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경솔했음을 사과하지 청하. 하지만 양전과 관련해서는 이미 오대주 중 한명이 맡기로 되었다네. 그러니 화산파의 무진은 양전의 패를 넘겨주었으면 좋겠는데?”
화산파의 무진이라는 이름까지 대가며 혜성이 공식적으로 양도를 권하자 제갈 사혁은 영 껄끄러웠다. 뭐 양전을 굳이 자기가 잡지 않아도 되지만 뭔가 좀 껄끄럽다고 해야 하나? 상대가 혜성이라서 그런 것만은 꼭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양전이라는 이름이 가진 사건은 뭔가가 있었다.
“일주일.”
“일주일?”
“딱 일주일만 시간을 준다면 양전을 잡아올게.”
망지성의 호위들을 단숨에 무력화 시킨 화산망종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양전을 잡아버릴 것 같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혜성 입장에서도 이 내기는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들 놀고 싶지 일하고 싶겠는가?
“좋아. 일주일이다.”
그녀의 곧게 낀 팔짱은 나름의 자존심이었다.
혜성이 돌아가자 제갈 사혁은 열람판에서 익숙한 이름을 또 하나 찾아 꺼내들었다.
“청하소저도 하나 하시죠. 이놈이 아주 극악무도한 놈인데 용팔이라고 사파놈인데 중소방파의 제자들을 죽이고 다니는 놈이에요. 근데 이놈이 효자 중에 효자라서 어머니 기일만 되면 고향집으로 꼭 가니까. 가서 한번 잡아보세요.”
청하는 열람판에서 그것도 1급이나 되는 임무를 골라낸 제갈 사혁이 내심 놀라웠다.
“역시 갈사 소협은 대단해요.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을 가지시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청하의 표정에는 질투가 서려있었다.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음에도 상대와 가늠할 수 없는 차이를 느꼈을 때 보이는 일종의 열등감이었다.
“자~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사람마다 성장속도는 다른 법입니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며 10년 후가 다른 법이죠.”
그 말을 듣고 쉽게 풀릴 리 없었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며 10년 후가 다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갈사 소협은 10년 후에도 변함없겠죠.)
변함없이 강할 테니.
일이 이렇게 되자 제갈 사혁은 짐을 꾸렸다. 짐이랄 것도 없이 그냥 화산파에서 제공하는 침낭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사부.”
“다 챙겼냐?”
“그런데 돈이 없는데요.”
여행을 가려면 여비가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워낙 흥청망청 써대기 때문에 돈이 넉넉할 리 없었다. 하지만 무림인이란 자고로
“오다가다 한 놈 걸리겠지.”
“네?”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이신을 보며 제갈 사혁은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이 말뜻을 알았을 땐 어엿한 무림인이란다.”
오다가다 한 놈.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다.
호기롭게 양전을 잡으러 떠나는 길이지만 양전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귀주성(貴州省)이란 말이지.....”
귀주지역은 흑사련의 지역이다. 양전은 정파출신의 무림인이지만 스승을 죽인 죄로 쫓기는 중이니 사파에 붙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파라 하더라도 사제관계에 대해서는 정파와 그 뜻이 같다.
무림공적만 아닐 뿐 양전이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귀주라.”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원래는 오대주의 손에 넘어간 사건이고 제갈 사혁이 아는 한 원래는 백호대주 혜성의 손에서 해결이 된다는 점이다.
“걔는 어떻게 양전을 잡은 거야? 그 우락부락한 부하 놈들 이끌고 사파 땅에서 난리 쳤을 린 없을 테고.”
오대주 중 한명이 움직였는데 이를 흑사련에서 모를 리 없었을 테지만 실제로 제갈 사혁이 기억하는 한 별 문제없이 양전을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흑사련의 이목을 끌지 않았는지가 최대의 의문인 이상 양전 한 놈 잡자고 이 지역을 들쑤실 수는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흑사련 개 새끼들 목을 다 따버리고 싶지만......”
흑사련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 지난 날 제갈 사혁을 죽인 청사단도 흑사련 아버지를 죽인 놈들도 흑사련.
“사부. 저 먼저 잘게요.”
마차로 긴 시간을 여행하는 게 피곤했는지 이신은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그런 이신을 보고 있으니 이 녀석은 고민이 없어서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흑사련은 흑사련이고 지금은 양전 놈부터 잡아야 하니까.”
일단 양전에 대한 사전 정보가 필요했다. 무림맹 정보조직에 의해 받아낸 정보라고는 양전의 나이와 그의 스승에 관한 것이었다.
“어디보자.”
양전(暘全) 스물일곱이며 스승은 화접(火蝶)이다.
양전은 아기 때부터 화접이 길러냈으며 화접은 일찍이 명성을 날린 창의 달인으로 유명했다. 그 성격은 차분하며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인데.”
겉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여기서 피해자는 스승이고 가해자는 제자인데 스승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아기 때부터 고아인 양전을 길렀다면 이건 사부(師父)를 떠나 부모(父母)이지 않은가?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패륜아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짐승도 아니고 길러준 스승을 죽이다니 뭔가가 정말 밑도 끝도 없었다.
“인과관계에 있어서 원인 없이 결과만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사건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있어.”
양전에 대해서는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이를 테면 주변인물 탐색부터가 순서였다.
“마부양반 방향 좀 바꿉시다.”
제갈 사혁은 급히 마부에게 방향을 바꿀 것을 요청했고 마부는 호남성으로 길을 틀었다.
“주변인물부터 찾아야겠어.”
흑사련의 지역인 귀주성에서는 정파로 통하는 그 어떠한 정보도 전달 받기 힘들었다. 일단 호남성으로 가서 정보를 받은 뒤 양전이 아닌 양전 주변인물을 찾는 게 순서였다. 이래놓고 양전을 일주일 안에 잡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다니 어림도 없었다.
“객기 부리지 말 걸 그랬나?”
후회해봐야 늦은 일.
들리는 바로는 화접과 양전의 창은 유연성이 뛰어난 창이라고 한다.
변화무쌍하며 그 끝이 닿는 곳을 알 수 없는 신비한 창. 검으로 치면 연검 정도겠지만 창이 그렇게 부드럽게 휘어진다면 그것은 분명 보통의 물건이 아니다. 분명 그것을 만들어낼 재주를 가진 장인이 있을 테고 그쪽으로 조사를 위해 사람을 보내면
“무언가 알 수 있겠지.”
제갈 사혁은 망화각에 전서를 보냈다. 강호 무림에 이름난 장인은 무림고수보다 유명한 법이니 말이다.
호남성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호남성에서 가장 싼 객점에 자리를 잡았다. 오다가다 한 놈 걸리겠거니 했는데 무슨 놈의 치안이 좋은지 산적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범죄와의 전쟁이냐?”
돈을 구할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산파든 가문이든 일단 돈을 받으려면 시간이 걸렸다. 짐에서 옷을 꺼낸 제갈 사혁은 평소처럼 새하얀 고급 도포가 아닌 회색의 그저 그런 도포를 입었다.
“이신. 이신.”
“으음....”
이신을 흔들어 깨우자 두 눈을 비비며 간신히 눈을 떴다.
“나가자.”
“어디로 가는데요?”
어디로 가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꿈과 희망이 있는 곳.”
남자의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도박장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도박장이 아닌 윤락업을 동시에 하는 그런 매우 건전하지 못한 곳이었다.
“손님. 애들은 출입하기가 좀....”
우락부락한 호위들이 가게 입구에서 제갈 사혁을 제지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이신 때문이었고 제갈 사혁은 이신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회공부다.”
사회공부 구색은 참 잘 맞았다.
“하지만 저희 입장도.”
“잠재 고객이다. 미리 익혀둬야지?”
제갈 사혁이 안으로 들어가자 여느 도박장과 다른 향이 났다. 기녀들의 가식이 만들어 내는 달콤함과 사내의 꿈이 썩어버린 그런 냄새가 뒤섞여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었다.
제갈 사혁이 자리를 잡자 기다렸다는 듯 기녀 두 명이 제갈 사혁의 팔짱을 꼈다.
“어머 잘생긴 남자네. 거기다 이 아이는 설마 아들?”
“대협. 소녀가 시중을 들어드리겠어요.”
아들이냐며 되지도 않는 농담을 하는 구석이나 대협이라 부르며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나름의 수법이었다.
“저기.... 사부.”
“침착해. 이것도 다 수행이니까.”
얼치기처럼 장난삼아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곳에 내성이 생겨야 오히려 나중에 큰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아이인 이상 이러한 분위기에 거부감이 들것이고 그렇게 되면 훗날 어른이 되어도 이러한 곳을 좋아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금자 여섯 냥을 걸겠소.”
평소에는 어중이 떠중이처럼 도박을 하면 돈을 잃는 제갈 사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내가 한번 흔들어보겠소.”
주사위를 흔들어보겠다며 잔에 든 주사위를 들어 흔든 제갈 사혁은 그것을 야바위꾼에게 넘겨주었다.
“그럼 시작합니다.”
제갈 사혁은 한번 주사위를 만졌을 때 내공을 실어 모종의 수작을 부렸다. 이쯤 되면 도박이 아닌 사기였다.
홀짝내기에서 하물며 이런 거대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니 제갈 사혁도 사기를 부릴 수밖에
“홀이요? 짝이요?”
“홀.”
그 순간 제갈 사혁의 내공을 남은 주사위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한 제갈 사혁은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니요. 짝으로 하겠소. 남자는 뭐니 뭐니해도 짝이 맞아야지 그렇지 않소?”
짝이 맞아야지라고 말하면서 제갈 사혁은 옆에 있는 기녀들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어머~ 대협 우리는 둘이고 대협은 한명인데 어찌 짝이 맞겠어요.”
“맞아요.”
얼핏 보면 기녀들과 한가하게 놀고 있는 듯 보이나 제갈 사혁과 마주한 야바위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홀수인 주사위를 짝으로 바꿨는데 막판에 제갈 사혁이 말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짝이요.”
잔을 들자 두 개의 주사위가 만들어낸 수는 짝이었다.
“하하하하~ 운이 좋았군.”
우연히 맞췄다는 듯 능글맞게 허풍을 떨며 제갈 사혁은 도박에 건 돈의 두 배를 벌었다.
“역시 인생은 한방이야. 그럼 나는 이만 물러나겠소.”
돈을 따자마자 제갈 사혁은 얌체처럼 자리를 내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기녀들이 따라 붙었다.
“대협 돈을 따셨으면 즐기셔야죠.”
“그래요. 저희한테 술도 좀 사주시고.”
비에 젖은 새끼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제갈 사혁은 미소를 지었다. 뻔히 보이는 수법이었다. 돈을 딴 사람에게는 술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이용하게 만들어 돈을 탕진하게 만들려는.....
결국 도박판에서 일어날 땐 무언가를 얻을지 모르나 도박장을 나갈 때는 빈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도박을 그만하겠다며 판을 일어나는데 기녀가 달라붙어 온갖 애교를 다 떨며 술을 사달라하면 남자는 특유의 허세를 부리며 기녀에게 술을 사주게 되고 당연히 도박장을 나갈 때는 빈손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 술은 얼마든지 사주마. 하하하하.”
“사부.”
“너도 뭐 좀 먹어야지?”
평소와는 다른 사부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지만 일단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는 고프니까.
이호를 켜는 기녀의 가느다란 손끝에서는 귀를 간질이는 음색이 울려 퍼져 음식 맛을 더 좋게 만들었다.
“대협. 혼자만 드실 거예요?”
“저희도 좀 주세요.”
“아 그런데 여기도 하오문 관활인가?”
“네 무슨 소리세요?”
“아니 그렇잖아. 이렇게 큰 환락원이 개인 소유일 리 없으니까. 자 마셔마셔.”
제갈 사혁은 기녀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자 술잔의 술이 요동치며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내는 진풍경을 연출했고 이를 본 기녀들은 제갈 사혁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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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