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제아무리 패기 넘치는 제갈 사혁이라도 귀주성을 헤집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짐승을 사냥할 때는 굴에서 짐승이 나오게 만들면 된다. 일단 한차례의 거래로 연결점을 유지하고 있는 호남성 하오문을 이용해 귀주성에 있는 양전에게 서신을 보낼 생각이었다.
호남성의 하오문은 제갈 사혁이 떠나기 전 양전을 찾으라며 신신당부를 해놓았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양전의 소재를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계속되는 이동으로 많이 지쳐 보이는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갈 사혁은 다시 호남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구지?”
고급스러운 비단 이불을 덮고 있던 사내는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20여 년 전 어미가 죽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거나 네 놈의 아비에 대해 알고 싶다면 호남성 진해방향으로 와라.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어머니가 죽던 날이라고 못을 박아 놓은 점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점 모든 것을 조합해보았을 때 자신에 대해 무언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놈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내는 베개 옆에 자리한 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협....”
그러자 옆에서 자고 있던 나신의 여인이 사내의 팔목을 붙잡았다. 여인의 행동은 아무리 보아도 단순히 시중을 들던 사내를 떠나보내는 기녀의 행동이라 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마치 정인을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여인의 결의였다.
“늦어도 하루 안에 돌아오마. 먼저 약속한 곳에서 기다리거라.”
그렇게 사내는 또 다시 여인의 곁에서 떠나갔다.
밤에 불어오는 바람치고는 뺨을 스치는 감각이 영 아니었다.
솜털 하나하나가 잘려나가는 듯한 느낌은 마치 검상(劍傷)을 입은 것처럼 기분 나빴다.
“사부.”
“잘 보아둬라. 이 사부가 제대로 싸우는 건 한 번도 못 봤을 테니까.”
제자에게 있어서 경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의 비무를 지켜보는 것이다.
사부의 대결이란 실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준다. 같은 무공을 익힌 사부는 곧 제자의 완성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무림고수들이 제자를 두었을 때는 이미 비무에서 손을 떼거나 그 거대한 명성 때문에 비무를 가질 기회가 적어지는 노년(老年) 그런 의미에서 제갈 사혁의 제자인 이신은 운이 좋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풀숲사이에 서 있는 양전을 본 순간 제갈 사혁은 호황을 꺼내들었다. 상대가 검을 뽑았을 뿐인데 그 순간 양전은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지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창대를 부여잡으며 충동을 억제했다.
“네놈은 누구냐?”
“무림맹에서 왔다.”
“진실을 알고 있다 들었다.”
“그거에 관해선 먼저 할 일부터 해야지.”
그 순간 칼날처럼 뺨을 스치던 바람이 멈췄다.
실로 엄청난 살기였다. 그 살기는 단순히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귀의 살기와는 달랐다. 증오였다. 그것도 자신을 향한 증오. 하지만 양전은 눈앞에 보이는 그를 오늘 처음 보았다.
“나를 아는가?”
“오늘 처음 봤다.”
“!”
처음 본 자에게 이유도 없이 이 정도 증오심을 품다니 눈앞에 있는 사내는 참으로 편협(偏狹)하거나 그게 아니면 위험한 자였다.
제갈 사혁이 먼저 지면을 박차자 그 첫발에 실린 공력은 잔잔한 지면에 먼지를 일으켰다.
양전의 창과 제갈 사혁의 호황이 부딪히는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풍향(風向)이 기이하게 꺾였다.
호황의 검격에서 벗어난 양전은 일격의 기세로 창을 찔렀다.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알려진 양전의 창답게 셀 수 없는 잔상을 만들어내며 휘어진 창은 그 수를 세는 것만으로 제갈 사혁의 이마에 땀을 맺히게 만들었다.
삼선검(三仙劍)의 검로를 활용해 양전의 창을 모두 쳐낸 제갈 사혁은 더욱 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창을 모두 막아냈지만 제갈 사혁이 입고 있는 비단 옷의 자수(刺繡) 모양이 망가지며 어금니를 악물게 만들었다.
화운검(火雲劍)을 펼치자 순간 검날에서 붉은 화기가 발하기 시작했다. 화운검은 화기를 끌어올려 불을 일으키는 검법이지만 제갈 사혁의 화운검은 달랐다. 마치 오랜 시간 불에 달궈진 쇠와 같은 모습을 띄었다.
화운검은 불을 만들어내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검법으로 크고 넒은 동작이 주를 이루지만 양전과 같이 두려움이 없는 자에게는 화운검의 기운을 발한 상태에서 방어형인 육합검(六合劍)만한 게 없었다.
여름날 거세게 내리는 삼일우(三日雨)처럼 쏟아지는 양전의 창을 육합검으로 막아낸 제갈 사혁은 화운검의 기세를 풀고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치며 양전을 압박했다.
폭우가 쏟아지듯 상대에게 휘두르는 양전의 초식은 촘촘했지만 화운검을 발한 제갈 사혁의 육합검에 막혀 모두 봉쇄가 되었다.
화운검의 화기가 양전의 창에 닿아 초식의 발현이 끝났을 땐 이미 양전의 창은 쇳물에 달궈진 듯 너무나도 뜨거웠다.
풍누종내(風累縱耐).
한 방향만을 노리고 들어오는 찌르기에 제갈 사혁은 같은 찌르기로 맞섰고 22번째 찌르기가 들어온 순간 창끝이 아닌 창대가 휘어지며 계산할 수 없는 각도의 공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도포의 실오라기가 터지며 펄럭거리는 도포자락을 피로 물들였다.
왼팔에 출혈이 일어나자 제갈 사혁은 오히려 공세를 더욱 더 강하게 일으켰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제갈 사혁을 보며 양전은 오히려 꺼져가는 촛불이라 생각해 그 불길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지만 곧 상대가 발악을 하는 게 아닌 정공을 가해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오히려 움츠리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그 기세는 그야말로 사나이였다.
공격과 방어를 규칙적으로 섞어 대응하던 제갈 사혁은 어느 순간 일정한 본새를 버리고 허초를 섞어가며 양전을 압박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허초에 속은 양전은 제갈 사혁의 돌려차기에 맞아 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제갈 사혁은 쫓아가 공중에서 아래로 과장스럽게 검을 내리 꽂았다.
재빨리 일어난 양전은 가로로 창을 휘두르며 창대로 제갈 사혁을 후려쳤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갈빗대가 부러졌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정신력을 발휘해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길게 늘어진 창대를 부여잡고 양전에게 달려갔다.
“이런!”
아무리 창을 휘두르려 해도 창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제갈 사혁의 엄청난 악력이 문제였다.
기어이 양전에게 접근한 제갈 사혁은 검 손잡이로 양전의 복부를 찔렀다. 그리고 왼손으로 양전의 얼굴을 잡았다.
“파(破)!”
제갈 사혁의 외침과 함께 양전의 내공이 등 뒤로 터져나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며 온 몸에 내공이 빠져나간 양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온몸의 내공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그 부작용으로 양전은 칠공(七孔)에서 피를 쏟으며 정신을 잃었다.
“잘 보고 배웠지?”
난전을 치룬 사부가 많이 배웠냐며 묻자 이신은 고개를 저었다.
“뭐에요. 그거...... 하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나지만 너도 너다 진짜.”
기절한 양전을 어깨에 들쳐 엎고 제갈 사혁은 근방에 있는 무림맹 소속 문파에 연락해 양전을 인솔했다.
양전을 인솔하러 온 사람은 당연히 백호대주 혜성이었다.
“정말 딱 7일 안에 잡았네.”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내가.”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제갈 사혁을 보며 혜성은 어이가 없었지만 정말 실력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산파에는 너희 같은 녀석들만 나오나봐. 무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칭찬이냐?”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혜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내심 자랑하고 싶은 듯 일부러 심기를 건드렸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이 멍청아! 그것보다 다쳤어? 이리 와봐.”
혜성이 제갈 사혁의 왼팔을 잡아당기자 출혈이 멈춘 옅은 상처가 찢어진 비단 옷 사이로 드러났다. 옷이 피범벅이가 된 것치고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상처였다.
“됐어. 이런 건 침 바르면 나아.”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상처를 금방 회복하는 제갈 사혁에게 이 정도 상처는 별거 아니었다.
“사부는 아무리 심한 상처도 하루면 나아요.”
“이쪽은 누구야?”
혜성이 이신을 쳐다보며 말하자 제갈 사혁은 한껏 더 거만한 표정으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 제자.”
“....... 정말이지.”
이제 막 20대 초반인 주제에 제자라니 정말이지 혜성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다. 이 화산망종은
“죽이지 않고 생포하려니까. 꽤 애 좀 먹었어. 죽이는 거였다면 좀 더 빨랐을 텐데.”
“다 잡아 놓고 이제 와서 허세부리는 거야?”
“이 녀석 생포가 임무완수 조건이잖아. 우리의 우두머리께서는 말이지.”
“뭐?”
우두머리라고 빙 둘러서 이야기했지만 무림맹주는 고깝게 부르는 말이란 걸 모를 혜성이 아니었다.
백호대주 혜성과 함께 무림맹에 입성한 제갈 사혁은 곧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무림맹 장로들이 있는 대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파의 장로로서 무림맹의 장로직을 수행하고 있는 도오(道悟)는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근엄하게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자만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숙.”
말은 그렇게 하지만 도오도 필사적으로 입술이 벌어지는 걸 참았다. 이번 일은 화산파의 차기 후계자가 다른 문파의 제자들보다 먼저 치고 올라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무진은 가까이 와라.”
무림맹주인 강서가 제갈 사혁을 부르자 제갈 사혁은 강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무를 잘 수행해 주어서 고맙네. 특별히 원하는 게 있다면 현실적인 한도 내에서 들어주겠네.”
달리 무림맹에 따로 무언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옛날 같으면 영약이라던가 하는 것을 원하겠지만 그런 건 제갈 사혁에게 의미가 없었다. 딱히 원하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따로 없습니다. 그저 무림맹을 위해 공을 세웠다는 명예 하나면 됩니다.”
젊은 나이에 욕심이 있을 법도 하지만 따로 원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 무림맹주와 무림맹의 장로들은 제갈 사혁의 인격을 높이 샀다.
제자의 평판이 높아지는 것은 곧 출신 문파의 위상 또한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제갈 사혁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 달리 대전에서 나온 제갈 사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강서..... 어쩐지.”
강서의 얼굴을 본 순간 어렵지 않게 양전의 얼굴을 투영할 수 있었다.
검은 구름이 달빛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는 깊은 밤 무림맹에 자리한 감옥 독방에 앉아 있는 양전은 두 팔과 다리가 봉해진 채 스스로 자결도 하지 못하고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에 커다란 자괴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괴감의 원인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래서 왜 죽였는데?”
“말하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양전의 약점과도 같은 출신에 대해 걸고넘어지자 양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스승을 죽였지? 그것도 키워주신 분을?”
“..........”
“말해.”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뭐?”
어머니를 죽였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강서의 부인을 죽인 게 화접이란 말인가?
여태까지 화접과 강서의 과거를 캐오던 제갈 사혁으로서는 살짝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버지가 헤어지자고 하자 스승님은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셨다.”
“하셨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화접이 네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이냐? 아니면?”
“그 사실을 알고 나는 그날 스승님을 죽였다. 하지만.....”
“하지만?”
양전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눈물은 흘러 턱 끝에 맺혔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다.”
대충 상황이 파악되자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