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4화 (34/262)

<-- 34 회: 제자. -->

제갈 사혁이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그 의견에 곤륜의 대사형도 동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소.”

그랬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창과 혜성의 어머니는 약혼을 한 사이였다. 그런데 약혼자가 과거를 보기 위해 떠난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파혼을 한다는 것은 세간의 질타를 받기 충분했다. 그래서 주창의 친우와 혜성의 어머니는 가난한 선비인 주창을 없애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곤륜은 그 사실을 덮었소.”

그 이유는 혜성의 어머니가 당시 곤륜파 장로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문파는 피로 연결해서는 아니 되는 법입니다. 화산파만 해도 사숙님들의 피붙이는 단 한명........”

“으흠!”

제갈 사혁이 혈족운영에 대해 언급하자 곤륜파의 대사형은 제갈 사혁에게 조금 눈치를 주었고 주제넘게 나섰다는 생각에 제갈 사혁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주창은 죽지 않았소. 혜성이 8살이 되던 날 선비 주창은 마교의 망지성이 되어 나타났소.”

친우와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무림고수가 되어 복수를 하고자 나타났다니 어째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이야기였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한때 친우였던 이와 사랑하는 이를 죽였소. 하지만 어린 혜성만은 차마 죽이지 못하였소.”

“아이를 살려두면 그 아이는 반드시 부모의 복수를 하려 할 텐데?”

“사실이오. 그 변고가 있던 날 어린 혜성을 곤륜파로 데려온 이가 바로 망지성이였소.”

그 자리에 놔두고 도망쳐도 시원찮을 판에 곤륜파에 데려다 줬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복수를 하라며 등 떠민 꼴이 아닌가?

“곤륜파는 어째서 나서지 않은 겁니까?”

30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결국 마교는 정파의 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교와 무력 항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혜성의 외조부가 되시는 사숙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고 곤륜으로서도 주창의 일은 차마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과거였소.”

과거의 치욕을 씻기 위해 항쟁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으니 오히려 곤륜파로서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셈이었다.

“1년에 단 한번 그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사매는 그때마다 그에게 검을 휘둘렀소. 몇 년 동안은 오직 그것을 위해 검을 휘두르며 정진했지만 최근엔....”

그러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헌책방에 분광검 비급을 팔아버린 사건은 결국.

“사문의 무공에 의심을 품었다는 말입니까?”

“부끄럽지만 그렇소.”

조그마한 중소방파의 경우 간혹 그 제자들이 사문의 무공으로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생각에 환멸을 느끼고 사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일이 빈번하다. 하지만 명문 정파의 제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다소 놀랍기도 하지만 그 점은 무림인으로서 제갈 사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흡정마공은 참으로 대단하지.)

과거 200여 년 전 정파와 마도뿐이던 무림에 사파가 생겨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속성으로 강해지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그야말로 사파.

“혜성은 곤륜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을 잃었고 오직 강해지기 위해 사파의 무공과 비슷한 습성의 무공을 익히려고도 했소. 하지만 사파의 사상은 정파에 있어서 독이나 마찬가지 결국 부작용으로 인해 실력이 퇴보하는 결과가 나왔소.”

사외마도와 정파의 대립은 무공에 관한 이론과 지식에서 오는 대립이 가장 크다.

(물론 몇 백 년이 흐른 지금은 무공에 관한 사상과 상관없이 그 스승에서 그 제자로 이어지는 적대감만 있을 뿐이지만.....)

지금 단순히 그들이 정파기 때문에 그들이 사파기 때문에 그들이 마도이기 때문에 싸운다. 나와 다른 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

제갈 사혁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내심 의문이 들었다.

훗날 십야성주가 된 망지성과 백호대주인 혜성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쩌면 모든 은원 관계가 그렇듯 아름답진 못하더라도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한편 혜성의 거처에 있던 봉명공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혜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자고 그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오?”

“그냥 화가 나서.”

올해라고 해서 달라진 것 없다. 그래서 망지성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분했다.

“주. 마교로 갈 생각이야?”

“글쎄올시다.”

“그 일은 마교에서 단독으로......”

봉명공은 혜성의 어께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혜성에게만 가르쳐주겠소.”

단 둘 뿐인 방안에서 봉명공의 입술이 진실을 읊자 혜성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사실이야?”

다시 한 번 되물었을 때 봉명공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내가 살아있지 않소.”

오랜 이야기가 끝을 맺자 혜성의 눈가에는 눈물이 흐를 듯 말 듯 맺혔다.

“다른 친우들은 알고 있어?”

“애석하게도 무원과 이제 그대뿐이오.”

무원과 봉명공 그리고 혜성은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우들이었다.

무원은 항상 어디론가 떠날 사람 같았고 봉명공은 일부러 웃음을 쫓는 듯 실없이 보이려했고 혜성은 늘 세상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했다. 각자 마음속에 한이 서려 있었기에 친해질 수 있었다.

“일단 흑사련에 몸을 두고 천천히 실마리를 잡을 생각이오.”

“흑사련은 멍청이가 아니야. 너를 봐. 중용하지도 그렇다고 감시를 하지도 않잖아. 넌 그냥 낭인이야.”

“난 흑사련의 신입을 얻고자 하는 것도 흑사련을 이용하려는 것도 아니오.”

봉명공은 이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봉명공. 가자.”

담장을 넘어온 제갈 사혁이 봉명공을 부르자 봉명공은 갓을 눌러 썼다.

“그보다 먼저 이리와 혜성에게 사과를 해야 하지 않소.”

“내가 왜?”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이오?”

“그래서 내가 잘못했냐?”

원래 좀 제멋대로 망나니 같은 말투였지만 오늘은 더 했다.

“됐어. 성치가 빠지지 않았으니 그냥 넘어 갈게.”

혜성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제갈 사혁은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봤냐? 저 녀석도 괜찮다고 하잖아. 니가 뭔데 사과를 하라 마라야.”

“제갈.....”

봉명공은 오늘 따라 이상하리만치 인하무인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제갈 사혁이 얄미워보였다.

“아. 곤륜 계집.”

“뭐냐. 화산망종.”

제갈 사혁은 낸데 없이 마당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곤륜은 선도의 뿌리다. 불도 소림. 선도 곤륜이다. 믿어라. 한낱 인간의 몸으로 바위를 가르고 산을 부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니 믿어라.”

“...............”

여태까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준 것은 틀림없이 곤륜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하지 않은가?

자리에서 일어난 혜성은 제갈 사혁의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

물론 살면서 수많은 벽이 있었다. 화산을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자신보다 뛰어난 자는 중원에 수두룩했다. 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금광수를 이기고 환골탈태를 이루며 짧은 생이지만 모든 고난을 이겨냈고 이겨낼 수 있게 해주었다.

“일생 단 한번도.”

화산의 무공이 천하제일임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혜성은 윗옷을 벗더니 갑자기 온몸에 감겨있는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봉명공이 서둘러 방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수련에 임할 것이니 귀찮게 하지 말고 썩 꺼져버려.”

문 밖에서 혜성에게서 축객령이 떨어지자 묘한 미소를 지은 제갈 사혁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봉명공.”

제갈 사혁은 봉명공과 마교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발걸음만 재촉할 뿐.

“그런데 제갈세가는 와룡선생께서 만드신 가문이 아니오?”

“설마 그 양반이 시조겠냐? 그 양반이 제일 출세해서 가장 유명한 것뿐이야. 그럼 조씨는 조조가 시조냐?”

“아니오?”

제갈 사혁은 정말 몰랐다는 듯 진지한 질문에 차마 평소처럼 “아냐! 새꺄!”라고 호쾌하게 말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안휘성(安徽省)에 도착하자마자 내뱉은 제갈 사혁의 첫 마디였다.

제갈 사혁이 안휘성에 오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늘 그렇듯 망화각으로부터 흑사련에 대한 정기보고를 받던 중 전서구에 쪽지 하나가 더 딸려온 것이 화근이었다.

-안휘성.

누군지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 필체로 보아 현 장문진인이신 태사숙조께서 보내신 것이 확실했다.

“아니 태사숙께서는 자신의 사손이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안휘로 가라 하신거야. 아니 뭐 청해에서 안휘가 무슨 경공하나면 순식간에 이동하는 거리도 아니고.....”

“꼬박 17일이나 걸렸소.”

17일간 쉬지도 않고 경공을 발휘해서 달린 끝에 도착한 안휘성. 제갈 사혁으로서는 이 빌어먹을 안휘성 따윈 평생 오고 싶지 않았다. 사실 지난 생애에서 죽을 때까지 안휘성엔 한번을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장문인의 명령이 있었기에 상황이 많이 다르다.

“배고프다. 안휘성 잡탕 요리 좀 먹어야겠다.”

“그러시오. 소승도 뱃가죽이 등에 붙었소.”

“사형.”

그때였다. 도복을 차려 입은 10대 후반 가량의 사내 둘이 제갈 사혁을 향해 걸어 온 것은

“무덕(無德). 무종(無宗)?”

“오랜만입니다. 무진 사형.”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예정에 없던 사제들과의 재회에 제갈 사혁은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태사숙께서 내가 안휘에 도착했는지 안했는지 알아오라 하더냐?”

“네. 그렇습니다. 사형.”

그리고 그 괴리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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