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회: 불의를 보고 참는 건 중화 10대 덕목이다. -->
“충.”
“네 사부.”
“너는 충 따위가 아니다. 너는 앞으로 이신(離身)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신.”
남궁 선중에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신(離身). 원래는 이신(李身)이다. 일찍이 강호를 유람하며 수많은 영웅담으로 유명한 자다. 쾌검의 고수로 사파 무림인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으며 그의 나이 이제 고작 약관에 불과하다.
특성이니 뭐니 다 필요 없었다. 충 아니 이신은 권사가 아닌 검사였던 셈이다.
(알게 뭐냐!)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안목을 인정하기 싫었던 제갈 사혁은 이신에게 끝까지 권법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이 되자 놀랍게도 제갈 사혁은 먼저 소화의 방을 찾았다.
제갈 사혁이 자신을 찾아올지 몰랐던 소화는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어제 너무 직설적이었나 싶었지만 어차피 사실이 사실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냐며 자기 합리화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냐?”
“네?”
“제갈세가로 가겠냐? 이 말이다.”
제갈세가라는 말에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이 아이는 남궁세가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남궁세가에 남는다면 남궁세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보거라. 지금 네가 입는 옷 네가 사용하는 장신구와 음식 등을 네 손으로 해결해 보거라. 길은 얼마든지 있다. 네 뒤에는 세가가 있고 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일이든 할 수 있다.”
“..................”
시대. 남아중심 사상이 가득한 이 시대에서 명문가의 여인이란 냉정하게 말해 혼인을 하지 않으면 그저 소비만 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소비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느낌으로 정량 결혼에 희생되는 것이다. 하지만 혈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가에서 여인도 세가를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면 외면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여인의 유일한 불행이며 동시에 유일한 축복이었다.
“소가주는 무능한 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방계축출을 하는 것은 네가 여아기 때문이고 여식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아비가 남궁이 아니기 때문에 소화는 방계 중에는 가장 먼저 축출 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너의 혼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제갈세가에서 너의 의견대로 행할 셈이다. 다만 남궁으로 남고 싶다면 남궁에 도움 되는 일을 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그때 소화는 제갈 사혁의 팔을 붙잡았다.
“저....”
말을 떼지 못하는 아이를 보니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 훗! 그래 걱정하는 마음에서 해주는 잔소리라 해두자.”
아직 자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이 아이나 별다른 혈육의 정을 못 느끼는 자신이나 어차피 똑같았다. 하지만 걱정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사이였다.
남궁세가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매일 매일 옆에 혜아가 붙어 다니는 관계로 억지로 어머니를 만나야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오라버니 왜 숙모님 앞에서는 한마디도 안하세요.”
“그럼 뭐 십자수가 어떻고? 향수가 어떻고? 하는 말에 끼어들어야 한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만.”
입을 쭉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는 혜아를 보며 제갈 사혁은 한숨을 내쉬며 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이구~ 알았다. 다음엔 뭐 어떻게든 껴보마.”
“헤헤~”
혜아가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자면 걱정 근심이 싹 사라지 것 같았다. 이래서 여자는 요물이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나가자꾸나. 좋은 옷을 한 벌 사주마.”
“그럼 소화도 같이 가요. 오라버니.”
“이신도 데려갈 생각이다. 그러니 불가.”
충 아니 이신을 소화에게 떼어놓으려는 제갈 사혁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혜아기 때문에 소화와는 데려가자며 끝까지 떼를 쓸 수는 없었다.
“사부 그런데 여긴 왜?”
제갈 사혁이 온 곳은 저자거리 내에서도 고급 명품관이었다.
“혜아의 옷을 사는 겸해서 네 녀석 옷이나 사볼까해서 왔다.”
“제... 제 옷을요?”
이신은 옷을 사준다는 말에 깜짝 놀랐고 제갈 사혁은 그런 이신을 보며 웃었다.
“나와 강호행을 떠나려면 그 옷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갈 사혁이 돈이 썩어나거나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비싼 옷을 입는 건 아니다. 중원에서는 어디에서 밥을 먹느냐가 곧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고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자신을 대하는 타인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인장. 이 아이에게 어울리는 옷으로 부탁하겠네.”
“아이고~ 공자님의 얼굴을 보니 옷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주인장이 직접 골라준 옷은 명품관 내에서도 가장 비싼 옷이었다.
“이 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름 신상품으로서 황궁 재단 장인이 한땀 한땀 수놓아 만든 도포입니다.”
“괜찮군.”
이신에게 흰색 도포를 입히자 제법 옷이 잘 맞아 떨어졌다.
“사부 이 옷 좀....”
이신은 자꾸 목 언저리를 만지며 옷이 불편한지 자꾸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때론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할 때도 있으니 참고 입어라.”
아직 열다섯 밖에 안 된 아이에게 말해주어서 무얼 하겠냐만 겉으로만 고상한척 하는 강호에 발을 들은 이상 이러한 사소한 것 하나 하나 가르치지 않으면 아니 됐다. 겸손하되 얕잡아 보이지 않아야 하는 그런 강호를 스승으로서 가르쳐야 했다.
“그래 옷이 맞지 않으면 나도 굳이 입힐 생각은 없다. 주인장 편한 옷으로 하되 저렴한 느낌이 나지 않는 옷감으로 부탁하겠네.”
결국 이신의 옷을 어렵사리 산 제갈 사혁은 남궁세가로 향했다.
“에이씨! 그러니까 돈을 갚으란 말이야!”
“이러지 마세요. 제발.....”
배를 채울 겸 시장으로 향하자 길목에서 건달로 보이는 이들이 어느 여인을 겁박하며 그녀의 가판대를 부수고 행패를 부렸다.
바닥에 떨어진 떡은 먼지가 잔뜩 묻어 더 이상 팔 수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장사가 너무 안 되서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여인이 건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을 하자 건달 중 한명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여인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러니까. 주루에서 일을 하면 금방 갚을 건데 말이지.”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아... 떡은 안 되겠다. 좀 더 들어가자.”
라며 대수롭지 않게 그곳을 지나쳤다. 그러자 혜아가 사납게 제갈 사혁의 손목을 낚아채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죠!”
“불의를 보면 참는 건 중화 10대 덕목인 것을 모르느냐?”
“그런 덕목이라면 전 우리나라 사람 안 할래요.”
이런 건 꼭 백부를 닮아서 사람을 귀찮게 하니 참 안타까웠다. 저런 성격은 오래 살지 못할 성격이라서 오라버니로서 진정 앞날이 걱정이 됐다.
“내가 왜 도와야 하는데? 돈 안 갚았다잖아. 얘가 금융업을 물로 보내.”
“그.... 금융업이요?”
아무리 오랜 세월 못 봐온 오라버니지만 설마 불의를 보고 참다니 혜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학사관에서 비룡 마가장의 여식과 언쟁이 있었을 때 자신을 대신해 시녀의 옷감을 지불하며 나서주었던 오라버니였는데 그런데 이럴 수가.....
“좋아요. 그럼 제가 나서겠어요.”
제갈 사혁은 나약하더라도 불의에 맞서는 이들을 존경한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 귀염둥이는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이라니까.”
지난 생애까지 쳐서한 4~50여 년을 살면서 깨달은 건데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 그래서 아는 사람 중에는 제발 그런 사람이 없었으면 한다.
“이봐요. 당신들! 건장한 남자들이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면 어쩌자는 거예요!”
혜아가 건달들의 눈앞에까지 와 삿대질을 하자 건달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또 뭐야?”
“아가씨 이건 우리 일이니까. 가던 길 가시죠.”
“오~ 아가씨 꽤 예쁜데 어때 우리 가게에서 일 해볼 생각 없어?”
건달 중 한명이 치근덕대자 모욕감을 느낀 혜아는 건달의 무릎을 세게 차 다리를 부러트렸다. 그런 뒤 한쪽 무릎을 꿇은 건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제갈 사혁처럼 되고 싶어서 무공을 익혔다고 말했을 때 기본기 정도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적을 제압할 때 사용한 저 악랄한 수를 보니 장난삼아 무공을 익힌 수준은 아니었다.
“이 계집이!”
동료가 당하자 다른 건달이 혜아에게 주먹을 날렸고 혜아는 그 주먹을 잡아 어께 메치기로 상대를 제압한 뒤 건달의 오른 손을 부러트려 버렸다.
“으아악!”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제갈 사혁의 귀에 까지 들리자 제갈 사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후우!”
건달 두 명을 손쉽게 제압한 혜아는 건달들에게 당하던 여인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저런 놈들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니까요. 그럼 힘내세요.”
건달들을 혼내주고 제갈 사혁에게 다가오는 혜아는 한껏 기세등등해 있었다.
“봤죠. 오라버니! 오라버니 도움 없이도 할 수 있어요.”
“뿌듯하냐?”
“네?”
내심 생각했던 반응과 다른 반응이 나오자 혜아는 당황했고 제갈 사혁은 고개를 까닥 거렸다.
“볼일 다 봤으면 밥이나 먹자.”
안휘에서 가장 비싼 객점에서 점심을 먹는 내내 제갈 사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혜아는 평생 처음 오라버니에게 화를 냈다.
“오라버니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러세요?”
식탁을 세게 내리치며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혜아를 보며 제갈 사혁은 젓가락을 내렸다. 이럴 줄 알고 비싼 돈을 주고 가게를 통째로 빌렸으니까.
무명천으로 입을 닦은 뒤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무풍대 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가주.”
“아까 그 놈들 봤지.”
“내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루 준다. 알아내. 보고해. 처리해.”
그 말을 끝으로 무풍대 대원들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를 본 혜아는 잠시 어안이 벙벙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오라버니 깡패에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왜 죽여요!”
혜아의 반응을 예상했던 제갈 사혁은 이신에게 손짓했다.
“이신 혜아 옆에 앉아. 그리고 너희들 내 말 똑똑히 들어.”
무표정한 얼굴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즐거움도 아닌 희로애락에서 찾아낼 수 없는 복잡하면서 단순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 여자는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어. 그게 뭐겠어?”
“어려우니까. 돈을 좀 빌렸겠죠.”
혜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신 말해봐라. 돈을 빌리면 갚아야겠냐? 안 갚아야겠냐?”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당연히 돈을 빌리면
“갚아야죠.”
“갚아야 하는데 안 갚았으니까. 잘못된 거겠지 혜아야?”
제갈 사혁이 그렇게 말하자 혜아가 반문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 그런 불한당들에게 돈을 빌렸을 거예요.”
“그 사정 제 3자인 우리가 꼭 알아야겠냐?”
그랬다. 사람인 이상 어떠한 사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사정까지 알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 돈을 안 갚으면 기방에 몸을 팔아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게 해서라도 갚을 수 있으면 갚아야지.”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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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