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왜 그러는가?”
“저기 말입니다. 그 아들이 장성했으면 나이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모르것네만 자네가 올해 몇 해인가?”
“스물 하나입니다.”
계산이 어려웠는지 노인은 손가락을 더해가며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한 스물 넷 정도 되지 않았나 싶네.”
양전의 나이는 스물하고도 일곱이다. 대사형 무원보다 한 살 어리고 강서의 아들보다.....
(아니지 그깟 나이야.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충 얼추 맞으면 그만이지.)
제갈 사혁은 대충 몇 살 우겨넣으면서 강서의 사라진 아들과 양전을 동일인물이라고 보고 있었다. 완전 어거지가 따로 없지만 제갈 사혁이 이렇게 때려 맞추기식으로 수사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무엇하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 틈에서 의문만 남는다면 논리적인 사고 따윈 포기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첫째 사부를 죽인 천하의 폐륜아를 오대주까지 파견해서 잡아오려는 무림 맹주.
둘째 화접의 애인 강서.
셋째 오십이나 먹었지만 화접과 같은 미인이 젊어서부터 키워낸 양전?
그래 뭐 젊고 예쁜 여자가 모성애 때문에 애를 키웠다 치자 그렇지만 왜 하필 그 어려서부터 키워낸 제자가 스승을 죽였냐 이 말이다.
무엇 때문에 사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을까?
“저기 화접이라고 유명한 창의 고수인데 여기서 그녀의 병기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무림맹주 강서의 과거에 대해서는 일단 머릿속이 복잡하니 다음으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화접 말인가? 알고 있네. 그 무기는 내가 만들어주었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이냐며 묻자 노인은 제갈 사혁을 한번 쳐다보더니 대뜸 호미에 기름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갈 사혁의 가슴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자네 부양이야기도 그렇고 화접이야기도 그렇고 혹 부양이 관련된 사건이란 게 죽은 화접에 관한 것인가?”
강서의 이야기와 화접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제갈 사혁은 침묵했다.
“화접을 죽인 건 양전 그 아이가 아닌가? 부양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노인은 제갈 사혁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리고 화접을 죽인 건 양전인데 그 일이 강서와 관련 있냐며 묻는 그 한마디에 제갈 사혁은 확신을 가졌다.
강서 아니 부양이었던 시절부터 화접과 강서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그렇다네. 부양의 도장 문하생 중 하나였다네 화접은.....”
“두 사람 서로 친했습니까? 저 그러니까.”
“그거에 관해서는 모르겠구만 저기 저 포목점에 한번 가보게나 그 집 주인이 도장 문하생이었으니까.”
노인이 소개해준 포목점 안으로 들어가자 무림맹주 강서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50대 남자가 제갈 사혁에게 녹차를 내주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 그래! 화접과 부양은 연인관계가 맞네. 도장어른들은 몰랐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지.”
도장 어른들이라고 하면 즉 그 집안의 어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 관계 때문에 부양은 다른 처자와 결혼했지.”
“대부(大父) 말입니까?”
옛날부터 의부모나 의형제를 두면 그 사람의 인생이 술술 풀린다하여 종종 부모나 형제의 인연으로 서로 피한방울 안 섞인 사람들끼리 가족관계를 맺는 일이 있었다.
“신강에서 크게 장사를 하던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부양의 대부였네. 집안끼리 친하다보니 당사자들과 관계없이 혼인 된 거지 원래 결혼이란 게 집안 어른들이 밀어붙이면 끝나지 않는가.”
정략까진 아니더라도 조금 잘 사는 집안끼리는 심심치 않게 미래가 약속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후에도 화접과 부양은 연인관계였습니까?”
“그렇다네 사실 우리 도장 동문들은 화접과 부양을 돕고 있었네. 부양이 사랑한 건 화접이지 본처가 아니야.”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젓는 포목점 주인의 모습에서 부도덕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이어진 연인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이라 말하는 듯 보였다.
“강도가 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법 큰 도장이었다고 하던데....”
제갈 사혁이 알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였다. 이 지역에서 제법 알아주는 도장이라는데 강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강도가 아니네 흉수가 찾아온 거지.”
“흉수요?”
“도장이라해도 힘을 앞세워 먹고 사는 곳이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적이 많았어.”
그런데 왜 대외적으로 강도가 들었다고 소문이 난 것일까?
“떳떳하지 못한 일로 돈을 벌고 있었다네. 물론 나도 그 일을 거들었지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진실을 밝힐 수도 그렇다고 복수를 할 수도......”
포목점 주인은 조심스레 바지를 살짝 내려 허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실 뭉치처럼 한번 꼬여버리면 복잡하게 꼬이는 게 이 바닥이다 보니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다지만 그럴수록 도장이든 문파든 힘을 길러야 했다.
“강... 아니 부양은 그때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습니까?”
“술을 마시고 있었다네. 나 그리고 여러 문하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정말 한심해서 돌아버리겠다는 표정으로 포목점 주인을 쳐다봤다.
“그럴 일이 있었네. 그 날은 부양이 화접의 곁을 떠난 날이었으니까.”
“.......”
“아무리 사랑해도 그는 가정이 있고 아이는 점점 자랐네.....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지.”
나름의 결단이라는 건가? 하지만 그 결심을 한 날 하필 변고가 생기다니 기구하다 못해 딱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부양은 재산을 문하생들에게 나눠주고 떠나버렸네. 그 덕에 이렇게 작은 가게라도 열어 밥벌어먹고 살지만 벌써 오래된 일이지.”
“화접은 어떻게 됐습니까?”
“화접은 부양과 헤어진 날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네. 가끔 대장간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던데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조용히 떠난다들었네.”
제갈 사혁은 화접이 키운 양전이 무림맹주 강서의 잃어버린 아들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접이 양전을 어떻게 키우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전혀 풀리지 않았다.
강서의 집에 변고가 생긴 그날 화접은 강서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고 그 길로 사라졌다?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이 확실하게 된 상태에서 강서의 아들과 화접에 접근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양전은 강서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럼 또 이야기가 원점이었다.
양전은 화접을 왜 죽였는가?
“미치겠구만 이거 그러기에 젊은 여자가 애는 왜 키워......”
그때였다. 제갈 사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의문 하나.
“저기 말입니다. 아기는 혼자 못 키우죠?”
“젊은 양반이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아니 그러니까. 아기는 혼자 못 키우죠? 젊은 여자라 하더라도”
“아무리 여자라고해도 육아 경험 없는 여자가 혼자 키우긴 힘들지 거~ 당연한 거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양전을 화접 혼자 키웠을 리 없었다. 이렇게 되면 화접의 행보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필요했다. 양전이 아기였을 무렵 화접에 대한 것 말이다.
화접은 미인이고 미인의 행보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이목을 끌면 반드시 그 기록이 남기마련 제갈 사혁은 부채를 펼치며 명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 화접의 드러난 행적을 쫓던 중 제갈 사혁은 화접이 기루에 다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젊은 여자가 기루에? 그것도 화접 같은 무림인이? 설마하니 몸을 팔진 않을 테고.)
제갈 사혁은 백호대주 혜성에게 약속한 7일의 마지막 6일이 되는 날까지 화접이 들었다는 기루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라 화접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고 점점 제갈 사혁은 지쳐갔다. 그러던 중 호남성의 그 하오문 책임자가 수소문해주어 간신히 오래전 은퇴를 한 폐기녀가 되어 지금은 기루의 기생들을 책임지는 여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기방에 들르자 기녀들은 이신의 볼을 꼬집으며 이신을 귀여워해주었다.
“어머 너무 귀엽다.”
“몇 살이야?”
“이것 좀 먹어봐. 얘.”
그런 광경을 뒤로하고 제갈 사혁은 자신의 옆에 자리한 기녀도 무르고 눈앞에 있는 늙은 기녀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 나이에 사내의 술을 받다니 호강하는 군요.”
“화접에 대해 알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여사님.”
“천한 기녀에게 여사라니요. 당치 않아요. 공자.”
여주인은 40대 중반이지만 꽤나 애교가 많은 여인이었다. 성격도 둥글둥글 할 것 같아 비위 맞춰주기 편한 사람이었다.
“화류계에서 이름 있는 분 여사님이라 불리기 충분하십니다.”
제갈 사혁이 연애경험이 미천하기까지 하다고는 하나 비위 맞춰줘서 싫어할 여자는 없다는 세상의 진리는 정도는 꿰고 있었다.
“그런데 화접 언니는 왜 찾으시는 거예요?”
말하는 것을 보니 아직 화접에 대해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 보였다.
기루란 무림과 세상의 중간에 선 곳이다. 달리 화접에 대해 찾아보지 않는다면 아직 모를 만도 했다. 하지만 조사를 하는데 있어서 화접의 죽음을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무림맹 차원의 조사입니다. 워낙 특이한 분이시다 보니 정보가 필요해서요. 그냥 과거에 행적이나 당시의 성격 뭐 그런 가벼운 것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화접 언니는 조금 특이한 분이셨어요. 아름답고 또 조금은 괴팍했죠. 지금 생각해도 참 별나요. 여자가 기루에 몇 번씩 찾아와. 젖동냥을 했죠. 저도 몇 번 모유수유를 했고요.”
“모유요? 모유는 아이를 낳아야.......”
“꼭 낳아야 모유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낳아야 나오는 건 아니라는 말에서 순간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 제갈 사혁은 곧 그 괴리감에 정체를 깨닫고 술잔을 비워 자신의 입을 막았다.
“언니의 아이는 아니었어요. 언니의 아이였다면 우리를 찾아 올 리 없었죠.”
“누구의 아이라고 하던가요?”
“그런 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이곳은 사연 많은 여자들이 오는 곳.”
그러니 당연히 물어보지 않는다?
“그럼 그 아이가 몇 살로 보였습니까?”
양전은 스물일곱 강서의 아들은 스물넷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별개라 쳤을 때 3살 차이가 난다.
“그때 그 아이는 옹아리를 하는 아기였답니다. 아기니까. 모유수유를 했죠. 다 큰 아이에게 할 리 없잖아요.”
“그게 몇 년 전이죠?”
“정확히 이십 삼년 됐어요.”
설사 대장간의 장인이 강서의 아들에 대한 나이 계산을 잘못했다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두 살까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니 여주인이 말하는 아기의 나이는 대략 두 살.
이로서 확실해졌다. 양전은 스물일곱도 아니고 고아도 아니다. 양전이 바로 강서의 아들이었다.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로서 양전을 잡아드리고 이 진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강서 역시 양전이 자신의 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오대주를 파견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서가 정말 양전의 아버지라면 자기자식을 한눈에 보고 알아볼 것이다.
“양전은 화접 언니를 정말 잘 따랐어요.”
“스승과 제자니까요.”
“양전은 화접 언니를 어머니라 불렀어요. 물론 양전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화접 언니의 아들이 아니지만.”
“그렇습니까?”
양전이 화접을 죽인 이유를 조사하려 했는데 뜻하지 않게 무림맹주와 화접의 관계 그리고 무림맹주의 아들까지 이번 사건은 조사를 하면 할수록 양파처럼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제갈 사혁이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지금쯤 제갈 사혁은 귀주로 쳐들어가 별 생각 없이 양전을 때려잡았을 것이다.
“가자.”
얼굴에 여기저기 붉은 연지가 묻어 있는 이신을 끌고 가며 제갈 사혁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양전 이 새끼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호황을 들고 가 네놈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 폐륜아 노무 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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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