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제갈 사혁은 서둘러 포권을 취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제갈 사혁이라고 합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춘계의 뜻을 알려주시면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남궁세가에서는 집안에서 어여삐 여기는 자식일수록 췌서(贅壻)를 원한다네.”

췌서 즉 데릴사위는 보통 집안에 아들이 없을 경우 행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가문의 힘을 키우기 위해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데릴사위의 자식들은 외가(外家)의 성을 쓰며 가문의 사람으로 자라 가문의 힘이 된다.

“그렇지만 어디 훌륭한 사위를 찾는 게 쉬운 일인가? 가문도 훌륭하고 무공도 뛰어난 협객을 사위로 맞기란 힘든 일이네 20여 년 전에는 제갈 주원이 우승을 해. 제갈세가와 남궁세가간에 다툼이 있었다네 결국 제갈세가에서는 아들이 단 둘 뿐이라는 이유를 대며 남궁가의 여식을 데려갔네만...... 그러고 보니 자네 성도 제갈 아닌가? 혹 모르는 이야기인가?”

“오호~ 무진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오?”

“그걸 모를 리가 있냐.”

모를 리가 없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기 때문이다. 전 가주인 제갈 사혁의 할아버지 제갈 영재에게는 제갈 민과 제갈 주원 이렇게 두 아들 뿐이었다. 3남 1녀인 남궁세가와는 상황부터가 달랐다.

“아무튼 20여 년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만 춘계지회 아니 정식 대회명은 춘풍지회지. 아무튼 가문이 별 볼일 없지만 무공이 뛰어난 준재를 데릴사위로 둔다는 주제를 가지고 벌어진다네.”

“잘 들었습니다.”

약속한 사례를 챙겨주자 등산가는 기분 좋게 산을 내려갔다.

가문을 내세울 순 없으나 무공이 뛰어나다? 나름 뜻은 훌륭했다. 집안에 별거 없는데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노력을 많이 했다는 뜻이고 노력을 많이 하는 이가 그 성품이 포악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출전조건 중에 있는 누구나. 라는 말은 결국 집안 좋고 실력 좋은 이를 사위로 두겠다는 뜻이잖아.”

그건 혜성의 말이 옳았다. 결국 뻔히 보이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다. 이내 관심을 끊은 제갈 사혁은 금광수를 찾기 위해 화운산을 뒤졌다. 그런데 생각보다 금광수는 찾기가 쉬웠다. 다름 아닌 황보세가에서 모은 낭인들 틈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제갈 무진 안 가시오?”

“사랑하는 님을 만났는데 가긴 어딜 가냐?”

“...........”

그 말 한마디에 옆에 있던 봉명공의 눈은 썩은 동태눈깔이 되어버렸다.

“먼저 가. 임마. 너는 가만히 보면 어느 시점부터 농담이란 게 안 통해.”

“중이잖소.”

“얘가 웃자고 했는데 죽자고 덤비네.”

봉명공과 혜성이 먼저 길을 서두르자 제갈 사혁은 멀리서 황보세가에 의해 고용된 낭인들과 금광수를 지켜봤다.

“청해까지 온 보람이 있게 해라.”

제갈 사혁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금광수라는 자와 관련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금광수는 백화문의 문도였다. 문파라고 하지만 정파연합인 무림맹에 가입도 하지 못한 소규모 문파로 솔직히 말이 좋아 문파지 이제 갓 도장 티를 벗어난 곳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광수는 백화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백화문은 최고의 문파였다. 하지만 무림에 출두한지 두 달 동안 금광수는 그저 그런 낭인에 불과했다.

정도 무림의 후기지수라는 명칭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만 허락된 이름이었고 그것은 마치 자식에서 자식에게 대물림 되는 것처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제자와 자제들에게만 허락됐다.

자신이 꿈꿔온 강호는 이런 게 아니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그렇게 스물 둘 금광수는 꿈을 접어야 했다. 하루하루 좀 더 싸게 밥을 먹고 좀 더 싸게 새벽이슬을 피할 수 있는 객잔을 찾으며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하게 된 일이 황보세가의 춘풍지회 물갈이였다. 금자 닷냥이면 나쁘지 않았다. 춘풍지회 예선에만 이름을 올려도 다섯 냥을 더 받을 수 있고 황보세가의 일원과 같은 조면 두 냥을 더 받는다.

“그럼 제 6조 시작하라.”

드디어 금광수의 차례였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쯔쯔쯔~ 다음!”

상대의 목검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금광수는 반 실신상태로 황보세가의 시종들에게 질질 끌려가 바위 옆에 비참하게 누워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너무 비참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러다 갑자기 수치심이 들어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걷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수치심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변덕스러운 여인의 마음처럼 화운산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비를 피하기 위해 급히 산을 빠져나오려다. 우연히 오두막을 발견했다.

주인이 있건 없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작정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금광수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아직 젖지 않은 나무를 베어 불을 지피고 오두막 안에서 젓은 윗옷을 벗고 대(大)자로 뻗어 누웠다.

“오늘은 운이 좋군.”

뜨끈한 방과 비를 피할 지붕이 있으니 황보세가의 물갈이에서 어이없게 패한 일도 어느새 기억 저편의 일이 되어버렸다.

“하아~ 한숨을 쉬면 어쩌리오. 그래도 내일의 해는 뜬다네.”

어느새 귀뚜라미가 우는 밤이 찾아오고 금광수가 쉬고 있는 오두막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의 행색을 보아하니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어느새 한 채의 오두막에 두 명의 사람이 마주하게 되고......

먼지가 낀 문풍지에는 붉은 피가 튀겼다.

“으아악~~~~~~”

붉은 피가 문풍지를 물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금광수의 비명소리였다.

“하아! 하아! 하아!”

우연히 오두막으로 다가오는 이의 기척을 느끼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칼부림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살인.

금광수는 서둘러 윗옷을 챙겨 입고 오두막을 빠져나오려 했다. 살인행위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영문도 모르고 사람을 죽인 적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마치 운명처럼 허겁지겁 도망치던 금광수의 발이 꼬이며 넘어지자 그 시선의 끝에 한 상자가 보였다.

그 상자는 이 오두막에 들어온 이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잠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금광수는 이왕 사람을 죽은 거 재물이나 빼앗아보자는 심정으로 상자에 손을 댔다.

상자에는 배극구검(排克九劍)이라 쓰인 책자 3권과 곱게 비단에 쌓여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배극구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한 금광수는 배극구검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는 순간 온몸에서 땀이 맺히고 두 눈에서 빛이 났다. 말로만 듣던 무림비급인 셈이다.

눈 대충으로 제 1권을 다 읽은 금광수는 눈물을 흘렸다.

“스승님.....”

비록 보잘 것 없는 문파지만 지금 이 순간 스승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턱 밑으로 떨어지자 눈물을 훔치며 비급과 함께 있던 다른 물건도 확인했다. 그것은 백년 하수오였다.

“작은 문파라 무시하고 멸시하던 오만한 명문정파를 언젠가 내 발아래에 두겠다! 하! 하! 하! 하! 하!”

니깟놈이 무슨 무림인이냐며 자신을 멸시했던 무림인들을 향한 분노와 희열이 섞인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이 순간 온 몸에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전율이 휘몰아쳤다. 드디어 삼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제 무림에 커다란 발자취를

“수고했다.”

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그것을 용인할 리 없었다.

“끄악!”

그 순간 피에 젖은 문풍지를 꿰뚫고 날아온 기공에 의해 영약을 쥔 금광수의 왼팔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걸레짝이 된 문풍지를 발로 걷어차고 나오는 이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오랜만이네? 신비검인(神祕劍人) 금광수.”

눈앞에 보이는 남자는 자신을 향해 영문도 알 수 없이 신비검인이라 불렀다.

“아~ 너는 날 잘 모르지? 그래도 같은 세대의 후기지수인데 서운하네.”

후기지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넌 참 좋은 놈이었는데..... 그건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하는 일마다 구파일방의 일에 간섭하고 대립하더라. 그래도 같은 정파라 대충 넘어가줬는데.”

왜 이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건가? 자신은 시골에서 올라온 삼류 검객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냐 소리를 치려는 그때였다.

제갈 사혁의 주먹에 금광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마교와의 전면전은 감히 네놈 따위가 방해해선 아니 되는 거였어.”

곤륜과 화산 사천당문의 무림맹 장로들이 날치기로 성사시킨 마교와의 전면전 선포가 3년간 지연된 것은 금광수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비검인 정도 후기지수 제 1 좌라 불리는 금광수가 말이다.

제갈 사혁 시대의 후기지수 중 가장 빠르게 치고 올라온 이는 다름 아닌 금광수였고 영향력도 상당했다. 혈혈단신임에도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속하지 않은 젊은이가 혼자만의 힘으로 무림맹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그를 동경하는 낭인들과 배경 없는 무림인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금광수는 무림맹에서 명문 정파의 발언권을 약하게 만드는 것에 집착했고 그것이 제갈 사혁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네 주제를 알아라. 버러지.”

3권의 배극구검 비급을 기를 이용해 먼지로 만들어버린 제갈 사혁은 비단에 쌓인 백년 하수오를 챙겼다. 배극구검은 훌륭한 검법이지만 이미 스물다섯 해 금광수와의 대결로 그를 꺾은 제갈 사혁에게 배극구검따윈 패배자의 검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를 탓하지 마라. 그 놈의 술이 원수니까.”

우연히 친목을 다질 겸 후기지수들이 술자리를 가질 때 술에 취한 금광수가 화운산에서 백년 하수오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술김의 한 소리였지만 당시 화운산에 영약을 찾으러 비밀리에 각 문파의 사람들이 파견됐다. 이미 금광수가 꿀꺽해버린 하수오가 발견될 리는 없었지만 제갈 사혁이 화운산으로 온 이유는 사실 금광수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도산진인 때처럼 때를 맞추지 못할 위험도 있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금광수가 말하길 배극구검은 은거기인에게 하사 받았다 하였다. 그는 항상 자랑처럼 언제 어느 때 검법을 배웠는지 후기지수들에게 떠들어 댔는데 제갈 사혁은 그 시일을 기억하고 정확히 그 시일에 맞춰 화운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청해에서 발견한 금광수는 무공도 하찮았으며 무엇보다 은거기인은커녕 고작 낭인 간의 별 볼일 없는 대전에서도 패하는 등 삼류에 불과했다. 때문에 이를 수상하게 여겨 금광수의 뒤를 따랐다. 화운산에서 은거기인을 만났다 했으니 그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은거기인은 금광수의 거짓이었으며 하수오를 취한 시기도 그가 말한 것과 달랐다. 배극구검은 하수오와 같은 시기에 손에 넣은 것이다.

벗겨보니 별거 없는 놈이 그 동안 정사대전을 방해하고 구파일방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사실에 제갈 사혁은 환멸을 느꼈다. 한 때마나 이놈과 함께 사외마도를 질타할 거라 생각했던 스물다섯 자신에게 말이다.

비급을 처리한 뒤 제갈 사혁은 오두막을 그대로 놔두고 나왔다. 죽은 두 놈의 시체 따위 알게 뭐냐는 식이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

기지개를 펴며 거친 산길을 귀신같이 오르는 제갈 사혁의 얼굴은 마음속에 응어리를 해결한 듯 편안해보였지만 타인이 보았을 때 공포를 느낄 만큼 이질적이었다.

제갈 사혁이 오두막을 떠나고 두 시진이 지났을 쯤 의문의 남자가 오두막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한 남자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호완(互換)이 불발됐군. 어서 막주에게 알려야 한다.”

그 말과 함께 오두막 위로 여섯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영약과 배극구검을 탈취하였다면 분명 언젠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오만한 제갈 사혁이 배극구검따위는 필요 없다며 재로 만들어버린 사실을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있었을지 모르는 금광수의 악연 좁아터진 강호에서 언젠가 마주하게 될 제갈 사혁의 악연이기도 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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