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회: 제자. -->
그 시각 아낙의 말대로 아가씨의 부름을 받은 충은 고용인들이 이용하는 처소로 향했다.
“소화(昭花) 아가씨. 충입니다.”
“들어 오거라.”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충은 조심스레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의 방답게 방 안에는 자수와 각종 장신구들로 가득했다. 충이 들어가자 아직 방년도 되지 않았을 법한 여인이 힘겹게 자수를 놓고 있었다.
바느질도 힘겨워 보이는 솜씨를 보아 방안에 있는 자수는 모두 그 여인의 솜씨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자수는 너무 힘들어. 어머니는 왜 이런 걸 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어.”
“춘풍지회가 끝나면 시집을 가시잖아요. 그때 쓰시려면 배우셔야죠. 소화 아가씨.”
충의 말에 소화라 불린 여인은 입을 쭉 내밀었다.
“충은 내가 시집간다니까. 좋아?”
“좋지 않을까요? 주인어른께서 정해준 낭군님이시잖아요. 분명 훌륭한 분일 거예요.”
그것이 충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그리고 그것을 소화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충은 소화에게 자수를 넘겨받은 후 능숙하게 동백꽃 한 송이를 새겨 넣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예사롭지 않던지 뭇 여인의 손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충의 솜씨는 언제 봐도 대단해.”
그렇게 두 사람은 말동무도 되어주고 자수도 가르쳐주며 우애를 나눴다.
“오늘 아침에 산을 내려오는데 이상한 분을 만났습니다.”
저택 밖으로 출입이 자유로운 충은 이따금씩 소화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만난 제갈 사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누군데?”
“글쎄요. 마라탕을 나눠주셨는데 알고 보니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산 귀중한 음식을 저에게 양보해주셨던 거였어요.”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못할 텐데.”
“그래서 말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점심이 될 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정원에서 차를 마실 생각인데 어때?”
“아가씨 아랫사람은 주인과 겸상할 수 없습니다.”
“뭐 어때? 하성댁 정원에 다과상을 준비해줘.”
각 지방에서 묘목을 가져와 심어놓은 정원은 개인이 이용하는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앉아.”
소화가 함께 앉을 것을 권했지만 충은 끝까지 겸상을 거부했다. 그러던 그때 정원으로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여기 있었구나.”
“황보 환(皇甫 煥)소협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죠?”
거구의 남자가 정원에 모습을 드러내자 소화의 고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무엇을 말이냐? 정혼자 된 자가 너를 보러 오는 것이 어찌 잘못되었단 말이냐?”
황보 환. 황보세가의 일원으로 원래 그의 아버지는 현 가주의 사촌동생에 불과하나 그 아들은 무공이 뛰어나 세가 내에서도 촉망 받는 이였다.
“정혼자라니요. 제게 혼인을 약속한 자는 없습니다. 저와 혼인하고 싶거든 춘풍지회에서 우승하여야 합니다.”
“우승은 당연히 나의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라.”
“누가 걱정을 한단 말입니까!”
소화가 식탁을 치며 화를 내자 황보 환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표정과 달리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미 각 지역별로 예선을 벌이고 있지만 명문 정파에서는 제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왜 그런 줄 아느냐? 이미 우승자로 내가 내정되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에서 각 가문과 문파에 춘풍지회 참전을 하지 말아달라 공문을 띄웠단 말이다! 사실상 이번 춘풍지회는 나를 위한 것이다!”
황보 환이 숨겨둔 진실을 말하자 소화는 더욱 더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남궁세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직계가 아닌 네가 가문에 어떤 존재일 것 같으냐? 너희 백부와 태상 가주인 할아버지가 너를 귀여워한다고는 하나 다음 남궁세가의 시대를 위해 방계는 언젠가 축출 당한다. 말해보아라! 너를 그리 귀여워한다면 어찌하여 상이 형님이 아닌 방계 중에 방계인 나를 춘풍지회에 내보낸단 말이냐!”
맞는 말이었다. 소화는 방계 그것도 남궁가의 딸이 낳은 자식이다. 그러니 정략결혼에 가장 먼저 이용당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소화를 가문에서 어여삐 여긴다면 황보세가의 소가주인 황보 상(皇甫 湘)이 그 결혼 대상자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렇다면 너보다 나이가 많은 너의 사촌 언니는 어째서 춘풍지회를 하지 않는 것이냐? 알겠느냐? 겉치레다. 이 모든 게!”
소화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자 보다 못한 충이 소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만 물러가주시지요. 아가씨께서....”
“노비 놈은 입 닥쳐라! 어디 상전의 언쟁에 끼어드는 것이냐!”
“무슨 짓입니까! 호위! 호위!”
황보 환의 주먹을 맞고 충이 나가떨어지자 소화는 서둘러 호위를 불렀다. 그러자 갓을 뒤집어 쓴 남자 하나가 정원에 나타나더니 황보 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물러나.”
“뭐냐 이 놈!”
고작 호위무사에 불과한 놈이 어께에 손을 올리자 그렇지 않아도 많이 흥분한 황보 환은 호위무사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려 했다. 그런데 어께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가자 그 순간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물러나.”
“이.... 이 놈.”
황보 환은 직감적으로 상대가 이미 자신을 제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상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을 뿐이지만 이미 육신은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소화가 방계라곤 하나 이곳은 남궁세가다. 자신 또한 방계이기에 일이 커지면 불리해질 수 있었다. 황보세가라면 언제든 자신을 축출해내리.....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떠나는 황보 환을 보며 소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쓰러진 충을 살폈다.
“손대지 마라.”
갓을 뒤집어 쓴 호위무사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
제갈 사혁의 소화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자 약간의 통증을 느낀 소화는 작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어찌된 일인지 정신을 차린 충이 호위무사의 손목을 잡았다.
“아가씨께 이 어찌 불충한 짓입니까.”
“충! 괜찮아?”
분명 내공이 스며든 주먹을 맞았는데 충은 의식이 있었다. 오히려 자리에서 일어나 소화에게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하니 참으로 놀라운 체력이 아닐 수 없었다.
“소인. 힘이 부족하여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아닙니다. 수하된 자 어찌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가 주군의 것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낳아주신 부모를 지키지 못한 죄와 같습니다.”
노비 주제에 군신관계를 논하다니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지.”
“네?”
호위무사가 충을 낚아채자 충은 호위무사에게 소리쳤다.
“예를 갖추십시오! 아가씨입니다.”
“멍청한! 나는 남궁세가의 노비도 하인도 아니다. 그러니 따라라.”
충을 향해 쓰고 있던 갓을 들쳐보이자 제갈 사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무림인이셨습니까?”
“잔말 말고 따라라. 내가권법을 맞았다.”
제갈 사혁이 충은 안아든 채 떠나려 하자 그때 소화가 제갈 사혁의 옷깃을 잡았다.
“저기.... 고맙습니다.”
“너와는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다.”
“네?”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제갈 사혁은 안개처럼 나타났다.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남궁세가의 저택에서 떨어진 뒷산으로 충을 데려간 제갈 사혁은 충의 몸을 살폈다.
분명 제갈 사혁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황보 놈이 내지른 주먹은 내가권법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충의 장기는 상하지 않고 갈빗대만 금이 간 정도였다.
별 볼일 없는 애새끼라 생각했는데 장사체질이었다.
“무림인이십니까?”
“아까부터 그 말만 하는 이유가 뭐냐.”
“무공을 배우면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황보세가의 쭉정이에게 당한 것이 분해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무공을 배우면 아가씨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무공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남궁세가 놈이 무공도 안 배웠더냐?”
남궁세가의 노비라고는 하나 무공을 배울 자질이 된다면 무공을 배워 가문의 무사가 될 수 있었다. 제갈 사혁이 본 충은 충분히 자질이 있었고 열다섯이면 기초를 다지는 게 늦었다하더라도 노력과 재능이 뛰어나면 배움에 있어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는 다른 하인들과 다릅니다.”
“노비가 노비지 무엇이 다르냐?”
남의 과거사에 관심이 있을 리 없으나 자연스레 듣게 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충의 증조할아버지는 남궁세가의 가신이었지만 후계자 싸움에 가담해 역모를 꾸민 것이다. 그 결과 대대손손 남궁세가의 노비가 된 것인데.....
“역적이라고 하나 그것이 황실을 향하지 않는 한 일반적인 역모는 3대 이상 가지 않는 법이다.”
고작 집안일 뿐 황실이 아니다. 말이 좋아 역모지 대역죄가 아니다. 고작 집안싸움이다. 그런데 어찌 3대를 넘기는 악순환을 이어간단 말인가? 이 아이에게....... 어째서 이 아이의 미래를 막는단 말인가?
남궁세가. 이미 외가니 뭐니 하는 생각 따윈 없었다.
“무공은 쉬운 게 아니다.”
제갈 사혁은 기공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 쾌권을 휘둘렀다.
“이런 주먹을 날리기 위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저기 그런데 왜 손목은 비트셨어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니까. 주먹을 뻗을 때 왜 주먹을 살짝 비트셨어요? 주먹이란 건 그냥 뻗으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먹을 뻗는 순간 주먹을 아주 살짝 비틀어 2차 충격을 가하는 그 간결한 움직임을 눈으로 봤단 말인가?
무공은 둘째 치고 돌쇠마냥 무식하게 짐이나 나르면서 힘을 기른 노비 놈이 그걸 눈으로 보다니 심상치 않은 재능이었다.
“이건 어떠냐?”
일권 복호의 일권을 보여주자 이번에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아니요. 협객님이 주먹을 뻗기 전에 몸 전체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보여서요. 그런데 그 아지랑이가 팔을 향해 나가더니 주먹 끝에서 폭발했어요.”
기감을. 나아가 아주 정확하게 기가 퍼져나가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동체시력도 좋고 기감을 볼 줄 아는 사내아이라? 별 볼일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러니까 다른 남궁세가의 무사들 것도 보이더냐?”
“아뇨. 저도 협객님 것만 보이는데요.”
다른 사람 것이 아닌 제갈 사혁의 기감만을 느낀다?
제갈 사혁이 다른 무림인들과 다른 점은
“그래. 그건가?”
그렇다면 이 아이는 제갈 사혁이 가진 아주 정순한 내공을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
그때 문뜩 제갈 사혁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나이와 지난 생의 나이를 합치면 충분히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그래 이놈이다. 바로 네놈이야!
“무공 배워 볼 생각 없냐?”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보통 무공을 배워보길 권한다면 당황하거나 반기거나 둘 중 하나인데 반해 충의 반응은 마치 부모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아이의 표정이었다.
“남궁세가 때문이냐?”
“..............”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 보아하니 남궁세가는 확실히 충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생각한 제갈 사혁은 방법을 바꿨다.
“황보세가의 애송이에게 맞은 게 분하지도 않느냐? 어떠냐? 무공을 배우겠다면 황보세가 떨거지의 사지..... 아니 콧대를 꺾을 수 있게 해주마.”
사지를 찢어버릴 수 있다는 말을 하려다 제갈 사혁은 충의 성격을 생각해 급히 말을 바꿨다. 제갈 사혁 나름의 설득방법인 셈이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