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37화 (37/262)

<-- 37 회: 제자. -->

“하오면 아가씨를 지킬 수 있습니까?”

그때 한순간이지만 충의 말투는 더 이상 아이의 말투가 아니었다.

“!”

아가씨라는 말에 제갈 사혁의 미간이 심하게 찡그려졌다. 하지만 망종처럼 화를 냈다간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었다.

“왜 그 아이냐? 혹 그 아이를 마음에 두었느냐?”

지난 생애에서 제갈 사혁의 동생이었던 소화는 황보세가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갈이 아닌 남궁을 택한 아이이기에 인연이 없다하여 만나지 않았다.

제갈 사혁에게는 어머니 다음으로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갈 사혁 자신이 택한 아이가 그 아이와 인연이 닿아 있었다.

“제 주제에 어떻게 아가씨를 마음에 두겠어요. 하지만 아가씨를 곁에서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아주 작은 소망.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갖게 된 단 하나의 소원.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일평생 처음으로 원하는 그 무언가가 어떻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일 수 있는 걸까?

제갈 사혁은 절대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황보세가로 가시더라도 제가 아가씨를 따라가 아가씨를 보필 할 수 있으면....”

하지만 그것이 진정 원하는 그 무언가라면 이용해주겠다. 그게 연심(戀心)이든 충심(衷心)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이 아이를 꼭 제자로 만들고 싶었다.

“황보세가 따윈 갈 필요도 없다.”

“네?”

“아느냐? 춘풍지회의 풍은 바람이 아니라 풍년을 뜻한다. 데릴사위를 얻어 가문의 힘을 키우겠다는 남궁의 야망이지. 결코 젊은 남녀의 연심과는 무관하다 이 말이다.”

제갈 사혁은 충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도와주겠다.”

“아. 사형!”

“6번대 대장 박몽(博夢)이하 6번대. 소가주를 뵈옵니다.”

봉명공과 사제들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향하자 무풍대가 제갈 사혁을 맞이했다. 6번대면 가주 이하 가족들의 신변을 담당하는 주요 병력이었다. 그 말은 즉

“오라버니~”

뜬금없이 무풍대가 등장한 것처럼 혜아도 뜬금없이 나타나 제갈 사혁에게 안겼다.

“여기 계셨군요. 역시 화산파에 부탁드리길 잘했어요.”

“무슨 말이냐?”

“제가 화산파에 찾아가 부탁을 드렸거든요. 오라버니를 안휘성으로 좀 오게 해달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장문사백의 전서 그리고 그 뜻 이제야 모든 게 정확해졌다.

“혜... 혜아 아가씨를 뵙습니다!”

그때 충이 서둘러 무릎을 꿇자 혜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충을 보았다.

“충. 네가 왜 여기에?”

“소화라고 하더냐?”

그때였다. 제갈 사혁의 입에서 소화의 이름이 나온 것은

“만나보셨어요?”

무얼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아의 표정은 참으로 밝았다.

“별로.....”

무심한 그 한마디에 혜아는 천천히 제갈 사혁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무표정한 얼굴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작게 오므린 입으로 자신 나름의 시위를 했다.

“소화도 오라버니를 많이 보고 싶어 해요. 그리고 숙모님도.”

“남궁이 어째서 내 누이며 어찌 그 사람이 네 숙모란 말이냐?”

“오라버니! 다 큰 어른이 애처럼 그럴 거예요.”

“그러는 사람도 있다. 그리움을 품기보다 원망을 품는 그런 사람도 있다.”

이번에는 어린 아이가 아닌 성인의 눈으로 어미의 마지막을 보았고 그것은 다시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거라.”

혜아에게 시선을 거둔 제갈 사혁은 무종에게 눈치를 주었다. 봉명공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해장한다면서 해장술을 마셨는데 그게..... 고량주지 뭡니까. 지금 술 때문에 완전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 입니다.”

“그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장담하건데 해장술이란 건 애주가들의 개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량주로 해장이라니 단전이 박살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아~ 그리고 너희 둘 이 녀석한테 기초 좀 가르쳐라.”

제갈 사혁이 충을 가리키며 말하자 두 사제는 어리둥절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제갈 사혁의 두 사제는 생전 배우기만 했지 누굴 제대로 가르쳐보지는 않은 탓이었다.

“못 가르치는 데요.”

“뭐야?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우리.”

“니들은 사숙(師叔)이란 놈들이 사질(師姪) 앞에서 쪽팔리게.”

사숙과 사질이란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두 사제는 이내 말뜻을 깨닫고 입을 딱 벌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충은 자신들과 두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제자에요. 충이?”

그건 혜아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제갈 사혁의 나이 때 제자를 두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 나이 때는 자신의 성취를 이루기도 급급한 때에 제자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니들 두 놈한테 뭘 맡기겠어. 그래도 무덕은 조금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제갈 사혁이 신경질 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어이 없어하자 두 사제는 얼굴을 붉혔다.

“저기..... 협객님은 문파에 소속된 분이세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했네.”

우스운 일이었다. 제자 삼겠다고 데려온 놈에게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다니

“화산파 제 1대 제자 무진이다. 제갈 사혁. 스승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둬라.”

“제... 갈 사혁이면 아가씨의.....”

“배워 보겠냐했고 가르쳐 달라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상냥하게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이 두 사제를 쳐다보자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두 사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춘풍지회까지는 앞으로 두 달 남았다. 여름이 다가기 전에 고작 열다섯 살짜리 애송이를 짧은 시간에 어떻게 가르치냐는 꽤나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마침 있지 않은가? 그 답이.

“6번대.”

“네! 소가주님.”

“무풍대 가르칠 때 하는 그게 뭐지? 대장들 가르칠 때 말이야.”

무풍대의 대장들을 가르칠 때라는 말에 박몽은 말하기를 조금 꺼려했다. 그 방법이란 참으로 괴상망측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패서 근육과 뼈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뒤 뼈와 근육이 붙으면 그걸 또 반복합니다. 저는 한 일곱 번 했고 정확히 일곱 달 걸렸습니다.”

뼈와 근육이란 게 부러지거나 찢어진 후 다시 붙을 때는 더욱 더 강해진다. 때문에 무풍대는 이 지옥 같은 수련을 반드시 대장 후보들에게만 시행한다.

“시켜.”

“하지만 뼈와 근육을 이틀 만에 치유시키려면 엄청난 양의 영약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영약의 기운을 잘 인도할 내공의 고수도.”

영양이라는 말에 눈썹을 좌우로 꿈틀거린 제갈 사혁은 자신의 사제인 무덕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무덕은 재빨리 객잔으로 돌아가 제갈 사혁의 짐을 가져왔다.

“풀어 봐.”

무덕이 짐을 풀자 제갈 사혁의 짐 꾸러미에서는 엄청난 양의 영약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를 본 무종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종이 하는 일은 문파 내에 약을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형. 아무리 사형의 친가가 제갈세가라지만 이정도 영약은 돈보다 시간이 문제입니다. 사형계서 출타하신 그 짧은 시간에 이 모두를 구하기엔......”

“사천에 그 망할 놈은 영약도 많더라.”

사천이라는 말에 무종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내밀었다. 세간에 알려지기를 단순히 변태성욕자 알려진 사천의 괴인이 이러한 영약을 모았다는 것은 제갈 사혁이 죽인 그 사천의 괴인이 평범한 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었습니까?”

“죽은 놈은 말이 없는 법이다. 무종 넌 그게 문제야.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영약을 살피던 무풍대장 박몽은 영약의 종류가 외공증진보다는 내공증진에 더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외공증진에 도움이 된다면 더 수월했을 겁니다. 소가주님. 내공에 탁월한 약은 몸을 완치시킬 때 그 기운이 모두 소진되고 맙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내공영약은 몸의 치료를 다해주면 끝입니다. 복용한 이의 내공 수준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약 본연의 일을 끝내면 그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외공영약은 다르죠. 치유가 끝나면 몸을 더 강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건 전부 내공영양이니....”

영약이면 영약이지 내공을 올려주는 것 따로 외공을 올려주는 것 따로라니

“이래서 약쟁이들은 문제야.”

이 영약들은 모두 흡정마공인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다. 흡정마공을 익히면 혈관이 보다 질기고 강해져야 하기 때문에 내공보다 외공이 치중해야 하는데 내공을 쌓아주는 영약이라니

(하긴 그 놈도 이 영약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한 건 아닐 테니 종류 같은 걸 따지진 않았겠지.)

제갈 사혁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멀뚱멀뚱 서 있는 충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충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프면 말해라.”

“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주먹이 충의 복부를 강타했고 충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제갈 사혁의 얼굴에 튀겼다.

“아참..... 깜빡했네. 너무 아파서 말을 못한다는 걸 말이야. 그럼 그냥 계속 해야지 뭐 별 수 있어? 안 그래?”

안 그래? 라며 순진한 표정을 짓는 제갈 사혁을 보자니 두 사제는 정말 사형을 존경하지만 오늘 만큼은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이미 충은 생사를 오고갈 정도의 충격에 정신을 잃었지만 제갈 사혁의 무자비한 구타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겉보기엔 돌팔이 같지만 제갈세가에서 공인된 수련법이 시작 되었다.

몸을 빠른 시일 안에 강하게 단련시키는 방법이지만 그 고통은 엄청났다. 하지만 충은 어찌된 일인지 지난 2주 동안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묵묵하게 수련에 임했다.

총 여덟 번의 부상과 치료를 거쳐 드디어 단단한 몸을 가지게 되자 제갈 사혁은 슬슬 기감을 느끼게 하는데 그 전력을 쏟았다. 단전을 구축하지 않고 기를 느끼게 하는 방식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달리기를 가르치는 꼴이었지만 제갈 사혁의 생각은 달랐다.

“기가 느껴지느냐?”

“네.”

“일주천(一周天) 해보거라.”

단전에 기를 모우지 않고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를 무작정 온몸에 퍼트리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 사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론을 타인에게 검증 받기 위해서다. 제갈 사혁의 목적은 충의 몸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기를 전신에 퍼트려 혈맥을 이용해 쉬지 않고 순환시키며 몸에 탁기가 쌓이는 걸 막고 나아가 단전을 사용하지 않고 기를 활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졌을 때 단순 호흡으로 기를 섭취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며 나아가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내공심법이!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은 무림인에게 있어서 공통된 약점이다. 무림인의 몸이 가장 약해 질 때이며 심하면 불어오는 바람에도 깜짝 놀라 주화입마에 빠지곤 한다.

“단전에 내공이 없으면 무림인은 응당 내공심법으로 단전을 채워 넣는다. 하지만 우리 몸의 혈관은 단전보다 크고 넓다. 그렇다고 해서 단전을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아니다. 분명 내공을 운용하는데 있어서는 단전 최고라 할 수 있다.”

제갈 사혁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도 충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무공에 대해 전혀 몰랐던 충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설사 소귀에 경읽기라도 지금은 읽어주어야 했다.

그로부터 수일이 지난 후에나 몸속에 있는 기를 혈액순환 하듯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의식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면 그것은 익히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

아기 때부터 자아를 가지고 아기 때만 느낄 수 있는 아기만의 감각을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고 그 감각을 이용해 기를 순환시키고 육체의 모든 것을 조절해 끝에 가서는 몸에 난 상처마저 자유자재로 없애는 제갈 사혁과 달리 충은 그 감각을 익히는 것에 커다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잘보고 해봐.”

제갈 사혁이 평상시처럼 기를 순환 시키자 혈관을 타고 전신에 흐르는 기를 감지한 충은 제갈 사혁이 한 것처럼 하려 했지만 좀처럼 그것이 쉽지 않았다.

“사부. 안 되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호칭도 편해졌지만 수련에는 진전이 없었다. 재능 이전의 문제라서 충을 꾸짖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기의 순환을 볼 수 있기에 나와 같은 몸을 만들어줄 수 있다 생각했는데 역시 무리인가? 나와 녀석의 비슷한 점은 분명 탁기가 없는 정순한 내공에 대한 반응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인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남은 시간까지 초식을 익히고 그것을 몸에 체화 시키려면 정말 빠듯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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