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회: 각자의 길 -->
사실 무림맹 공문이라는 게 “일손이 부족하니 좀 와주십사 부탁드립니다.”라는 거지 뭐 사실상 군대도 아니고 꼭 시간 맞춰 갈 필요도 문파에서 굳이 사람을 차출할 의무도 없다.
팔자서생(八字書生) 1권.
제갈세가의 장남이지만 가문대대로 뛰어나지 못한 근골 때문에 실력도 형편없고 항상 오대세가 언저리에만 맴도는 그저 그런 가문이라는 수치를 당하며 제갈 갈은 우연히........ 중략
“이런 미친 우리 집에는 뭐 운동신경 더러운 놈만 태어나는 줄 아나보네.”
책장을 넘기던 제갈 사혁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곧 다음 장을 넘기자 살짝 책을 읽는데 눈치가 보였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갈 갈은 머리가 뛰어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고
“아니 꼭 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건 아니야..... 안 그런 사람도 있어......”
무림맹에 입성하게 된 제갈 각은 무림맹 군사로서 활동하지만 무림맹의 각종 비리와 부당함을 고치기 위해 제갈세가의 장남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팔자 서생으로
“바로 이거야!”
“네? 뭐라고 하셨어요. 사부.”
위장 신분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가! 바로 이거였다. 무림맹에 화산파 제자로 입성하는 것보다 별 볼일 없는 낭인으로 위장해 무림맹에 입성한 것이다.
“이거이야 말로 남자의 꿈이지.”
사실 스스로 몸을 낮추어 윗선의 부정부패에 철퇴를 내린 다는 고귀한 뜻은 절대! 절대로 없고 그저 별 볼일 없는 삼류 무사를 표방하며 적당히 몇 놈에게 무시당하다가 정체를 밝혔을 때의 녀석들의 정신나간 표정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우월감을 위해라는 썩어빠진 목적 밖에 없었다.
“정말 이렇게 하시게요?”
“멋지지 않냐?”
“유치해서 싫어요.”
열다섯의 이신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는데 내심 이런 걸 진짜로 하려 했던 제갈 사혁은 얼굴이 빨게 져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유치하지? 알고 있어. 나도 장난으로 해본 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제갈 사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내... 내 계획이 유치해? 내 소망이 유치해!)
“나와라. 식당이라도 잡아서 밥이나 먹자.”
책을 덮고 이용료를 지불한 뒤 책방에서 나온 제갈 사혁은 객잔으로 향했다.
“어 갈사 소협 아니세요?”
“갈사?”
갈사 소협이라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피칠갑을 한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누구시죠?”
“저 청하에요. 갈사 소협.”
초승달이 뜬 날 나타난다는 미친 살인귀처럼 보이는 여인은 무당파의 청하였다. 용화장에서의 사건 이후 실로 오랜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옷차림이?”
“아! 오다가 승냥이떼를 만나서요.”
그러고 보니 용화장 사건 때 잘 보진 못했지만 청하는 검보다 도를 사용하는 도객이었다.
“청하 소저는 도를 주로 이용하시네요?”
“조금 별나죠?”
무당에 도법이라 부를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도를 이용하다니 굉장히 특이했다.
“최근에는 도법에 대해 연구가 되고 있어요. 완성된 무공이 몇 개 되진 않지만...... 그보다 이쪽 분은?”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자입니다. 이신 이쪽은 청하 소저. 청하 소저 이쪽은 이신입니다.”
“이신입니다.”
“반가워 청하라고 해. 갈사 아니 제갈 사혁 소협과는 친구야.”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친교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청하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이 나오자 감격한 제갈 사혁은 기쁨을 감추려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 갈사 소협 왜 그러세요? 속이 안 좋으세요?”
“아... 아닙니다. 사천에서 괴인을 물리쳤을 때 입었던 부상이 아직도....”
괜히 이상한 놈 취급 받을까? 걱정을 한 제갈 사혁은 일부러 없던 부상을 만들어냈고
“괜찮으세요? 저도 들었어요. 아주 잔악무도했던 악인이라고.”
제갈 사혁이 사천에서 활약한 일을 알고 있던 청하는 서둘러 제갈 사혁을 부축했다.
“일단 어디 가서 좀 쉬어요.”
그런 사부를 보며 이신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
바보 같을 뿐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제갈 사혁은 이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었다.
“혈관은 기가 흐르는 강줄기와 같은 거다. 파강권을 펼칠 때도 바로 이 혈관을 이용하잖아. 이렇게.”
제갈 사혁이 허공을 향해 파강권을 날리자 파공음이 귓속에 강하게 맴돌았다.
“금강불괴 도검불침 외공을 끝임 없이 수련했을 때 오르는 경지라곤 하지만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야.”
“약점이요?”
“바로 이때지.”
제갈 사혁이 무공을 펼치지 전 혈관을 통해 내공을 이동시키자 이를 느낀 이신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사부 하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요. 이때를 어떻게 노리고 들어가죠?”
그때라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고작 눈을 세 번 깜빡이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상대의 다음을 예측하는 경험이 필요한.....”
“저기 잠깐 만요. 갈사 소협.”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무얼 하셨기에 신이가 짧다고 말한 거죠?”
정순한 내공의 흐름은 오직 이신만이 볼 수 있다. 때문에 청하가 제갈 사혁의 내공을 느꼈을 때는 이미 기가 혈관을 흐르고 지나갈 때가 아닌 몸 밖으로 뻗어나간 때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신은 조금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하소저께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한부분에 불과하니 이 이상은 설명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가?”
그런가? 라면서 자신의 도를 껴안으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청하를 보고 있자니 제갈 사혁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향하는 느낌을 받았다.
(청하소저를 자꾸 의식해서 집중이 안 돼. 살짝 보이는 저 백치미가 특히.....)
고개를 거세게 저으며 마음을 바로 잡은 제갈 사혁은 다음 무공을 가르쳤다.
“패성각은 상대를 짓밟거나 숨통을 끊을 때 혹은 상대와 거리를 유지할 때 사용하는 초식이다. 단순히 발로 지면을 내려찍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
“아!”
내공이 무릎부근에 보여 있는 것을 본 이신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공을 한순간에 발바닥으로 흘려보내며 내려친다.”
패성각(覇成脚)
“꺄!”
제갈 사혁이 패성각을 사용하자 청하가 쭈그려 앉아 있던 곳의 지면까지 내려앉으며 그 위력은 참으로 놀라웠다.
“괜찮으십니까? 청하소저.”
“괜찮아요. 그보다 그 각법은 범위가 굉장하네요.”
“상대와 너무 붙었을 때 상대의 기세를 꺾는 등 여러 가지 사용법이 있지만 결국 검법을 보조하기 위해 만든 각법이라 단순 겉모습만 화려할 뿐입니다. 공격 범위랄 것도 없이 단순히 지면을 발로 차기만 할 뿐이죠.”
제갈 사혁의 말을 풀이하자면 그냥 단순히 멋내기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이것을 가르치는 걸까?
“하지만 이 패성각을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맞춘다면 온몸의 뼈가 박살이 납니다.”
지면을 둥글게 내려앉히는 그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이런 초식으로 상대의 발등을 밟는다면 그걸로 끝입니다.”
불필요한 초식 따윈 없다. 그저 사용해야 할 상황이 한정된 초식만 있을 뿐.
“쓰고 나면 왠지 힘이 빠지고 허무한 느낌이에요.”
“일격에 내공을 전부 쏟아내니 당연히 힘이 빠지지! 그래서 빠른 내공순환을 해. 힘을 계속 채워 줘야하는 거야.”
“하지만 갈사 소협. 내공순환은 그렇게 빨리 되지 않아요. 8초. 비무 중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에요.”
이번에도 청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단전에 모든 내공을 맡기는 무림인에게는 그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혈관을 이용해 지속적인 내공순환을 하는 제갈 사혁과 이신에게는 달랐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해줘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 8초를 극복해야 진정한 무림인 아니겠습니까?”
약점은 단련해서 극복하는 것이 무공의 기본이기에 청하는 이번에도 조금은 의문과 납득을 동시에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자.”
제갈 사혁은 늘 이신을 조금씩 천천히 가르쳤다. 춘풍지회 당시에는 모든 것을 너무 급하게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은 여유를 가지고 이신이 이해할 때까지 반복하며 가르쳤다.
수많은 사제들을 직접 가르쳐왔던 제갈 사혁이기에 때문에 벼락치기와 강제적 주입식으로 이신을 가르칠 수 있지만 제자기 때문에 가르침 하나하나에 신중에 신중을 가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자 승냥이의 피를 뒤집어 쓴 청하의 모습 때문인지 아무도 제갈 사혁 일행에게 다가가려하지 않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청하는 주위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있잖아요. 갈사 소협.”
“네?”
“갈사 소협은 어디로 가세요? 이 길로 가면 사천이긴 한데.”
“사천이라면 당연히 무림맹 아닙니까.”
“저도 무림맹에 가는데 혹 갈사 소협은 어떤 직책을 맡으실 건가요?”
무림맹에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인물들이 맡는 일은 꽤 많았다. 하지만 겉보기에 많을 뿐 실제로 하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제갈 사혁이 지난 날 맡았던 출사(黜士)라는 직책이 있는데 혼자 다니며 무림맹의 임무가 하달되면 그것을 수행하는 직책이 있다. 임무 수행도 자유로워 꽤 인기가 많은 직책이며 그보다 더 인기가 좋은 자리로는 대주가 있다.
그 위로는 각 원로들의 추대나 일정한 공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자리다.
“당연히 출.........”
“전 출두사(出頭士)가 될 생각이에요.”
“...........두사가 될 겁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청하는 제갈 사혁의 두 손을 맞잡으며 기쁨을 한껏 주체하지 못했지만 출두사라는 건 출사와 달리 꽤나 고생하는 직책이었다. 출사가 임무를 하달 받고 자신의 입맛대로 임무를 수행하며 명성을 쌓지만 출두사는 말 그대로 출사들이 버리는 임무를 맡는다. 그 말은 즉 귀찮고 더럽고 피곤한 일을 도맡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천에 도착한 제갈 사혁일행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향했다.
정도 무림 연맹. 일종의 연합세력으로 사파와 마교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정파의 연합체다. 하지만 무림맹의 결성 5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연합체의 성격보다는 마치 무림인들만의 관공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무당에서 온 청하라고 합니다. 이쪽은 화산파의 제갈 사혁 소협이십니다. 그리고 그 제자분이시고.”
무림맹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신분을 밝히자 곧 무림맹에서 사람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팔(捌)이라 합니다.”
팔. 제갈 사혁에게는 익숙한 인물이었다.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팔이라고 부르는 인물인데 갓 무림맹에 입성한 정파인들과 출사들의 편의를 봐주는 인물이다.
“팔 대협이시군요. 저는 무당의 청하라고 합니다.”
“화산의 무진이오.”
“갈... 아니 제갈 소협 그래도 연배가 있으신데 마음대로 하대하시면 어떡해요!”
팔과는 지난 생의 인연도 있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편히 하대를 한 것인지 청하가 이를 걸고 넘어가자 제갈 사혁은 잠시 당황했다.
“아닙니다. 청하소저. 소인은 그저 무림맹에 고용된 고용인일 뿐입니다. 어찌 대하시든 상관없으니 마음 같은 거 쓰지 마시지오.”
팔의 사람 좋은 웃음에 청하는 더욱 더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청하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제갈 사혁으로서는 팔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팔의 안내로 간 곳은 무림맹의 인사담당이 있는 집무실이었다.
“대인. 무당과 화산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들어오시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40대 중반의 남성이 한가롭게 난을 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