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5화 (35/262)

<-- 35 회: 제자. -->

“저희도 사정은 모르지만 일단 명받은 대로 수행할 따름이니까요.”

사제들이 발걸음을 돌리자 제갈 사혁은 두 사제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동네 개구쟁이 꼬마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놀아야지.”

“사형 저희는 바쁩니다.”

“매화각이니까요.”

사제들이 바쁜 척을 하자 제갈 사혁은 들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생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럼 나는 놈팽이냐? 사천에서 내 소문 들었지? 그거 내가 잡았어!”

“하지만 화운 룡은 놓치셨잖아요.”

“그 발정난 개새끼랑 연쇄부녀자 납치범이랑 같냐? 그 놈은 사천을 떠들썩하게 했다니까! 완전 극악무도에 잔악무도였어!”

패성각으로 지면을 박차며 시위하는 제갈 사혁의 모습에 두 사제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허리춤에서 돈 주머니를 꺼냈다.

“농담입니다. 사형. 어디 가실래요?”

“뱀주아닙니까. 역시 사나이라면.”

“이 멍청이들아. 안휘 개뼈다귀 동네에 뱀주 같은 고고한 술이 있을 리 없어.”

“과일주 어떠시오. 안휘의 과일주는 유명하오.”

어느새 봉명공까지 껴서 술판을 벌릴 판이었다. 안휘에서 제법 알아주는 객잔에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다른 종류의 술을 시켜서 대낮부터 술판을 벌렸다.

“캬! 죽인다~”

“화산파 제 1대 제자 무종! 지금부터 노래를 한 곡하겠습니다!”

“무종 잘 불러라!”

객잔에서 노래를 부르는 한편 한쪽에서는.....

“어머 오라버니 못 보던 사람이네? 어디 출신이야.”

“소승은 하남성 정주출신이오. 낭자.”

“이 오빠 말투 좀 봐! 꼭 스님 같아서 재미있다.”

양 옆으로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시는 봉명공이 절제된 몸짓과 부드러운 언행으로 기녀들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녹이고 있었고

“너 이 새끼 마음에 안 들어.”

급기야 그 꼴이 눈꼴사나웠던 제갈 사혁은 고량주 35년산이든 술병으로 봉명공의 머리를 후려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대낮부터 객잔 하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나서 나온 네 사람은 해가 저물어갈 때 쯤 미간을 찡그린 채 어슬렁어슬렁 객잔에서 기어 나왔다.

“역시 술은 낮술이 최고야. 낮술 먹고 나면 밤을 착실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밤을 착실하게 보내요?”

“사형 제발 참아주세요.”

활기찬 밤놀이를 즐기겠다는 제갈 사혁의 포부(?)에 두 사제는 기가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뭐야. 너희는 벌써 끝났냐? 젊은 놈들이.”

봉명공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꼴을 보며 제갈 사혁은 두 사제를 향해 손을 저었다.

“좋은 방 잡아서 눕히고 너희도 쉬어라. 난 혼자 밤 산책이나 즐기지 뭐.”

불법 도박장에 가서 마작이나 몇 판 두고 싶었던 제갈 사혁은 근방에 있을 법한 하오문의 위장 사업체를 찾기 위해 성도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

하지만 제갈 사혁은 곧장 지쳐 누군가 잠시 세워둔 수레 위에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역시 술은 요물이었다. 그토록 단련된 육신을 이리도 나약하게 만들다니...... 하지만 술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밤거리는 활기찼다. 오히려 낮보다 더 밝게 빛났다.

“이런 게 사람 사는 거지.”

곰방대 연기가 용의 꼬리를 형성할 때쯤 곰방대에 재를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연히 건장한 사내와 어깨를 부딪친 제갈 사혁은 그대로 다리가 꼬여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이 새끼가 미쳤나?”

하지만 사내는 이 시장바닥을 주름잡는 건달이었는지 떡밥을 문 물고기처럼 제갈 사혁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어찌나 그 힘이 세던지 쓰러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갈 사혁을 번쩍 들 정도였다.

“이 새퀴가 애비애미도 못 알아볼 정도로 술을 처먹었으면 마차를 불러서 집에 갈 것이지 어디서 술주정이야!”

그 후 제갈 사혁은 건달에게 평생 들어보지 못한 모든 욕을 다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쓰레기 더미 위였다. 기억이 끊겨 버린 것이다. 술 마신 다음날 찾아오는 상쾌한 숙취를 느끼며 제갈 사혁은 서둘러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금자만 털어갔나?”

다행히 돈 이외에 물건은 없어진 게 없었다.

“멍청한 놈. 그깟 금자보다 이게 보물인데 말이야.”

백년 하수오라고 하면 정말 대단한 영약이지만 흡정마공을 완전하게 익힌 제갈 사혁에게는 내공증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숙취에는 도움이 되려나?”

백년을 기다려야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영약을 고작 숙취해소를 위해 씹어 먹으려 하다니 다른 무림인들이 보았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일이었다.

백년 하수오를 한입 씹어 먹으려던 순간 갑자기 뱃속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토록 술을 퍼먹었으니 위가 멀쩡할 리 없었다.

“이건 나중에 먹고 일단 해장부터 할까?”

수중에 돈은 없지만 중화 곳곳에는 황금성이라는 곳이 있다. 중화요리 음식점 이름은 아니고 뇌물 문화가 만연한 중원에서 뇌물을 금은보화로 바꿔 돈세탁을 해주는 곳이다. 전당포 역할도 하니 신고 있는 가죽 신발이라도 팔면 해장정도는 할 수 있었다.

황금성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곧 장정들의 제지를 받았다. 워낙 일하는 업종이 구리다보니 일종의 절차였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폐쇄된 방으로 들어가자 곧 성격 깐깐할 것 같은 노인네가 따라 들어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니 이 말이 어찌 이리도 불량스럽게 느껴지던지 제갈 사혁은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사람처럼 실없이 웃었다.

“노인장 이 가죽 장화는 팔면 값이 얼마나 하겠소?”

자신이 신고 있는 장화를 벗어주자 노인은 이것저것을 꼼꼼히 따져보며 값을 먹이기 시작했다.

“장화의 상태는 좋으나. 유행이 지나간 물건이구려. 20냥 드리겠소.”

“이것은 작년 가을 한정 상품이오.”

“작년...... 유행이 지났지 않소.”

정말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인데 겨우 3할 되는 가격에 팔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배는 고프고 속은 쓰리고 일단 제갈 사혁은 그 돈을 받아서 황금성을 빼져 나왔다.

제갈 사혁이 찾아간 곳은 어느 작은 주점이었다. 가게가 너무 작아 밖에 식탁을 놓고 장사를 했는데 보기엔 별 볼일 없었지만 제갈 사혁이 찾은 주점 중 유일하게 마라탕을 16냥에 팔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손님은 제갈 사혁 밖에 없었다.

“주인장 여기 마라탕 한 그릇 좀 주시오.”

마라탕 한 그릇을 시키자 멸치 육수에 두부 청경채 연근과 미역 등을 넣어 고춧가루로 마무리한 보기에도 좀 빈약해 보이는 미라탕이 나왔다.

빈약해보여도 일단 허기진 배를 채워줄 마라탕을 한입 먹으려는 순간.

“............”

옆에서 웬 사내아이가 입을 떡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머.... 먹을래?”

정말 배도 고프고 해장이 필요한 제갈 사혁이지만 사제들과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를 보고서 쉬이 지나칠 수는 없었다.

“고맙습니다.”

사내아이의 행색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꼴이었지만 몸이 다부지고 근육이 제법 발달된 몸을 보아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개방 놈이냐?”

“개방은 아닌데요.”

개방은 아니라? 그럼 뭐 무림과 관련 있다는 말인가 싶었던 제갈 사혁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날렸다.

“개방이 아니라니까. 조금 낫네. 거지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너.”

제갈 사혁의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라탕을 먹던 사내아이는 먹다말고 남은 마라탕을 제갈 사혁에게 건네주었다.

“어쭈? 얻어먹는 주제에 양심은 있다 이거냐? 됐다. 이 쨔샤. 너 다 먹어라.”

마라탕을 다 먹은 사내아이는 제법 가정교육을 잘 받았는지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저는 충(忠)이라고 합니다.”

“몇살이냐?”

“올해 15살 되었습니다.”

“지학(志學)이면 생각보다 어리네. 좀 더 많을 줄 알았는데.”

제갈 사혁은 열여섯에서 일곱 정도로 봤기 때문에 조금 의외였다. 그나저나 이름이 충이라니 옷차림으로 보아 어느 집의 하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혹 괜찮으시면 아침을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거지 아니면 하인 쯤 되는 놈 밥이나 얻어먹어서 무얼 하겠냐만은 배고픈 주제에 먹을 가리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충의 안내를 받고 간 곳은 제법 으리으리한 장원 아니 처음에는 장원이라 생각했지만 이곳은 병사를 기르는 군장(軍場)이었다.

“충! 어디에 갔다 지금 왔느냐!”

충과 함께 장원으로 들어가자 중년 남자가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충을 불러 세웠다.

“가죽 구해오라고 한지가 언제인데 이제 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대수(大首) 어르신.”

대수라 불린 중년사내는 집사나 총관을 대신해 하인들의 지휘하는 책임자였다.

“이자는 누구냐?”

“오는 길에 마라탕을 얻어먹어서 대접을 해드릴까 해서 모셔왔습니다.”

대수는 제갈 사혁을 위 아래로 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사람 기분 나쁘게 손을 저었다.

“구해온 가죽이나 내놓고 가서 밥이나 먹거라.”

충의 안내로 간 곳은 하인들이 이용하는 식당이었고 제갈 사혁은 그곳에서 푸짐한 식사를 얻어먹었다. 역시 잘 사는 집은 머슴밥도 훌륭했다. 맛은 그저 그래도 반찬 수가 많아서 먹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저는 좀 씻고 오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 사혁은 숟가락으로 밥을 목이 막힐 정도로 크게 퍼 입에 넣고 국을 후르르 마셨다.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녹차 찌꺼기로 우려낸 물로 몸을 씻은 충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제갈 사혁이 있는 식당으로 내려왔다.

“저....”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

뜬금없이 마음에 안 든다니? 충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반면 제갈 사혁은 말끔하게 씻은 충을 보자 갑자기 봉명공이 떠올랐다. 날카롭고 차가워 보이는 제갈 사혁과 달리 꽃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봉명공 그런데 이 충이라는 사내아이가 바로 봉명공과 같은 부류(?)였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마음에 안 든다니 제갈 사혁 같은 사람을 겪어본 적 없는 충은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할지를 몰라 난감했다.

“충!”

그 순간 어떤 아낙이 충을 부르며 급하게 뛰어왔다.

“네. 아주머니.”

“아... 아가씨께서 찾으신다.”

“곧 가겠습니다. 그럼 저.....”

충이 제갈 사혁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제갈 사혁은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눈치를 주었고 충은 그 길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런데 총각은 누구요?”

“아?”

충을 데리러 온 아낙은 제갈 사혁을 위 아래로 보더니 이내 스스로 평가를 마쳤다.

“나 좀 따라오쇼.”

그녀에게 이끌려 간 곳은 식당 뒤편에 자리한 벌목장이었다. 아무래도 제갈 사혁을 이 장원의 하인으로 착각한 듯 했다.

“할 일 없으면 장작이라도 패던가 하시오.”

도끼 한 자루와 산처럼 쌓여 있는 장작을 보며 제갈 사혁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자니 나중에 자신과 함께 있던 충이라는 녀석이 나중에 곤란해 할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지.”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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