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여기 책임자 불러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자 제갈 사혁의 양 옆에서 아양을 떨던 기녀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둘러 방을 나갔다.
무림인이라고 해서 피하는 게 아니었다. 이곳이 하오문의 관할이란 점을 알고 있는 무림인이라는 점이 이 방에서 도망쳐야할 이유였다.
“뭐해 계속 켜야지?”
이호 소리가 멈추자 제갈 사혁은 기녀에게 눈치를 주었고 이호를 켜던 기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연주를 계속해나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먹다 말고 제갈 사혁의 눈치를 보는 이신을 향해 제갈 사혁은 말했다.
“이신 이제부터 정말 사회공부다.”
“네?”
그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 됐다. 곧 하오문 책임자로 보이는 노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고 방 밖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협. 이리도 무례하게 본문을 찾으시다니 아무리 강호가 하오문이 업신여겨진다고는 하나 이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꽤나 강단 있는 모습에 제갈 사혁은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밖에 있는 놈들 다 물려.”
“대협 그는 불가합니다. 대협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사온데.”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하오문 책임자에게 던져주었다. 그 검은 다름 아닌 호황이었다.
오리고기를 무식하게 물어뜯고 손가락을 쪽쪽 빨며 제갈 사혁은 우월감이 찌든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이 물건으로 알아 맞춰봐. 그럼 저기 뒤에 있는 놈들 다 물러주고 싶을 거야.”
호황은 리(唎) 겸도(鉗刀) 78번작이다. 만들어진지는 5년도 안된 물건이라 이름 난 명검은 아니지만 유명한 검이다. 바로 화산파 무원의 병기이기 때문이다.
곧 하오문의 부하 한명이 호황을 가져갔고 한 시진 정도 지나자 하오문 책임자가 자리를 떴다.
“화산파 무원의 것입니다.”
“화산파? 저자가 그 무원이란 말이냐?”
“그것이.....”
부하의 이맛살이 구겨지자 덩달아 하오문 책임자의 표정도 구겨졌다.
“무원은 병으로 인해 화산파에 요양중이온데 아무래도 이 검의 주인은 사제인 무진인 것 같습니다.”
수년 전 무림 최고의 기재로 이름난 무원이 아니라면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화산파는 항렬상 10대가 많이 포진 된 애송이들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하오문에 들어와 생떼를 부린 것도 그쪽이니 내쫓아버리면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뭐?”
“들리는 소문으로는 무진은 화산파의 차기 후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제 약관을 조금 넘긴 제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내어줄 문파는 없었다. 20대라 해봐야 그 무공의 수준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30대는 되어야
“무진의 소문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천에서의 괴인을 물리쳤고 칠망검과 싸워 칠망검을 은퇴시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칠망검을 은퇴시켜?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그 양반이 얼마나 훌륭한 양반인데.”
엄밀히 말하면 칠망검을 은퇴시킨 건 아니지만 소문이란 게 부풀려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정인군자인 무원과는 다르게 그의 성정은 사악하며 패악하기 이를 때 없다고 합니다.”
사악과 패악의 두 단어가 들어간 이상 이미 놈은 사람이 아니었다.
“개망나니 같으니!”
어떡해서든 비위를 맞춰야하는 짐승이었다.
제갈 사혁이 있는 방으로 들어간 하오문 책임자는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조아렸다.
“귀인을 몰라보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사과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제갈 사혁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알면 됐어.”
아주 당연하단 듯 받아드리다니 뭐 이런 천하의 개 쌍놈이 다 있다 싶었다. 속으로 이를 갈며 하오문 책임자는 최대한 비굴한 표정으로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분부하실 일이라도?”
“양전과 화접에 대해서 그리고 양전이 귀주에 있다는데 그것 좀 알아와.”
강호 무림에 있어서 요즘 가장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있는 양전에 대해서 화산파의 제자가 찾는다는 말은 곧 무림맹의 척살명과 다름없었다.
“무림맹의......”
“그렇게 됐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하를 세 가지로 나눈다면 정도 마도 사도다. 그 중 한 세력이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최근까지 보유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하오문이라지만 양전이 유명해진 건 스승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공식적인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니 양전에 대한 자료 자체가 없었다. 남은 건 그의 스승인 화접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가장 고급스러운 정보라면 화접의 미인도였다.
“효성황후(孝成皇后) 조비연(趙飛燕) 뺨을 치겠는데 언제 그린거야? 30년 전?”
“2년 조금 넘었습니다. 신강의 화생이 그 미모에 반하여 3일 밤낮으로 미인도를 그리기 청해 그렸다고 합니다.”
“뭐?”
2년 전이라 해도 화접의 나이는 2년 전 딱 지천명이다. 오십이란 말이다. 아무리 무림인의 노화가 느리다고 하나 이정도면 주안술을 익혔다고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화접이 주안술을 익혔다면 마교로 몰려 척살 당했을 것이다. 엄연히 정파인이니 말이다.
“이건 뭐야?”
미인도를 내려놓은 뒤 제갈 사혁은 붉은 천포에 들어있는 물건을 흔들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같은 걸 모아뒀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라? 보통 여러 말 같잖은 소문이 판치는 무림이지만 소문만큼 정확한 것도 없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화접의 정인(情人)에 관한 것이었다.
“정인이라.... 하긴 이 정도 미인인데 애인이 없을 리 없지.”
“하지만 그 소문이 워낙 뜬금없는 지라.”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종이를 펼치는 순간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이게 말이 돼?”
“그러니까 뜬금없는 소문 아니겠습니까.”
화접의 정인이 이자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강서(江西)가 누구인가? 개방의 장로이며 무림맹 맹주가 아닌가? 게다가 강서는 결혼을 한번 한 몸이었다.
개방도가 되기 위해 재산도 버리고 속세에서 얻은 모든 것들을 버렸다지만 결혼했던 몸이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화접의 죽음과 그의 제자 양전 그리고 무림맹주.
무엇하나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왜 양전을 잡아드리려 하는 걸까? 무림맹주 강서와 화접이 정말 내연관계라면 양전을 잡지 않는 게 좋았다.
지금처럼 양전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스승인 화접에 대해 조사가 들어갈 테고 그렇게 되면 하오문이 쥔 이 근거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부각되게 된다.
“잠깐.... 그래서 오대주들이였나?”
오대주들이라면 일반적으로 제갈 사혁과 같은 출사들보다 정치적인 측면이 컸고 무림맹주의 치부 정도는 입다물어줄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한 단체의 수장이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공공연히 떠들어댈 부하는 없다.
이렇게 되면 양전을 때려잡는 걸로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 제갈 사혁은 화산파로서 정치적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약점이든 무엇이든 무림맹주의 옷에 드러난 실밥이라면 일단 잡아당기고 봐야했다.
“별게 아니라면 그냥 끊어질 테고 뭔가 있다면 훌러덩 벗겨지겠지.”
무림맹주에게 원한이 있는 것도 그가 싫어서도 아니다. 다만 알고 있어서 나쁠 진실 같은 건 없다.
제갈 사혁이 오만하게 손가락을 까딱 거리자 하오문 책임자는 가랑이라도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양전이 정말 귀주에 있는지 조사해봐.”
“네.”
“그리고 서찰을 하나 써줄 거야. 내가 지금 가진 게 없거든 제갈세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이다. 재당숙 어르신이 값을 쳐드릴 테니 그쪽에 수고비를 받으면 될 거다.”
“가.... 감사합니다.”
내심 이 어린노무 자식이 정보만 먹고 튀면 어쩌나 싶었던 하오문 책임자로서는 대금을 지불하겠다는 제갈 사혁이 달라보였다.
그것은 착한 놈이 나쁜 짓을 하면 그 죄가 크게 보이고 나쁜 놈이 착한 짓을 하면 그 선행이 크게 부각되어 보이는 효과와 같았다.
“가자. 이신.”
이신을 데리고 하오문의 도박장에서 빠져나온 제갈 사혁은 이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보고 배워. 이게 강호를 살아가는 법이다.”
제갈 사혁은 무공뿐만 아니라 강호를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이신에게 가르쳤다. 무공만 가르친다고 스승이 아니다. 그건 그냥 선생이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방법을 가르치는 자야말로 진정 스승이라 할 수 있었다.
“꼭 저렇게 해야 해요?”
“선택하는 거지. 저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건 네 몫이야.”
강서가 개방도가 된 것은 20여 년 아니 약 30여 년 전이다. 제갈 사혁이 알 수 없는 과거인 셈 강서에 대해서는 어떠한 예지력도 발휘되지 않았다. 또한 양전의 이름에도 예지력이 발생되지 않았다. 양전에 대해서는 오대주에게 잡혔다는 기억만 있을 뿐 그 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이게 편한 것 같으면서도 참 까다롭단 말이지.”
일단 제갈 사혁은 강서의 과거를 추적했다. 워낙 유명한 양반이다 보니 그가 호북 무한 출신이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3일 후 호북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망화각으로부터 전서를 받을 수 있었다. 마침 화접과 양전의 창을 만든 대장간이 무한에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무한은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특히나 상업이 발달 된 곳으로 유명했다.
유수(流洙) 대장간. 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그리 유명한 대장간은 아니었다.
“계시오?”
제갈 사혁이 기름때가 낀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자 흰머리가 하얗게 선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철을 다루고 있었다.
“장인께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척 봐도 손님은 아니로구만.”
“부양(賻暘)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부양말인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구만.”
부양은 다름 아닌 무림맹주 강서의 옛 이름이었다.
화접과 양전의 창을 제조한 장인을 찾아왔으면서 제갈 사혁은 어째서 화접에 대해 묻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화접의 유일한 단서가 될 이곳과 강서의 고향이 동일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는 남자의 눈치였다.
“부양에 대해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네.”
아무리 현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맹주라지만 20년 아니 이제 곧 30년이나 되어가고 개방도에 이름도 바꿔버렸으니 무림에 깊게 관여된 사람이 아닌 고향사람으로서는 강서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과거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것을 내가 왜 말해 주어야 하지?”
제갈 사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 노인과 강서는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보통의 고향사람이라면 그냥 수근 거리듯 말하면 되는 것을 이 노인은 그를 보호라도 해주려는 마냥 제갈 사혁을 경계하고 있었다.
“사실은 제가 무림맹에서 왔습니다.”
딱히 무림맹에서 왔다는 증표는 없었기에 제갈 사혁은 화산파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무림인이 무슨 일인가? 부양이 뛰어난 무림인이기는 했네만......”
“그냥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절대 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니 아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하자 노인은 경계심을 풀고 있는 먼지가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부양은 이 지역에서 제법 유명한 도장의 아들이었네. 젊어서 무공실력도 대단해 도장을 크게 번창 시킬 든든한 후계자였지. 이름난 상인의 딸과 혼례도 올렸고.....”
강서가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유는 옛날 개방도로 이름을 날릴 때 혼처(婚處)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시 강서는 젊은 고수였고 여기저기서 혼처가 들어왔는데 강서 스스로 결혼을 했던 몸임을 공개함으로서 혼처를 물렀던 일이 있었다.
“부인은 어디에 삽니까?”
“후.....”
부인이라는 말에 노인은 기름때가 낀 손수건으로 콧잔등을 닦았다.
“변고(變故)였지 젊은 사람이.”
“네?”
“집에 강도가 들었네.”
강서의 집은 유명한 도장이다. 그런데 강도가 들어? 이건 바꿔 말하면 화산파에 도적 떼가 들어왔다는 말과 동일하게 생각해도 될 정도로 어처구니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일로 부인 죽고 그 후였지 부양이 재산을 싹 마을에 풀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건.”
“그렇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묘한 것이 그 집 식솔들은 다 죽었는데 갓 태어난 아들만 사라져 버렸네.”
“아들..... 말입니까?”
“내가 그 집 아이의 장난감도 만들어주고 했다네.”
아들? 강서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행방불명이 된 아들 그리고 개방도가 된 강서?
어쩌면 강서는 행방불명이 된 아들을 찾기 위해 개방도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들? 아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아들이란 단어에서 감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