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회: 각자의 길 -->
“갈사 소협은 어찌하고 계실까?”
무림맹에 아주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동년배라 할 수 있는 이는 제갈 사혁이 다였기 때문에 청하는 조심스레 제갈 사혁의 방으로 향했다.
“갈사 소협?”
제갈 사혁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상의를 탈의한 채 세숫대야에 손을 담구고 있는 제갈 사혁이 있었다.
“청하 소저. 어쩐 일이십니까?”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청하의 방문이 제갈 사혁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냥 심심해서 왔어요. 뭐하세요?”
“이런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어서 빨리 옷으로 갈아입겠습니다.”
“아뇨. 무당에는 사숙들도 그렇고 사형들도 그렇고 상의 정도는 익숙해요. 그보다 뭐하고 계신 거예요?”
아무리 봐도 제갈 사혁의 모습은 세수하려는 폼은 아니었다.
“오행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행이요?”
“그러고 보니 오행에 대해서는 청하 소저께서 잘 아시겠군요.”
무당은 음양화합을 중점으로 두는 문파로 유명하기 때문에 제갈 사혁보다는 오행에 밝았다.
“갑자기 오행에 대해 생각하시다니 별일이시네요.”
청하가 손가락을 세숫대야에 담그자 세숫대야에 살얼음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세숫대야를 만지자 물이 따뜻해졌다.
“기본적인 소양은 갖추고 있어요. 타고나지 않아도 이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내공으로 양의 기운을 음의 기운을 각각 끌어내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춘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뇌전도 만들어내실 수 있습니까?”
뇌전이라면 번개를 뜻하는 것이었고 번개의 경우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훈련을 하지 않는 이상 익히기 힘들다.
“그건 조금 힘들죠. 음과 양의 기운은 몸을 이루는 기운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지만 뇌전은 뇌전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매개체가 필요해요.”
“으음....”
제갈 사혁의 미간이 찡그려지자 청하는 자기도 모르게 제갈 사혁의 찡그려진 미간에 손을 올렸다.
“!”
청하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제갈 사혁은 세숫대야를 엎어버렸고 청하는 무안했는지 남자처럼 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해요. 미간 찡그리신 모습이 조금 특이해서 만져보고 싶었어요.”
“아.... 아닙니다.”
청하가 사근사근 미소를 짓자 제갈 사혁은 숨이 탁탁 막힐 것만 같았다.
“오행은 왜 익히시려는 거예요?”
“달리 익힌다기보다는 이신을 위해 알아두려 합니다.”
“신이요?”
“그 녀석이 뇌전을 타고나서 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스스로 뇌전을 발현한 적은 없지만 폭류신공으로 인해 흥분했을 때 이신은 분명 뇌전을 다뤘다.
“그 아이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갈사 소협은 상냥하시네요.”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조금 신경 써주는 편이지 청하 소저가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지난 날 용화장 사건 때 기루에서 보였던 제갈 사혁의 모습을 청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뇌전 같은 경우는 오행의 기운 중에서도 상당히 탐이 나는 기운이에요. 실제로 이것을 익히려는 전문적인 문파도 있지만 이 기운을 조종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오히려 어설프게 익히면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제갈 사혁이 목격한 이신의 뇌전은 폭류신공과 꽤 궁합이 잘 맞았다.
이신의 성장 방향을 폭류신공으로 잡고 외공에 집중해 폭류신공의 약점인 내상을 극복하고 거기에 뇌전을 더하면 이것이야 말로 신공이었다.
제자로 받아들이고 스승이라 불리는 이상 적당히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조금 더 낫고 조금 더 훌륭하게 가르치고 싶은 욕심만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부분은 혼자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된 건지 잘 모르겠네요? 음.... 할 일 없으시면 나가시겠어요?”
“좋습니다.”
청하와 남자와 여자가 아닌 무림인으로서 대회를 나눌 때는 굉장히 편했다. 오래사귄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도 여자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많은 화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지는 못했다.
남자들끼리 늘상 주고받는 지하 투기장에서 어떤 빌어먹을 인간백정이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줄 것이라던가? 새로 문을 연 도박장이 어디에 있고 이 근방에서 가장 끝내주는 기루의 기녀가 누구라는지 그런 이야기 말이다.
“송화단은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못 먹겠더라고요. 삭힌 오리알이라니.”
“그거 색부터 조금 이상하잖아요.”
뭐 그래도 일상적인 이야기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렇죠? 무당에서는 일주일에 3일 씩이나 송화단이 나온다니까요.”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는 아니고 거의 무슨 청하의 기분 맞춰주는 느낌의 그런 대화였지만 제갈 사혁에게는 정말 꿈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꺄아~ 너무 귀엽다!”
“마.... 만져볼까?”
“그러다 깨면 어떡해?”
“옷차림을 봐선 시동 같은데 뭐 어때?”
“자고 있는 모습 봐. 정말 귀엽다.”
그때였다. 여인들의 간드러지는 비명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연무장 나무를 중심으로 여인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좋아 죽겠다는 듯 연신 내숭 섞인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일까요?”
“별 거 있겠어요. 귀여운 새끼 고양이라도 발견했나보죠.”
“그런가?”
“매실차나 마시러 가실래요? 요 앞에 제법 괜찮은 곳이 있는데.”
“그래요. 갈사 소협이 사시는 거죠?”
“물론이죠.”
“그럼 제가 당과를 살게요.”
제갈 사혁이 만약 그 새끼 고양이가 이신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청하와 한가롭게 매실차나 훌쩍거리러 가지 않았을 거다.
“봐! 깼잖아.”
잠에서 깬 이신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주위에 빙 둘러 앉아 자신을 무슨 우리 속에 갇힌 동물을 구경하 듯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어머 귀엽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처음에는 너무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이신은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생을 남의 집 종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 정도는 이신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럼 천천히 한명씩 물어봐주세요.”
한참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신은 점점 능숙하게 여인들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머 그럼 신이는 이제 막 무공을 익혔구나.”
“사부의 제자가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머~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디뎠다니 너무 귀엽다.”
막 끌어안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이신은 침착하게 마음을 바로 잡았다.
“너무 그러지 말아주실래요.”
“얘 봐봐. 어른스러운 척 하려는 게 너무 귀엽다!”
볼을 꼬집으며 잡아당기는 등 여인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이신 개인의 인격 따윈 배려하지 않았다.
사부라도 찾아가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거미줄 같은 여인들의 손에 붙잡혀 전혀 그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부~~~~~~~”
들릴 리도 없지만 그렇게 외친다고 해서 청아와의 한때를 버리고 몸소 와줄 사부도 아니었다.
“여... 여자는 무서워....”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얼굴이 빨갛게 손자국으로 물든 이신의 행색은 그야말로 쌩 거지가 따로 없었다.
평생 만나본 여자라고는 남궁세가의 아줌마들 아니면 교양 있는 남궁세가의 여식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신으로서는 그야말로 사내대장부 뺨치는 패기의 무림소저들이 버거웠다.
비틀거리며 무림맹을 배회하던 이신은 찢어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림맹에서 나와 포목점에 들러 찢어진 옷을 대신할 옷가지를 골라 입었다.
“아이고~ 총각! 처음에 들어왔을 때는 뭔 놈의 거지가 왔나 싶었는데 이제 좀 볼만 하구마잉.”
제갈 사혁이 입는 비싼 옷은 아니었고 그냥 남들이 평범하게 입는 천옷이었지만 이신의 몸에 걸치자 싸구려 천으로 만든 옷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본새가 갖춰졌다. 그렇게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무림맹으로 다시 들어가려던 그때
“충? 충 아니니?”
누군가 충이라는 옛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아는 척하자 이신은 조용히 그 상대를 뒤돌아봤다.
“미려(美麗)아가씨?”
“설마 했는데 정말 충이구나.”
미려라 불린 여인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 선중의 여동생인 남궁 미려였다.
“정말 몰라볼 뻔했어. 남자 아이는 이렇게 빨리 크는 구나. 키는 이제 나와 거의 비슷해 졌네.”
유일하게 세가 내에서 딸인 미려기 때문에 소화와는 굉장히 친했다. 때문에 남궁세가의 식솔들 중 소가주 남궁 선중과 함께 비교적 이신이 대하기 쉬운 상대기도 했다.
“그런데 네가 어쩐 일이야? 무림맹에 다 오고?”
미려가 아는 한 이신의 운신은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미려 아가씨 이제 소인은.....”
“무엇하는 것이냐? 충. 아가씨께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이야기하다니!”
그때 거한의 사내가 미려의 앞을 가로 막으며 이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거한은 다름 아닌 미려의 호위인 수주충(壽主忠)이었다.
수주충은 태상 가주인 남궁 백의 가주재위 시절부터 있었던 자기 때문에 이신의 가문이 저지른 일도 알고 있었고 그로인해 이신을 벌레 보듯 보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수주충 어르신.”
“고얀놈! 아직도 그 머리를 빳빳이 드는 것이냐!”
수주충의 주먹이 날아오자 이신은 수주충의 주먹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러자 수주충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날카롭게 이신을 쏘아봤다.
“이 놈이 감히!”
“주충!”
미려가 소리치자 수주충의 주먹이 멈췄다.
“주충의 그런 행동 나는 용납할 수 없어.”
“하지만 아가씨 이놈은 역적의 자식입니다!”
“50년도 더된 이야기야. 충과는 관련 없잖아.”
오라비인 남궁 선중도 그렇고 또 자신도 그렇고 가문의 어른들이 썩은 환부 보듯 이신을 보는 이유가 그 역모 때문이란 것은 잘 알지만 그건 그 세대의 이야기였다.
미려는 집안 어른들의 집착을 넘어선 광기 같은 증오를 싫어했다. 꼭 일부러 화풀이를 하려는 듯 이따금씩 이신을 불러다 모질게 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신을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동정했다면 진즉에 한밑천 쥐어줘서 남궁세가를 떠나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해주어야 할 이유도 의무도 그녀에겐 없었다.
적어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문의 일원으로 받은 예절과 가르침이 이신을 향한 그 증오가 잘못 되었다고 말해주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는다. 동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격으로 대해주는 것 그것이 남궁 남매가 남궁세가의 노비 충을 대하는 태도였다.
“아가씨는 모르시겠지만 이놈의 할애비는....”
“옛날에.....”
수주충이 악에 받쳐 이야기하자 이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옛날에 말이에요. 전 수주충 어르신이 정말 무서웠어요.”
“무어야?”
“정말 크고 두려웠거든요. 기억하세요? 한 8살 땐가? 제가 길에서 고양이를 주워 키웠는데 주충 어르신이 더럽다며 발로 차버리셨잖아요. 내 유일한 친구였는데 아직 이름도 못 지어 줬는데.”
이신은 수주충의 눈앞에서 오행매화보를 펼치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제갈 사혁의 오행매화보처럼 완벽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하던 기존의 오행매화보가 아닌 상대의 마음을 제압하는 완벽한 보법이었다.
수주충의 등 뒤에 선 이신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옛날에는 당신이 정말 무서웠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당신 정말 별거 아니네요.”
그것은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며 비웃는 제갈 사혁의 미소였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