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일기... 일기는 어디 있지?”
“말 할 수 없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화산파의 무진이다. 내가 원하면 알고 싶은 걸 알 수 있고 손에 쥘 수도 있어.”
순전히 허세 가득한 허풍이지만 때론 이런 방법이 먹힐 때도 있었다.
“산에 묻었다면 산을 없애고 사람에게 맡겼다면 그 사람을 찢어발겨서라도 찾아낼 수 있어. 시험해보아도 좋아. 멋지게 그 기대에 부흥할 테니까.”
“그녀에게 손대지 마라!”
허세가 먹혔는지 양전은 반응을 했고 제갈 사혁은 그제야 가증스러운 미소를 띠며 양전을 살살 달랬다.
“그냥 얌전히 내놓으면 돼. 네 소중한 그녀가 험한 꼴 당하지 않도록.”
“이런 미친놈!”
미친놈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주먹으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무 이유 없이 두들겨 팼다. 그리고 얼굴이 피 범벅이가 된 양전의 멱살을 쥐어 잡은 채 양전을 향해 폐부가 썩어 들어 갈 만큼 직설적인 말을 했다.
“이 세상엔 미친놈들이 많아. 그런데 이거 알아? 미친놈이 그렇게 많으면 오히려 안 미친놈이 되려 미친놈이 된다? 더러운 세상이지?”
“.......”
“모르겠어? 키워준 어머니 죽인 너나 그런 네놈을 니 아버지 앞에 너를 끌고 가겠다는 나나 이미 훌륭한 미친놈이야.”
화접을 키워준 어머니라 칭하자 양전의 눈물은 피와 뒤섞여 피눈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양전의 명치를 후려쳐 양전을 기절시켰다.
“안 그렇소? 맹주.”
할 말을 끝낸 제갈 사혁이 어둠 속을 향해 말하자 한손에 암기를 든 강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보아도 무림맹주라기보다는 제갈 사혁을 죽이기 위해 온 저승사자의 모습이었다.
“도장이었던 가문에서 무공을 익혔고 개방에 들어와 그 재능이 꽃을 피웠다지만 그래도 맹주 당신은 순수배양의 개방장로들보다 한수 아래이오. 하물며 일격에 날 쓰러트릴 수 있으시다고 판단하시면 아니될 일이오.”
제갈 사혁의 몸에서 자색의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자 강서는 이를 악물었다.
놈은 화산파의 후계자다. 자하신공과 정면으로 맞붙어 이길 승산은 없었다.
“언제부터 알았는가?”
“양전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화접에 대해서 조사했소. 그리고 풍문으로 떠도는 맹주와 화접이 내연관계였다는 소문과 맹주의 혼인전력. 맹주의 고향이 화접과 같다는 사실과 맹주의 본명이 부양이라는 걸 한 사람을 통해 알았소. 그리고 화접과 정말로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뒤는 좋을 대로 상상하시오.”
“..........”
“맹주는 이 사실을 걱정해서 오대주들에게 명령했고 백호대주가 이 일을 맡았지만 백호대주는 뜻하지 않게 나와 아는 사이였고 대수롭지 않게 이 일을 두고 내기를 했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맹주께서는 여전히 백호대주가 이 일을 처리할 것이라 믿으셨을 테고.”
“어쩐지 백호대주는 일주일 동안 임무를 떠나지 않더군. 그럼 이 아이가 나와 화접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가?”
화접의 아이?
(그런 건가?)
이제야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강서는 양전이 화접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접은 아이를 낳지 않았소. 맹주.”
“뭐야?”
“화접이 오십이 다 되어도 그 미모를 간직할 수 있는 이유는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기 때문이지만 또한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이오. 여인에게는 본래 사내와 달리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특별한 기운이 있는 법인데 아이를 낳지 않았으니 기운이 넘쳐 여전히 아름다울 수밖에.”
처음에는 주안술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루에서 화접의 지인인 여주인과 이야기를 나눈 바.
화접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제갈 사혁은 일전에 사천에서 흡정마공인이 여인들의 기운을 흡수하려던 사건을 떠올렸다. 무림인이 몸속에 내공으로 인해 노화가 느린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무림인에다 여자가 아이까지 낳지 않는다면 그 기운으로 인해 육체의 시간은 남자에 비해 더 느리게 흘러간다.
“생각해보시오. 맹주. 그대가 화접과 오랜 시간 연인관계였다면 왜 화접이 먼저 그대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았겠소?”
그 말을 들은 강서 역시 과거를 되새기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소. 맹주의 죽은 아내와 사라진 아들. 맹주의 정인인 화접의 제자 양전 그리고 이러한 맹주의 행동."
“그럼 양전은 내 아이가 아닌가?”
“정확히 말하면 맹주 본처의 소생이오.”
“!”
“양전은 자기에게 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화접의 일기를 읽고 화접이 어머니를 죽였다 오해해 화접을 죽였지만 일기장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는 이미 늦은 후였소.”
“양전이 나와 화접의 아이가 아닌 나와......”
강서는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맹주. 그대가 했던 말 기억하시오?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주겠다고?”
“............”
“두 가지를 원하오. 하나는 화접의 일기요. 나도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이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일이 끝난 후에 부탁하겠소.”
“이 일이라니?”
강서의 반응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말이 안통해서야....
“양전을 빼내기 위해 온 것 아니오. 내가 대신하겠소. 안전한 곳까지 대신 양전을 데리고 가겠소.”
“그대를 어떻게 믿지?”
“두 가지라 했소. 첫 번째인 화접의 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두 번째 부탁은 다르오. 그러니 그 두 번째를 위해 양전을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겠소.”
강서는 지금 이 젊은 아니 새파랗게 어린 사내가 어리게만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비슷한 나이 때의 능글맞은 무림인을 상대하는 그런 찜찜한 기분이었다.
“어떡하겠소? 그대는 나를 죽이지 못하지만 나는 그대와 양전의 사이를 발설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소.”
무슨 부탁을 할지 모른다. 섣부르게 약속을 했다간......
“고민하지 마라. 나는 곧 화산파다. 강서.”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오. 맹주. 강서가 다르고 부양이 다른데 어찌 강서와 화접이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오?”
“그 소문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네.”
자기가 소문을 냈다니 그건 또 무슨?
“그녀가 혹시라도 나를 찾아와줄까 싶어서 직접 만들어낸 소문이네.”
하지만 그 소문이 기초가 되어 제갈 사혁이 맹주의 약점을 쥐었으니 참으로 세상일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그런 거였군. 부양과 강서가 같은 인물일 수 없는데 그런 소문이 돌기에 조금 이상했소.”
제갈 사혁이 무림맹을 빠져나가려는 그때 강서는 경비병들이 있는 곳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다.
“수고가 많네.”
“맹주!”
“맹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경비병들은 무림맹주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역했다. 누구도 이 야심한 시간에 자신들을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림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무림맹주가 직접 찾아오는 일은 더더욱.
“늘 수고가 많네. 오늘은 격려 차원에서 이렇게 찾아왔다네. 빈손이라고 너무 매몰차게 쫓아내진 말아주게나.”
“아... 아닙니다. 맹주.”
“소인들이 어찌 그런 불충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렇게 강서의 도움을 받아 제갈 사혁은 양전을 엎고 유유히 무림맹을 빠져나왔다.
무림맹의 경계가 삼엄하다고는 하나 경비병들의 이동 경로를 꿰고 있고 또한 내부의 조력자가 있다면 잠입하는 것도 탈출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무림맹을 빠져나와 양전을 엎은 채 소리 없이 조용한 경공을 펼치며 사천을 잇는 양자강(揚子江) 물줄기를 향해 밤새 뛰어갔다. 그러자 그곳엔 강서의 말대로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빨리 왔소이다?”
먼저 그쪽에서 아는 체를 하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렸다.
“의뢰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겠소. 그 사내를 남경(南京)까지 데려다주면 되는 것이오?”
강소성의 남경이면 무림맹의 손이 뻗을 일은 없었다. 그렇게 양전을 뱃사공에게 넘긴 뒤 제갈 사혁은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을 하기 위해 사천에게 가장 큰 술집으로 향했다.
경비병 중 일부가 제갈 사혁이 양전을 만나기 위해 감옥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양전의 탈옥을 무림맹이 알았을 때 감옥에서 양전과 독대한 제갈 사혁이 정황상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술집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갑자기 식탁 위로 올라가 소리쳤다.
“자자! 강호의 동도 여러분! 본인은 무림맹에 몸담고 있는 제갈 사혁이라고 하오! 오늘 내
가 첫 임무를 완수하여 기분이 좋소이다! 오늘 술값은 내가 다 계산 할 테니 마음껏 즐기시오!”
평소엔 하지 않을 행동에 노골적으로 무림맹에 속해있다는 사실까지 말하며 제갈 사혁은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각인시켰다.
“젊은 사람이 통이 크구만!”
“공짜 술이니 마다하지 않겠네!”
저마다 제갈 사혁에게 호의를 보이며 술잔을 비웠고 제갈 사혁도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며 일부러 분위기를 맞췄다. 그렇게 한참을 마시던 중 제갈 사혁은 술에 취해 가게에서 나와 속을 비웠다.
“우엑~”
일반적으로 내공을 이용해 술기운을 몰아내는 것이 무림인들의 잡기(雜技) 중 하나지만 제갈 사혁은 일부러 술에 취해 1차 그리고 2차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하하하! 젊은이가 술이 약하구만!”
“요즘 젊은 것들은 패기가 없어!”
한차례 크게 속을 비운 뒤 술집의 모든 술값을 계산한 제갈 사혁은 계산서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혜성과의 내기에서 이겨 돈을 벌었것만 현장부재증명을 한답시고 그 돈을 다 날렸기 때문이다.
“이쯤하면 조사 받을 때 내 행적이 쉽게 드러나겠지.”
술기운 때문에 열이 올라 차가운 밤공기가 뺨에 닿는 게 이상하게 기분 좋아진 제갈 사혁은 장사를 끝내고 문을 닫은 상점 기둥 나무에 기대서 곰방대를 꺼내 계피를 태웠다.
“후~”
“갈사 소협?”
조용히 홀로 곰방대를 물고 있을 때 낯익은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응한 제갈 사혁은 조용히 옆을 돌아봤다.
“여기서 뭐하고 계신 거예요?”
갈사 소협이라는 고유명사를 유일하게 이용하고 있는 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한명 아니나 다를까 청하였다.
“청하 소저야 말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야 무당파에 다녀오는 길이었죠. 갈사 소협은 어쩐 일이세요?”
“저는.... 저..... 그러니까 아! 술집에서 한잔 했습니다. 임무를 끝냈거든요.”
일부러 임무를 끝낸 것을 언급하며 제갈 사혁은 청하에게도 이 시간까지 자신이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너무 취하신 것 같네요. 무림맹에 복귀할 생각인데 같이 가요. 꿀물이라도 타드릴게요.”
메마른 대지와도 같은 사내의 가슴에 따스한 춘풍이 불게 할 만큼 잔잔한 미소를 짓는 청하를 보며 제갈 사혁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다.
청하와 함께 무림맹에 복귀하고 난 후 제갈 사혁은 청하의 방에서 약속했던 꿀물을 얻어마셨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임무를 수행하신 게 그렇게도 기분 좋으셨나 봐요?”
“첫 임무였잖습니까.”
꽃잎이 새겨진 찻잔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제갈 사혁은 달빛이 스며들어오는 청하의 방에서 오랜만에 기분 좋은 담소를 나눴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