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회: 각자의 길 -->
“주인공. 주인공. 주인공.”
“왜 그러시오? 내 이름은 주인공이 맞소만.”
봉명공의 본명 따위가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이니 봉명공이니 소림의 무진이니 몇 번을 머리에 담아도 예지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 후 녀석의 운명이 보이지 않았다.
봉명공이 한잔 더 마시려 하자 제갈 사혁은 봉명공의 술잔을 빼앗아 술잔을 한손이 쥔 채 가루를 만들어버렸다.
“이별 주 따윈 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날 새벽을 끝으로 봉명공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무엇이냐?”
“봉명공 오라버니는 어디계세요?”
“모른다.”
혜아가 물어도 제갈 사혁은 모른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형.”
“무엇이냐?”
무종이 어두운 표정으로 처소에 들르자 제갈 사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인가?
“전 화산파 문도들에게 일시 귀환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일시 귀환이란 말이냐?”
사문의 큰 변고가 있지 않는 한 일시 귀환과 같은 명령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내심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 5년이다.
(장문 태사숙조.)
과거보다 5년 정도 더 오래 사셨으니 화산파의 변고가 있다면 아마 담종진인에 관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간다.”
“오라버니!”
혜아가 제갈 사혁의 옷깃을 붙잡자 제갈 사혁은 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문의 일이다. 금방 다녀오마. 이신 따라와라.”
“네 사부.”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신을 데려가야만 했다. 자신의 제자라면 이신도 화산의 제자.
그로부터 일주일을 쉬지 않고 달려 화산파 입구에 도착하자 이미 축객령이 떨어져 일반 참배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다른 문파의 손님도 받지 않았다.
“무진 사형.”
제갈 사혁보다 한참 어린 평검수들이 제갈 사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형제의 예를 취하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떨궜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상복(喪服)이었다.
“장문진인께서는 어떠시냐?”
“이틀 전에 등선(登仙)하셨습니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문주전에 들어서자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려는 곡소리가 폐부(肺腑)를 도려내는 듯 했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도유진인(道流眞人)의 옆에 앉았다.
“왔느냐.”
“네. 사숙.”
도유진인은 담종진인의 제자기에 이번 장례의 실질적인 상주였다.
“스승님께서 가시는 길까지 너와 무원이 걱정을 하더구나.”
아마도 후계 문제가 마음에 걸리셨으리.
대사형은 병이 있고 자신은 제갈세가의 사람이다. 이제 스승께서 장문진인의 자리에 오르면 제갈세가의 소가주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제갈 사혁으로서도 화산파의 차기 후계자 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을 치르는 동안 화산에는 신기하게도 구름 한 점 없어서 누구나 다 화산의 아름다운 절경(絶景)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례가 끝나자 신기하게도 구름이 다시 모이며 화산의 봉우리를 감추었다.
장례가 끝난 후 제갈 사혁은 가장 먼저 대사형 무원을 만났다.
“대사형.”
“오랜만이네. 사제.”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이미 일어나있는 모습보다 누워 있는 모습이 더 익숙한 듯 보였다. 하얀 무명옷으로 감추고 있지만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멍이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역시나 같은 병이었다. 피를 흘리면 출혈이 멈추지 않고 쉽게 몸에 멍이 들었다. 무림인으로서는 최악의 불치병이라 할 수 있었다.
“떠나갈 때와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 조금 뜻밖이네? 하긴 사제야 어렸을 때부터 늘 세상 다 산 노인네 표정이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대사형......”
“아무 말 말게나. 그저 사형제간의 가벼운 담소면 되네.”
무원은 평소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원했다. 그것으로 병자라는 사실을 한순간이나마 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뭐 대충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봉명공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었고 같은 세대인 무원으로서는 봉명공의 이야기를 하자 표정이 썩 그리 좋지 않았다.
“왜 그 녀석을 다들 주라고 부르는 겁니까.”
“별 것 아니라네. 처음 만났을 때 성과 이름을 함께 불렀는데 그리 부르는 걸 싫어하니 우리끼리 그리 불렀다네. 명성을 얻었을 땐 봉명공으로 불리지만 우리끼리는 주라고 부르지.”
하긴 주인공이라는 그 이름이 조금 우스꽝스럽긴 했다.
“전 그 녀석 정말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항상 실실 거리기만 하고.”
“성격상 사제와는 상극이지. 그건 그렇고 청하라고 했던가? 그 무당의....”
청하의 이야기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하 소저 이야기는 또 왜 꺼내십니까.”
제갈 사혁이 생각 이상의 반응을 보이자 무원은 제갈 사혁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가 뭘 또 꺼냈던 말인가? 방금 사제한테 처음 듣고 처음 말하네만.”
과거에나 지금이나 대사형은 대사형이었다. 제갈 사혁을 휘어잡는 이는 화산에 단 한명 대사형 무원뿐이었다.
“그나저나 힘들 걸세.”
“힘들다니요?”
“무당이니까.”
그 말에 엄청나게 공감이 가는 건 왜일까?
“그렇죠.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이니까.”
“힘내시게 청춘에 찾아온 춘풍 아닌가.”
그렇게 두 사람이 소소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때 정식으로 장문진인이 된 도호진인과 다른 11명의 장로들은 후계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말이 논의지 사실상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무진 아니겠습니까.”
“그 아이만한 적임자가 없지요.”
“사형제들의 신망도 높고......”
제갈 사혁이 확실히 되는 가운데 오히려 스승인 도호진인만은 제갈 사혁의 후계 문제에 대해 반대를 했다.
“확실히 해두는 건 좋지만 너무 빨리 논의되는 것도 시기상으로 좋지 않습니다.”
도호진인이 그리 말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도호진인의 사형이자 무원의 스승인 도청진인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장문사제. 무원을 생각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그 아이는 이미 더 이상 검을 쥘 수 없는 운명이네.”
“사형!”
이미 제자에 대한 희망을 저버린 스승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제자를 사랑하지만 원인 모를 병을 치료할 방법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고통만 따를 뿐.
“장문사제 후계 문제는 넘어가더라도 자하신공은 일찍 가르쳐두시게.”
장문인에 이제 막 올랐을 뿐이지만 도호진인은 이미 자하신공을 익힌 지가 16년이 다되고 있었다.
자하신공은 장문진인만이 배울 수 있는 화산 무공의 정수 그러니 제자들 중 자하신공을 배우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필시 다음 장문진인의 자리에 오르는 후계자다.
“후계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순 없네. 우리 나이가 이제 몇인가? 자네도 말만 후계자였지 실질적인 장문인이었고.”
도자 항렬은 이미 나이가 육순(六旬)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로들은 그대로지만 장문인의 세대교체는 다른 문파에 비하면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당장 자하신공을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날 제갈 사혁은 자하신공을 공식적으로 전수 받기 위해 장문인과 함께 폐관수련에 들어갔고 그렇게 그해 가을을 맞이했다. 그리고 가을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폐관수련을 마치며 화산파의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 게 만들었다.
(알고 있는 거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알고 있는 것 붙잡고 폐관 수련하는 것도 그렇고.)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논란이나 의구심이 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빠르게 폐관을 끝냈다. 그리고 폐관수련이 끝나자 과거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무림맹의 징집이 있었다.
“무진아.”
“네. 스승님.”
“무림맹에서 공문이 왔다.”
어느덧 산이 붉게 물드는 계절이 찾아왔고 그와 동시에 드디어 화산의협으로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된 무림맹 근무가 결정된 것이다.
“사문의 이름을 걸고 꼭 부끄럽지 않은 전공(全功)을 올리겠습니다.”
스승에게 예를 올린 뒤 제갈 사혁은 곧바로 대사형 무원에게 향했다.
“대사형.”
“이야기 들었네. 자하신공을 벌써 익혔다고?”
원래 알고 있던 것이었기에 칭찬을 하는 대사형을 보기 조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받으십시오.”
제갈 사혁은 조용히 무원에게 함을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약입니다. 꽤 좋은 거니 드셔 보십시오.”
제갈 사혁에게 함을 받아 든 무원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약은 다름 아닌 옥진산이었기 때문이다.
“사제!”
원래는 스승인 도호진인이 복용해야 하는 옥진산을 제갈 사혁이 받았고 또 그것을 다시 무원에게 양도한 제갈 사혁이었다.
“대사형. 비록 병을 낫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대사형은 대사형이십니다. 사제에게 대사형의 의무를 떠맡기셨으니 사형도 이리 놀지만 마시고 자기 할 일을 하십시오.”
그 일이라는 것은 생존을 의미했다. 살아있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제갈 사혁의 진심 어린 걱정에 무원의 눈가에 눈물에 맺혔다. 하지만 이걸 복용한다 하더라도 몇 개월 더 살 수 있게 해줄 뿐 병이 낫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을 복용하고 내공을 증진하게 될 제갈 사혁에 비하면
“사양하지 마십시오.”
흡정마공이 완벽해진 이상 내공이란 건 필요하면 그때그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과거 옥진산을 복용하고 환골탈태에 이르렀지만 그때의 깨달음이 지금과 같지 않았고 그때의 자신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복용한다 해도 환골탈태의 가능성은 미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듬해 겨울이다......)
무원은 과거대로라면 이듬해 겨울에 세상을 떠난다. 자연사한 전 장문진인과는 달랐다. 자신의 의지나 정신적인 안정 등으로 오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늘릴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이 옥진산이었다.
“그럼 나도 선물을 해주겠네.”
선물을 해주겠다며 무원이 건네준 것은 검 한 자루였다.
“리(唎) 겸도(鉗刀) 78번작. 호황(虎皇)....”
바로 무원의 검이었다.
“사제 이거 부러워하지 않았나?”
공방에서 78번째로 만들어졌다 해야 78번작이다. 워낙 명검이라 수많은 검객들이 이 작품을 찾지만 공방에서는 검증된 검객에게만 검을 판매해서 검의 주인이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 한 새것으로 구입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나는 이제 검을 잡을 수 없네. 그러니 들고 다녀주게.”
무원에게 출혈이란 치명적이었다. 그러니 검을 놓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검사로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곰방대도 그렇고 검도 그렇고 대사형은 무원은 늘 제갈 사혁이 화산을 떠날 때면 무언가 선물을 꼭 하나씩 해주었다.
제갈 사혁은 사천으로 향하는 내내 손에서 육포를 떼놓지 않았다. 심난한 마음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부. 육포 다 떨어졌는데요.”
“그래?”
사형의 일도 있고 하지만 무엇보다 무림맹에서의 일이 조금 걱정이었다. 이대로 무림맹에 입성하면 명성을 쌓겠답시고 또 사파며 마교며 하는 놈들과 싸워야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지금의 실력은 그야말로 천지가 뒤바뀐다 하여도 메꿀 수 없는 그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해본 짓을 또 해야 하는 그 귀찮음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모르겠다. 천천히 좀 가자.”
사천 언저리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헌책방에 들어가 농땡이를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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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