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회: 각자의 길 -->
무림맹의 인사담당 부공(府工). 제갈 사혁에게는 여기가 승부처였다. 부공은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의 선배기 때문이다. 명문정파가 그 위세를 천년만년 떨치기 위해서는 훌륭한 속가제자를 많이 두어야 한다. 그리고 부공이 바로 그러한 속가제자였다.
(후배 무진이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제갈 사혁의 전음에 부공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것 외에는 별다른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소인은 아니만 물러나겠습니다.”
팔이 물러나자 부공은 옷을 걷으며 난을 치던 붓을 놓았다.
“그래 어디서 오셨소?”
“무당의 청하라고 합니다.”
“화산의 무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의 제자 이신입니다.”
각자의 소개를 마치고 부공은 두 사람에 대한 직책을 부여해주기 위해 간단한 다과상으로 자리를 마련했다.
“출사가 어떠시오?”
권유가 아니라 의중을 묻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매우 형식적인.
애초에 명분정파에서 사람이 오면 대부분 출사 쪽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저는 출두사를 지망합니다. 물론 여기 계신 제갈 소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청하가 그렇게 말하자 제갈 사혁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하는 듯 행동한 후 재빨리 부공에게 전음으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선배님. 안됩니다! 출두사라니 그런 걸 하고 싶을 리 없잖습니까!)
잠시 턱을 만지며 청하와 제갈 사혁을 번갈아가며 쳐다 본 부공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제갈 사혁이 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는지 대충 이해를 했기 때문이다.
“청하 후배께는 미안하지만 구파일방의 제자에게는 출두사를 줄 수 없네.”
“어째서 입니까?”
“무얼 그리 과민하게 반응하는가?”
부공이 별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과민하게 행동하냐며 청하에게 주의를 주자 청하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셨다.
“무림맹이라는 조직은 말이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라네. 솔직히 말하면 구파일방의 제자인 자네들이 출두사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하지만......”
“이게 다 어른들의 사정이라네 그리고 출사와 출두사의 차이는 그저 글자 수에 불과하네. 출사가 열의 임무 중 여덟을 버리면 그 나머지 여덟이 출두사에게 보내질 뿐이네.”
사실 말이 그렇다할 뿐이지 출사와 출두사는 임금부터 각종 혜택까지 확연히 다른 직책이었다.
“그래도 정 출두사가 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보는 눈이라는 게 있네. 청하 후배. 사문의 체면도 있으니 출두사는 접으시게.”
사문의 체면이라는 말에 청하도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선배님 후배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첫째로 혈연(血緣) 둘째로 학연(學緣) 셋째로 지연(地緣)이네.)
온갖 연고를 이용해 출사가 된 그야 말로 사회의 썩은 환부나 다름없었지만 이런 일에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출사로 배정 받은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속가출신인 부공의 입김 때문인지 아니면 제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인지 4인실 숙소에 잠자리를 배정받았다.
“사부 그런데 이제 무얼 하면 되죠?”
어차피 출사라 해봐야 일하고 싶을 때 일하면 그만이다.
“별거 없어. 그냥 아무 자리에 누워서 쉬어.”
마냥 방에 있기 불편했던 이신은 방에서 나와 무림맹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무림맹은 굉장히 호화스러웠다. 잠시 지냈던 화산파는 호화스럽다기보다 웅장한 역사가 느껴지는 어떤 무언가가 있어서 편했던 반면 여태까지 남궁세가의 하인으로 있었던 이신에게는 이곳은 굉장한 위화감을 주는 곳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이신은 자기도 모르게 식당으로 향했다. 무림맹의 식당은 자신이 먹을 만큼 가져다 먹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신은 접시에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담아서 이것저것 입에 넣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가!”
식당 한쪽에서 욕설이 크게 울려 퍼지자 깜짝 놀란 이신은 음식이 목에 걸려 가슴을 두들기며 간신히 음식을 넘겼다.
“무슨 일이지?”
식당에서 별안간 싸움이 일어나자 호기심이 동한 이신은 가장 큰 훈제 닭다리를 하나 입에 물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꼴에 정파라고 무림맹에 어슬렁거리는 간패문(干覇門) 잡놈 주제에 감히 내 옷을 더렵혀?”
“미안하게 됐다.”
간패문 소속의 어떤 남자가 식사를 하던 도중 옆에 앉은 남자의 옷을 더럽히게 되어 그것이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미안하면 다야 이 새끼야! 여기 미안하단 소리 들으려고 무공 배운 새끼있어?”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무공 배운 사람이........
(있긴 있는데.)
차마 자신의 사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종종 사부인 제갈 사혁이 싸움을 일으키면 항상 상대는 사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연신 죽을 죄를 지었다느니 귀인을 못 알아봤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항상 사부는 말한다. 무공은 남들한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연마하는 거라고.
“거 참 싸구려 옷 입고 겁나게 유세 떠네.”
“간패문 잡놈이!”
“간패문 잡놈?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네?”
간패문 소속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너는 뭐 얼마나 대단한 사문을 두고 있는지 한번 봐보자. 덤벼 이 새끼야!”
“촌노무 새꺄. 침성문(針成門)이라고 들어는 봤냐?”
둘 사이에게는 금방이라도 주먹이 오고 갈 판이었고 주변사람들은 하나 같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아무도 이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사나이라면 화끈하게 저질러 버려!”
“한번 죽도록 싸워봐라!”
오히려 분위기를 달구며 두 사람이 싸우도록 분위기를 조장했다.
“멈춰.”
피가 끓어오르는 사내들이 금방이라도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그때 사내들 틈으로 웬 여인하나가 끼어들었다.
“무림맹에서 서로간의 무력충돌에 개입하지 않지만 식당에서는 예외다. 어서 제자리에 앉아.”
그 여인은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사내들뿐인 식당에 이런 미인이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 으르렁거리며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던 남자들의 시선이 그 여인에게 꽂혔다.
“사내의 일에 계집이 끼어들다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간패문 소속의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그와 대립하던 침성문 소속 사내가 그 말에 동조했다.
“맞는 말이다. 계집 꺼져라. 이놈과 본인의 일이다.”
“반항하면 죽는다. 어서 두 놈 다 자리에 앉아.”
여인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만큼이나 냉정하게 말을 끊었고 내심 여자라고 얕보고 있던 두 남자는 도리어 자기들을 얕보는 여자에게 호승심을 불태웠다.
“무림맹에 몸담고 있는 이상 무림인일 테고 어차피 무공을 익힌 무림인인 이상 여자고 남자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한다. 식당에서의 소란은 용서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웃기고 있네!”
간패문 소속 무림인이 여인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는 그때였다. 간패문 남자의 목을 누군가가 뒤에서 한손으로 움켜쥐었다.
“커억!”
영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개입에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주 어찌할까요?”
대주라는 직책은 무림맹에서 군권을 가지고 있는 직책이었고 이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님을 뜻했다. 그러자 이 상황의 중심에 있는 침성문 소속 무림인은 여인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쥐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죽은 듯이 있었다.
“요.... 용서를!”
여인이 대주 직책에 앉아 있는 이라는 것을 안 간패문 소속 무림인은 목에 가해진 압박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음에도 사력을 다해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여인은 남자의 멱살을 휘어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개길 땐 마음대로였지만 털릴 땐 아니란다.”
여인의 주먹이 간패문 무인의 관자놀이를 후려치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식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런 미친 백호대주잖아!”
그때 누군가가 여인을 알아보고 그녀에 대해 말하자 순간 식당 안이 싸늘하게 얼어버렸다.
백호대주라는 이름은 무림맹 내에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이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싸우는 건 자랑이 아니다. 식당에서 싸우는 게 무슨 무림인의 습성인 마냥 본능을 주체 못하겠거든 나를 찾아와라. 나는 백호대주 혜성이다.”
그 말과 함께 백호대를 이끌고 나가는 백호대주 혜성의 모습에서 호랑이의 모습이 투영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늘 점심은 뭐지?”
백호대주가 이 식당을 이용한다는 점이었고 그 사실은 이 장소에서 밥을 먹는 이들에게는 지옥문이 열리는 것을 알리는 종말의 종소리나 다름없었다.
“다른 식당은 먹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까다롭단 말이야. 안 그런가? 주성.”
헤성이 동의를 표하자 혜성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무림맹에는 식당이 두 곳 있는데 한 곳은 질 좋은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제공하지만 마음껏 먹을 수 없고 한곳은 재료의 질은 그저 그렇지만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었다.
“대주보다 많이 먹는 자도 있군요.”
그다지 말이 없는 주성이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주성의 시선이 닿은 곳을 보자 그곳에는 웬 어린 사내아이가 배가 다 들어가지 못할 정도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애들은 먹보니까.”
“애들은 먹보죠.”
애들은 먹보라며 웃어넘긴 혜성은 식탁 다리가 부러질 만큼 엄청난 양의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편 일련의 소동을 뒤로 한 채 점심을 다 먹은 이신은 시원하게 트림을 하며 식당을 나가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밥을 먹었으니 몸을 움직여 소화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텅 빈 연무장에 도착한 이신은 온몸의 기를 연소시켜 근육 전체를 긴장시켰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
모래 위로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오행매화보를 펼치며 이신은 본능에 따른 권각술을 펼쳤다. 오행매화보를 제외하면 무공이랄 것도 그렇다고 초식이랄 것도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이었다.
“!”
몸을 풀 겸 움직인 것에 불과 했지만 그 순간 이신은 번개에 맞은 듯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뭐지 방금 그건?”
몸을 움직인 순간 머릿속에서 어떠한 움직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이 폐관수련에 들어간 동안 착실하게 사부의 가르침대로 초식이 아닌 본능에 충실한 몸동작을 보이며 무공을 수련했지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움직임을 따라하려는 순간 몸 곳곳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왔다.
“유수(流水)와 같이 흐르며.”
여태까지와는 다른 아주 부드러운 반보를 펼치며 횡이동을 한 이신은 부드럽게 두 손으로 몸의 중심을 잡으며
“넘쳐흐를 땐 성난 파도처럼 산도 집어 삼키라!”
온몸을 이용해 어깨로 허공을 때리며 공기의 층을 흔들었다.
“복호파산(伏虎破山)............”
복호파산?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였다.
“뭐지?”
배운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무공임이 틀림없었지만 이신은 초식을 펼칠 때 손에 꼭 맞는 장갑을 낀 듯 편안함을 느꼈다.
“사부는 알고 계시려나?”
복호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으로 봐선 선도계 권법임 같아 자연스럽게 사부인 제갈 사혁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복호파산을 펼치자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어수룩하게 펼쳐졌다. 귀신에 홀린 듯 초식을 펼쳤을 때는 무언가 느낌이 있었지만 다시 해보려니 쉽지 않았다.
“왜 이러지?”
무의식중에 제갈 사혁이 주입한 무공을 발현한 이신은 굉장한 피로를 느꼈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나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느덧 단풍잎 반쯤 물들어갈 계절이 다가오자 청하는 마음 한쪽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을은 소녀의 계절 하지만 세상은.......
“방년을 넘긴 소저를 소녀라 부르지 않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동안 여인은 모두 다 소녀에요.”
청하는 우연히 만난 중년의 여협과 함께 차를 마시며 바둑을 두었다. 원래 여러 정파의 무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무림맹의 특성상 여러 사람을 만날 기회는 많지만 이렇게 모르는 사람과 금방 친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소저는 참으로 맑은 눈을 가지셨군요. 그 맑은 눈으로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보니 선녀가 따로 없습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었다면 흡사 남정네의 달콤한 유혹이라고 느낄 정도로 중년의 여인은 칭찬에 능숙했다.
“하지만 그 나이 때는 깊이가 없지요.”
흑돌을 집어든 손끝에서 상대의 숨통을 끊어내는 절초와 같은 용맹함이 느껴지자 청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저히 상대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혼자 방에 있기 심심해서 나온 건데 재미삼아 둔 바둑마저 연패를 면치 못하니 흥미를 잃어버렸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