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43화 (43/262)

<-- 43 회: 제자. -->

“잘 살았죠.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알~”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하자 남궁 연철이 제갈 사혁을 꾸짖었다.

“그게 무슨 말투냐! 네 어미의 일이다.”

“어린 저를 두고 매정하게 떠나셨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그렇지 않다. 우리는.....”

“네! 남궁세가에서 함께 와 달라 했을 뿐이지 정작 어머니는 말도 없이 떠나셨습니다. 한번은 물어봤어야죠. 한번은..... 설사 제가 가지 말라고 애원했어도 그 분은 가셨을 겁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갈 사혁과 눈이 마주친 남궁 이화는 철없던 시절의 자신이 행한 잘못된 선택이 아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딸의 모습을 본 남궁 백은 단호히 말했다.

“좋다. 단 네가 며칠 동안 외가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오자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며칠? 며칠이 아니라 하루도 있기가 싫은 곳에 며칠이나 있으라니

“그는 불가 합니다.”

“너는 며칠 묵을 뿐이고 소화는 이 일이 끝나면 남궁세가를 떠난다.”

남궁 백은 자신이 손해 보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제갈 사혁에게 인식 시켜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제갈 사혁도 질 수 없었다.

“제 처신은 제갈세가에서 정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냐?”

“소가주는 아직 어린 제갈세가의 장자를 위해 잠시 맡아두고 있는 직책일 뿐 저는.”

제갈 사혁이 고개를 까닥 거리자 저 멀리서 무덕과 무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유치하게 설마...)

(우리 보고 지금...)

아무래도 그것이 ‘그것’인 듯 보였던 두 사람은 관중석을 박차고 나와 제갈 사혁의 앞에 당도했다.

“이분은 화산파 제 1대 제자 무진 사형이십니다.”

(이런 건 자기 입으로 말하라고!)

“이분의 신변은 화산파에서 책임질 일! 사소한 것 하나 하나 화산파를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래! 자기 입으로 말하라고!)

화산파의 무진. 사천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을 단번에(?) 해결하고 낭인 칠망검을 쓰러트렸다는 떠오르는 젊은 강호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산파의 무진이라는 강호인이 유명한 이유는 차기 화산파의 장문진인이 될 도호진인의 제자기 때문이다.

이미 대제자 무원의 이름이 강호에 유명세를 떨치는 이때 또 다시 나타난 화산파의 기린아.

“화산파란 말이냐? 네가?”

“그렇습니다.”

오대세가의 사람이 구파일방의 일원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속가제자라면 또 모를까? 진산제자라니 그것도 항렬 최고배분 중 한 자리인 그곳에 굳이 오를 필요 없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이로서 허락은 화산........”

“허락은 받았어요!”

그때였다. 혜아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관중석에서 소리친 것은

“뭐?”

“자.... 장문진인께서 허락하셨어요. 오라버니의 신변에 대한 처우는 아니지만 장문진인께서 말씀하셨어요. 부모자식 간은 천륜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러니 오라버니 이대로 남궁세가에 며칠 묵어주세요.”

방금 꾸며낸 거짓말이 확실했다. 혜아 이 아이가 어떻게 지금 상황을 예측해서 장문진인께 그런 말을 얻어 올 수 있을까? 아마도 거짓말일 게 분명했다.

“역시 네 짓이구나. 백부의 서신까지.”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말하며 비에 젖은 고양이처럼 처량한 눈으로 바라보자 제갈 사혁은 차마 큰소리 칠 수가 없었다.

“평생의 소원이에요. 제발 숙모님과 만나주세요.”

평생의 소원이 고작 그것이라니....... 제갈 사혁은 혜아를 안아주었다.

“겨우 그런 게 평생의 소원이면 어쩌자는 거냐.”

마지막에 결국 혜아에게 져주기로 했다. 남궁세가의 조건에 져주는 것보다 혜아에게 져주는 것이 체면치레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남궁세가로 들어온 제갈 사혁 일행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 남궁세가의 가장 큰 저택에 본가 일원들과 식사를 했다.

“그래. 칠망검을 이겼다. 들었다.”

묵묵히 식사를 하기만 하는 자리에서 사촌형인 남궁 선중이 침묵을 깼다.

“칠망검 선배와는 우연히 마주쳤을 뿐 목숨을 담보로 대작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단하구나. 칠망검이 비록 흑도섬에게 졌다지만 여전히 낭인 중 최고라 불린다.”

남궁세가가 어떠하든 간에 남궁 선중은 젊은이여서인지 제갈 사혁과 말이 통했다.

“충은 어떠더냐. 엄청난 외공을 익히게 했더구나.”

“백년 하수오 정도 먹였으니 그 정도도 되어야죠.”

“!”

백년 하수오 같은 귀한 영물을 충에게 양보했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직접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엄청난 동요가 있었다.

“충은 데려갈 셈이냐?”

“스승과 제자 아닙니까.”

남궁세가에서 충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화산파에서 분명 들고 일어날 게 뻔했다.

가문 내에서 충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는 없다. 오직 태상 가주인 남궁 백이 역적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두고 있을 뿐 때문에 남궁 선중은 제갈 사혁에게 사제관계에 대한 확답을 다시 한 번 더 받아냄으로서 할아버지에게 충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녀석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싫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충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군요.”

“원래 이름은 따로 있다 들었다. 충은 집안에서 그리 불렀을 뿐.”

남궁 선중은 애써 할아버지가 지어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원래 이름은 뭡니까?”

“그 아이의 이름은......”

원래 이름이 있다면 원래 이름을 돌려주는 것이 옳았다.

“이것 좀 먹어 보거라.”

제갈 사혁의 눈치를 보듯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발라주는 남궁 이화를 보며 제갈 사혁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혜아가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생선 못 드시잖아요. 지금 숙모님이 주셨다고 드신 거예요?”

제갈 사혁과 혜아는 정말 어렸을 때 함께 살았을 뿐이다.

생선을 잘 못 먹었던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일이고 하지만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혜아를 보며 새삼 집념이란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생선을 못 먹는 오라비를 연기하기로 했다.

“쓸 때 없는 소리.”

그나저나 일행 모두가 모인 이 자리에 봉명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덕.”

“말씀하십시오. 사형.”

“녀석은 어디에?”

“인공 형님은 무풍대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궁 선중은 봉명공과 동년배였다. 그렇다는 것은 곧.

(그 되다만 사파신분 때문에 어지간히 고생이군.)

흑사련인지 정파인지 어중간한 노릇을 하는 봉명공. 그리고 지난 날 망지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봉명공의 과거.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언제 한번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다.

그 후에는 남궁세가의 사람들과 가벼운 담소만 나눴을 뿐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딱히 외가에 와서 좋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은 전혀 없었다.

밤이 되자 제갈 사혁은 충의 거처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소화와 마주쳤다.

“아! 저.....”

소화는 급히 충의 뺨에 올린 손을 거두고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제갈 사혁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소화를 쳐다봤다.

“그 아이를 좋아 하느냐?”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아마 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녀석은 너를 위해 춘풍지회에 참가했을 거다.”

그릴 리 없었다. 그럴 리 없을 테지만 제갈 사혁은 거짓말을 했다.

“재수가 없다면 죽었을 테지..... 살아도 주제 파악도 못하는 노비 주제에 춘풍지회에 참가했다고 비난 받았을 테지.”

소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이제 이 아이를 마음에 품어서도 입에 올려서도 아니 된다.”

입을 꼭 다문 소화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표하지 않았지만 제갈 사혁을 원망하는 그 눈빛과 몸짓만은 숨길 수 없었다.

“기억하느냐? 그때 황보 놈의 앞에서 그 아이를 구해준 것이 나로 나다.”

남궁세가의 호위무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남궁. 너와는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 말했다.

“얼마나 더 무모해질 것 같으냐?”

그 말뜻을 이해한 순간 소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연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다. 널 좋아하냐 물었을 때 그 마음을 타인에게 어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다. 그런 아이가 얼마나 더 무모해질 것 같으냐? 너는 또 얼마나 이 아이를 곤경에 빠트릴 테냐?”

제갈 사혁은 냉정하리만치 딱 끊었다.

“기억해 두어라. 이 아이가 너를 선택한다면 이 아이는 너의 곁에서 평생을 지낼 것이다. 하지만 나와 떠난다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자유로워진다. 그토록 동경하던 그 말이 오늘 만큼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을 도려냈다.

“이 아이를 위해서 나는 이 아이를 너와 맺어줄 수 없다.”

혜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늘 궁금했다. 오라버니는 어떤 사람인지. 그때마다 혜아는 말했다. 다정한 사람이라고 너무 다정해서 평생 어리광부려도 될 것 같은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다정함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미 그 다정함이 향하는 곳은 다른 곳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소화가 힘겹게 고개를 숙이자 제갈 사혁은 품에서 부채를 꺼냈다.

“받아라.”

“..........”

“아버지 유품이다.”

아버지의 유품이라는 말에 소화의 눈동자가 떨렸다.

소화는 말없이 부채를 받아들고 충의 처소에서 나갔다. 아마 자신의 방에서 밤새 눈물 흘리리.....

“후~”

곰방대를 꺼내 쑥을 태우며 제갈 사혁은 쑥 향으로 방안을 가득 채우며 인상을 구겼다.

“소녀의 사랑은 이렇게 저무는 구나.”

동생이다. 그래도 동생이다. 그런데 그 마음을 꺾어버리고는 위로랍시고 아버지의 유품이라며 시답잖은 거짓말을 하다니.......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황보세가로 시집 가버릴 동생이다. 황보세가로 가지 않는 대신 충을 포기한다면 그걸로 됐지 않은가?

자고 있는 충의 얼굴을 보니 자신에게 잔소리라도 할 것만 같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뭐 잘못 했냐?”

오늘 따라 모기가 유난히 많은 밤이었다.

새벽이 되어서 충은 정신을 차렸다.

의식하지 않고도 일주천를 행할 수 있기에 폭류신공으로 인해 생긴 내상도 하루면 다 회복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며 점점 제갈 사혁의 육체와 동일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일어났냐?”

“사부.”

“잠시 산책 좀 하자?”

처소에 나와 새벽길을 산책하는 두 사람 특히 충은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아이 같았던 느낌이 싹 사라졌다. 어느새 열다섯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모르겠다.”

“네?”

불연 듯 제갈 사혁은 말했다.

“모르겠다고. 재능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닌데.”

단순히 자신과 같이 정순한 내공을 읽는다는 것 빼고는 어디 유별난 구석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에게 백년 하수오도 양도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주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쩌면 이래저래 지난 생애 등 합해 40년 가까이 인생을 살다보니 불연 듯 부성애(父性愛)라도 생긴 걸지도 모른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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