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회: 각자의 길 -->
“이놈이 어디 어쭙잖은 수를 배워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충(忠)이 아니야. 나는 이신(離身)이고. 화산파 제 1대 제자가 나의 스승이시고 훗날 내 이름이 될 거야. 당신은 영원히 주충(主忠)이지만 나는 아니야.”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
“주충!”
미려의 외침에도 주충의 주먹이 이신의 안면을 강타했다. 간신히 버텼기에 두 걸음 정도 뒤로 날아갈 정도였을 뿐이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맞았다면 정신을 잃었을 정도의 외공권이었다.
“먼저 공격한 쪽은 당신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이신은 왼발로 지면을 박차고 왼손으로 수주충의 머리를 가리키며 오른 주먹을 허리에 대고 자세를 잡았다.
수주충은 순간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살기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기세였다. 기필코 자신을 쓰러트리겠다는
“이놈 덤벼라!”
수주충은 이신을 깔보고 있었고 이신이 무엇을 하든 정면에서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타핫!”
이신을 향해 돌진하는 수주충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자기 자신을 과신하며 격돌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뭐야 이거?”
이신의 파강권을 왼손으로 잡아낸 제갈 사혁이 다른 오른손으로는 천지유벽세를 펼쳐 수주충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사부.....”
갑작스러운 제갈 사혁의 등장에 이신은 구겨진 미간을 펴며 제갈 사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뭐하는 짓이냐? 그렇지 않아도 몸도 멀쩡하지 않은 놈이.”
제갈 사혁은 자신이 이신에게 강제적으로 주입한 무공이 서서히 체화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신이 제갈 사혁의 기를 느끼듯 제갈 사혁도 역으로 이신의 기를 느낄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긴 어떻게?”
“무슨 헛소리야? 무림맹에 내 집 안방인데 내가 못 올 곳 왔냐?”
마침 때가 되어 온 것처럼 말했지만 평소에는 멀쩡하게 돌아가는 기의 흐름이 갑자기 엉망이 되자 이신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감지하여 뛰어온 것이다.
(감정기복에 따라 기의 흐름이 변하다니 이거 안 좋은데 꼭 나처럼 말이야.)
기의 흐름이 바뀐다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단전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혈관을 이용하는 이신의 입장에서 기의 흐름은 곧 혈액순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응?”
제갈 사혁은 남궁 미려의 얼굴을 본 순간 어이가 없었다. 물론 수주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남궁 미려를 왜 모르겠는가? 지금은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린 금광수와 함께 후기지수였던 것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쯤하고 넘어가지 미려.”
“그대는 누구지?”
“내 이름은.....”
“감히 누구 앞이라고 하대하는 것이냐!”
그때 수주충이 미려를 향해 하대한 것을 걸고넘어지자 제갈 사혁은 수주충을 노려봤다.
남궁세가의 미려와 수주충 그리고 이신.
자신이 아는 한 미려는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수족인 수주충이 이신을 공격했다면 아마도 이신 아니 그 빌어먹을 충과 남궁세가의 악연이 관련 된 일이 분명했다.
“너 이 새끼....”
제갈 사혁은 수주충이 이신에게 해를 끼쳐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개 주제에 자신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이신 때문에 화가 난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그 잘난 우월감에서 비롯된 썩어빠진 선민의식 때문이었다. 어른 공경과는 달랐다. 수주충은 어른이기 이전에 남궁세가의 수족이며 수족은 사람이 아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부르면 부르는 대로 행동하는 개에 불과했다.
“개는 개답게 바닥을 기어라.”
제갈 사혁이 뱀처럼 손을 뻗어 수주충의 머리를 잡자 수주충은 제갈 사혁이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얼굴이 땅바닥에 묻혔다.
“뭐... 뭐하는 짓이야!”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려는 당황했고 제갈 사혁은 그런 미려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외종형젠데 뭐 이런 일로 걸고넘어지진 않겠지?”
남궁세가를 싫어하면서 필요할 때만 촌수를 들이대며 혈연관계를 언급하는 그 모습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뭐?”
“내 이름은 제갈 사혁이고 여기 있는 이신의 스승이다.”
고모의 아들이며 현재 화산파의 제 1대 제자이며 차기 장문진인으로 낙점된 현 무림에서 가장 소문이 무성한 사내. 제갈 사혁. 무진.
“충의.....”
충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제갈 사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신이다. 이 아이는 충 따위가 아니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이 패성각을 펼쳐 수주충의 머리를 밟아버리려 했고 이신은 재빨리 수주충의 머리를 빼내어 패성각의 궤도에서 수주충을 구해냈다.
“사부!”
결코 도덕적 사상 때문에 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제갈 사혁이 너무 강하게 또 극단적으로 상황을 몰아붙이자 이신 나름대로 제갈 사혁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행동일 뿐이었다.
이런 면에서 이신은 제갈 사혁보다 나았다.
“그래. 내가 조금 과했다. 인정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은 전혀 아니었다. 죽이지 못해 아까워 미칠 것만 같은 그런 눈이었다.
“미려. 내 무례를 용서해줬으면 한다.”
제갈 사혁이 미려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미려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화산파의 제자. 외종형제 그리고 충 아니 이신.
“뭐.... 조금 일이 복잡해졌지만 우리 쪽도 잘한 건 없으니까. 좋아요. 사과를 받고 또 개인적으로 충 아니 이신에게 사과하겠어요.”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도 억지로 이해시키는 곳이 바로 강호.
지금 미려가 할 일은 고개 숙여 자신에게 사과하는 제갈 사혁의 사과를 받아주는 일이다.
“좋아. 그럼 해결 된 거지.”
“네. 해결 됐습니다.”
타인이 보았을 때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지만 강호란 이런 곳이었다.
자신의 수족을 능멸한 것은 곧 그 주인을 향한 것과 동일하다. 보통 이럴 경우 그 상대가 누구든 죽자고 덤비는 게 보통이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먼저 상대가 숙이고 들어오면 군말 없이 받아줘야 한다. 숙이고 들어왔는데 죽자고 덤비면 정말 죽자고 싸우는 곳이 바로 강호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그러네.....)
제갈 사혁은 미려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게 조금 껄끄러웠다. 지난 생애에서는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외종형제라는 사실은 제갈 사혁만 알고 있었을 뿐 미려는 알지 못했다. 외종형제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굳이 말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제갈 사혁이 아닌 화산파 무진으로 무림맹에 존재했었고 미려 역시 그저 남궁세가의 미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외종형제며 이신의 사부이며 방금 전의 망나니 같은 행동.
“이신. 이름 멋지구나. 또 보자.”
미려는 요조숙녀 같이 여린 겉모습과 달리 정신을 잃은 수주충의 거대한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에 짊어지고 자리를 떠났다.
“안녕히 가세요. 아가씨.”
일이 조금 꼬였지만 그래도 미려에게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신을 보며 제갈 사혁은 이신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아얏!”
“아가씨는 뭔 놈의 아가씨! 네가 무슨 저 집 종놈이냐?”
제갈 사혁은 이신이 남궁세가와 연을 맺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러니 미려에게 아가씨 아가씨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똘망 똘망한 눈으로 하지만이라며 어쩔 줄 몰라하는 녀석을 보니 제갈 사혁은 미칠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강권을 날리려 한 녀석이 또 금세 평소의 순둥이로 돌아와 버렸으니 이쯤 되면 무공을 가르쳐야 할지 정신 상태를 넘어 근성을 뜯어고쳐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생을 도련님 아가씨 하던 녀석이 반년도 안 되서 변할 리 없지.)
너무 제자를 싸고 감싸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대접받고 살게는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파강권을 막았던 왼손에 감각이 전혀 없었다. 뇌전으로 인한 마비였다.
분명 무공에 대한 재능은 없다. 재능이 있었다면 애초에 격체전공을 이용한 무공주입 같은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정말 뭐가 있는 놈이란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런데 청하 아가씨는요?”
“아 진짜! 그 놈의 아가씨 소리 좀 작.......”
아가씨 어쩌고 화를 내더니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뒤도 안돌아보고 왔던 방향으로 뛰어 가버렸다. 이신의 입에서 아가씨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싫지만 앞에 청하라는 고유명사가 붙으면 얘기는 다르다.
“이런 미친 망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리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급한 일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난처한 듯 보이면서 능글맞은 표정으로 두 손 모아 비는 제갈 사혁의 모습에 청하는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이 일로 저한테 한번 빚지신 거예요.”
“네.”
미소 지으며 말하는 청하를 보며 제갈 사혁도 기분 좋게 미소로 답해주었다.
한가롭게 무림맹을 돌아다니던 두 사람은 곧 열람판에 도착했고 그 곳에는 출사들의 임무가 걸려 있었다.
사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슬슬 출사로서의 명성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제갈 사혁은 과거 잡아드렸던 악인들의 이름을 찾았다. 이왕이면 과거 잡았던 놈들을 잡는 게 수월하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종노용이 어디있나? 개 잡노무 쉐퀴 우리 노용이.)
인간백정으로 이름난 산적 종노용의 이름을 찾던 제갈 사혁은 불현 듯 열람판 제일 상단에 자리한 이름을 보았다.
재야무사 양전. 1급.
양전이라면 사부를 죽이고 떠돌아다니는 무림인이었다. 당시 오대주들 중 한명이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어떤 문제가 조금 있었다. 제갈 사혁과 같은 출사들은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지만 아무튼 조금 문제가 있어서 당시 무림맹이 소란스러웠다.
(어쭈?)
종노용의 열람패를 집어든 제갈 사혁은 양전의 열람패도 집어 들었다.
자만 혹은 자신감이라 불러도 좋았다. 인간백정 종노용 같은 놈을 잡아드려 명성을 쌓는 것보다 이왕이면 거물을 잡는 게 나았다.
“그 손 놓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놀랍게도 일전에 곤륜파에서 만난 혜성이 있었다.
“미쳤냐? 곤륜계집.”
“너 이.... 화산망종!”
혜성의 검이 제갈 사혁의 목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 있던 수 십 명의 출사들이 혜성과 제갈 사혁의 중심에서 벗어났다.
“백호대주다!”
“이거 오늘 한 놈 죽겠는데.”
말 그대로 목에 칼이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땀을 흘렸다. 검에 서린 내공은 정말이었기 때문이다.
(넌 왜 이렇게 날 싫어하냐?)
“네놈 싫어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싫어하는 거지.”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혜성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만하시지요. 선배님. 장난치고는 보는 이들의 눈이 많습니다.”
“무당의 청하”
청하의 이름이 혜성의 입을 통해 나오자 곳곳에서 청하에 대한 반응이 나왔다.
“무당의 여고수라는?”
“용화장에서 마교의 꼬리를 잡은 걸로 유명하잖아.”
청하는 포권을 취하며 선배인 혜성에게 예의를 갖췄다.
“갈사 아니 제갈 사혁 소협과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선배님은 백호대주십니다. 칼을 거둬주시지요.”
혜성 입장에서도 가증스러운 제갈 사혁보다 청하가 예의를 갖춰 중재 나서니 체면이 살 수 있다 판단해 일단 검을 거뒀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