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56화 (56/262)

<-- 56 회: 미인도와 무림맹주 -->

“그러니까 그녀석이 그러지 뭐에요. 소승은 봉명공이외다.”

“설마 그 흑사련의 파계승 봉명공이오?”

“그렇습니다. 흑사련의 잔학무도한 파계승 봉명공이었죠. 같은 흑사련 소속이라서인지 녀석은 귀보를 구하기 위해 우리 두 사람의의 비무에 끼어들었습니다.”

진실을 날조한 제갈 사혁의 거짓말에 청하는 오히려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남자의 허풍에 빠져들었다.

“저는 말할 것도 없이 봉명공과 맞섰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청하가 이야기를 재촉하자 신이 난 제갈 사혁은 있는 사실 없는 사실 보태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화산파의 무공은 감히 최고라 할 수 있죠. 저는 귀보와 봉명공의 합공을 막아내며 화산파의 절기인 홍주검(紅蛛劍)으로 봉명공의 금강귀원공(金剛歸元功)과 귀보의 쾌검에 맞섰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저의 무공에 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두 사람은 결국 부상을 입고 도망쳤습니다. 저 역시 두 사람의 합공에 그날 큰 부상을 입었지만 다 지나간 일이죠.”

허풍에 사실성을 더하기 위해 부상을 당했다는 거짓말까지 더하며 제갈 사혁은 이야기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었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음에도 또 들려주세요.”

“저야말로 보잘 것 없는 무용담을 들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이렇게 꿀물도 타주시고 어디보자 보답해드릴 게 없나?”

굳이 구실을 대자면 꿀물에 대한 보상이지만 내심 청하에게 마음의 정표를 주고 싶은 제갈 사혁이었다. 그러던 중 제갈 사혁의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청하의 발밑에 닿았다.

“이게 뭐예요?”

청하가 무심결에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두루마리에는 정말 아름다운 여인의 미인도가 그려져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인도네요. 제목이 화접? 혹시 사모하는 사람?”

사모하는 이냐며 묻자 제갈 사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두루마리는....

“미인도가 아닙니다.”

“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져 있는 미인도지만 제갈 사혁은 부정했다. 오히려

“그 그림의 제목은 모정(母情) 어머니의 사랑이죠. 선물입니다.”

청하가 봤을 땐 아무리 봐도 남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미인도지만 무언가 사연이 있다고 생각한 청하는 기쁘게 미인도를 품속에 넣었다.

“고마워요. 갈사 소협. 이걸 어디에다 걸어놓지?”

정말로 미인도를 선물 받은 게 기분이 좋은 건지 청하는 벌써부터 벽에 미인도를 걸어두기 위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런 청하를 멀리서 바라보는 제갈 사혁은 방금까지 꿀물이 담겨져 있던 찻잔을 들었다.

“그건 미인도가 아니야.”

찻잔을 들어 올리자 조금 멀리 떨어진 청하가 작게 보이며 마치 찻잔 위에 청하가 서 있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이게 미인도지.”

다음 날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림맹의 감옥에서 죄인이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곧 무림맹 내부에서는 대대적인 조사가 이뤄졌고 당시 감옥에 발걸음을 했던 제갈 사혁이 제일 먼저 조사가 들어갔다. 그러나 지난 밤 양전이 탈출했던 시간에 술집에서 크게 술판을 벌렸던 정황이 포착되어 제갈 사혁은 사건 조사에서 제외가 되었다. 무림맹은 양전을 뒤쫓았으나 끝내 양전을 찾지 못하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무림맹주의 서재에 마주 앉은 제갈 사혁과 강서는 몇 분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차만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침묵을 깬 쪽은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화접의 일기는 읽어보셨습니까?”

화접의 일기라는 말에 강서는 동요를 보였고 제갈 사혁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소리 내에 차를 마셨다.

“이별을 통보 받던 날 사실은 맹주의 부인을 죽이려고 했다더군요.”

“.........”

아무리 무림맹주라지만 사람인 이상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타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대한 불쾌함은 참을 수 없는 것이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 사혁에게 약점이 잡혀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읽어드리죠.”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그길로 도장으로 가 그의 부인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복잡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오히려 나는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겨우 그 사람의 아들만 구해낼 수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사람의 아이를 데리고 그 사람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데리고 가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내가 다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이 의심으로 바뀌자 그 사람에 대한 원망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그 길로 이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왜 아이를 데리고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더 읽어드릴까요?”

“아니네.....”

강서는 업보(業報)의 무게를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양전은 이 일기의 아주 첫 부분만 읽었다고 했습니다. 후에 나머지를 읽고 나서 자신의 죄를 깨달았지만.”

“그만하게! 제발!”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죄.

강서는 이성을 잃어버린 채 소리를 질렀고 그런 강서를 보며 제갈 사혁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평정심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면 원하는 걸 얻기 쉽지.)

제갈 사혁은 간악하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남의 마음을 잘 흔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맹주께 원하는 마지막 조건은 바로 이겁니다. 비검파(緋劍派) 문주 판가량을 차기 맹주로 지지해주십시오.”

제갈 사혁의 입에서 전혀 뜻하지 못한 말이 나오자 강서는 도리어 당황했다.

단순한 지지표명이라면 정말 어려우면서 쉬운 일이다. 구파일방의 일원으로서 구파일방을 생각하면 지지하는 것은 어려우나 단순 지지 그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정말 그것뿐인가?”

“사내는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판가량(判可良) 차기 무림맹주이며 이름 없는 문파의 출신으로  당시 1석 차이로 무림맹주로 선출되었다. 어차피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지만 제갈 사혁은 그 1석 차이를 줄여볼 생각이었다. 1석이 아닌 3석으로 만들 생각이며 또한 그 2석이 다름 아닌 개방과 화산파라면 판가량의 정치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와서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버리는 제갈 사혁을 보며 강서는 미간을 구겼다.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지 종잡을 수가 없군.”

강서의 마지막 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무림맹의 장로로 있는 사숙의 숙소로 향하며 기지개를 폈다.

“어떤 사람이긴 어떤 사람이야. 대세가 흐르면 첫 번째로 뛰어들어서 이득 좀 보려는 사람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

도오는 사질인 제갈 사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판가량을 지지해주십시오.”

아무리 차기 화산파의 후계자라지만 사숙에게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찾아와 누군가에 대한 지지표명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 속뜻이 있을 터.

“어째서냐?”

“구파일방의 장로 자리는 9석입니다. 그 중 5대 세가의 자리가 3석입니다. 전부 합쳐 명문정파의 자리는 총 12석입니다.”

아미파와 제갈세가 그리고 황보 세가가 장로직을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소위 명문정파의 자리는 총 15석이 아닌 12석이었다.

“그리고 뭐 대충 명문정파가 아닌 무림맹의 장로들 자리는 11석이지요.”

“그렇다.”

“5대 세가가 딴 마음을 품으면 뒤집어집니다. 뭐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제갈세가는 무림맹에서 손을 뺐습니다. 그러니 5대 세가의 남아 있는 3석이 뜻을 모우지 못한 채 흩어지면 다음 맹주 자리에 명문정파고 뭐고 없습니다.”

도오는 사질이 아버지 이야기까지 꺼내가며 말을 하자 조금 더 진지하게 사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렸다.

“어차피 나머지 중소방파 장로들은 판가량을 지지할 겁니다. 중소방파에서 이름난 이는 판가량 뿐이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저희 화산파 입장에서도 맹주는 누가 되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사실 말이 좋아 명문정파라며 구파일방이니 오대 세가니 하는 거지 무림맹주 자리에 있어서는 딱히 누가 맹주 자리에 앉아도 좋은 게 화산파의 입장이었다. 자신들의 문파에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딱히 이득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명문정파가 명문정파를 지지하는 것은 그냥 명문정파라는 이름아래 암묵적인 약속일 뿐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도 아니기에

“화산파가 먼저 판가량을 지지하면 구실점이 약한 오대 세가가 흔들릴 겁니다. 만약 맹주자리에 판가량이 오르지 않아도 나머지 11석의 중소방파에게 화산파는 호감을 살 겁니다. 그리고 구파일방 중 그 누구도 구파일방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여 감히 화산파를 꾸짖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대화산파가 아닙니까. 사숙.”

사질에게 설득 당했다고 생각해도 그만이지만 도오는 후계자인 이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 생각하며 허락을 했다.

“판가량을 지지하겠다.”

“감사합니다. 사숙.”

“감사랄 게 있겠느냐. 어차피 나머지 문파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이번 일로 조금씩 풀어보면 좋겠구나.”

사숙의 방에서 나온 제갈 사혁은 일이 깔끔하게 풀리자 허기가 졌다.

“밥이나 먹을까.”

실제로 판가량이 맹주가 될 수 있던 이유는 오대 세가의 표가 다른 곳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명문정파 12석의 후보 단일화가 되지 않으니 단일화가 된 다수에게 밀리는 수밖에.

이제 막 아침잠에서 깬 이신을 데리고 식당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아침부터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사부. 경공이 잘 안 돼요.”

부스스한 눈으로 경공이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신을 보며 제갈 사혁은 의외란 듯 맹숭맹숭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이구나. 네가 막히는 것이 있다니.”

“수상비(水上飛)라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서요.”

대수롭지 않게 수상비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뜯고 있던 오기고기를 뱉었다.

“뭐 수상비? 나도 못하는 수상비를 네가 어떻게 해?”

“사부는 수상비 할 줄 모르세요?”

“초상비도 겨우 한다.”

단단한 지면을 박차는 수많은 종류의 경공과 부드러운 풀을 밟고 다니는 초상비(草上飛). 그래도 특수성을 따져보면 초상비와 수상비는 꽤나 고급 경공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경공이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술에 기초를 둔다지만 초상비와 수상비는 따로 이름이 붙을 만큼 까다로운 무공이었다.

“수상비 하는 법은 알고 있는 거냐? 이신.”

“네. 여기 책에.”

이신이 보여준 책 제목은 하루 10분만 따라하면 너도 나도 경공의 고수라는 책인데 제목만 봐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무공서였다.

“.............”

“초상비는 익혀두면 편할 것 같아서 배우려는데 어떤 책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라고 하고 어떤 책은 발목에 힘을 주라고 하고 도저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수상비는 딱 한 가지 방법만 쓰여 있어서 연습해봤어요.”

“땅에서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경공이야. 나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배우지 않은 거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

경공도 제대로 펼칠 줄 모르는 주제에 수상비라니 그래도 혼자 경공에 대해 공부하는 이신이 대견스러웠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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