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회: 후기지수 -->
“저.... 무진 소협.”
그때였다. 무림맹에서 각종 시중을 드는 하인이 제갈 사혁이 앉아 있는 식탁으로 온 것은
“그래. 무슨 일이냐?”
“저분들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저분들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슬슬 모일 때가 되긴 됐군.)
그들은 다름 아닌 이번 세대의 후기지수들이었다.
(후기지수라....)
젊은 무림인으로서 후기지수라는 호칭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무림의 주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니었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그 따위 하찮은 것에 목에 힘을 주고 다녔는지......
“이신 잠시 여기 있어라.”
“네 사부.”
제갈 사혁이 이신을 놔두고 자리를 옮기자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광수. 제갈 사혁. 남궁 미려. 구월상. 지곤.
제갈 사혁이 금광수를 죽였으니 현 후기지수는 4명이었다. 화산파의 무원과 소림의 봉명공 그리고 곤륜의 혜성 때의 후기지수가 총 7명인 것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인원이었지만 이 세대의 후기지수는 남달랐다.
“화산파의 무진. 이름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다. 천재라 불리더군.”
개방의 후기지수인 구월상(駒月上)은 호승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비슷한 연배인 제갈 사혁이 명성으로 제일 먼저 치고 올라가기에 누구보다 제갈 사혁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어 했다.
“제갈 사혁이라고 했지?”
남궁 미려. 제갈 사혁과 외종형제이기는 하지만 친분에 있어서는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산파면서 제갈이란 말이야? 대단한데.”
지곤(地崑)은 청성파(靑城派)의 제자이며 호탕하고 꾸밈없는 성격으로 그 나이 때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럴 좋아했다.
“그런데 무당의 청하가 안보이네? 난 그녀도 이번 후기지수 중 단연 돋보인다 생각했는데.”
제갈 사혁의 지난 생에서 청하는 용화장 사건으로 죽었기 때문에 본래는 후기지수에 그 이름이 올라오지 않았으나 이번 생애에서는 달랐다.
“사실상 가장 먼저 성과를 낸 사람은 그녀잖아?”
남궁 미려의 말은 사실이었다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미려 그렇게 따지면 난 아무것도 아니니까.”
간혹 공을 세우지 않고 단순히 명문정파의 젊은 무림인들 중 무공의 성취가 뛰어나 후기지수로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후자에 속하며 이 중에선 지곤이 그랬다.
“후기지수라는 거 어차피 노인네들이 정하는 거다.”
제갈 사혁의 그 한마디에 모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후기지수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명문정파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만들어낸 모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지만 다들 일부러 그 사실을 모른 채하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지수라는 감투의 유일한 오점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후기지수란 그런 것이었다.
“너희도 후기지수라는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마라. 그런 거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후기지수란 학연 지연 혈연이 만들어낸 기득세력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는 한 방편에 불과했다. 물론 제갈 사혁으로서는 굉장히 선호하는 것들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기지수란 이름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후기지수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닌 지금에 와서는 그 명패가 굉장히 초라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얼굴 정도 보는 건 상관없겠지 하지만 후기지수랍시고 모임이라던지 만들지는 마. 피곤하니까. 나라면 그 시간에 마교나 흑사련 놈들 턱주가리를 후려치는 방법을 생각할 거야.”
“후기지수를 부정하는 것이냐?”
구월상이 제갈 사혁을 쏘아보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구월상은 검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구월상의 검을 지곤이 가로막았다.
“너무 그렇게 열내지마. 월상.”
“비켜라. 지곤!”
“무진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구나. 넌...... 제갈 사혁 무진은 도검불침이야.”
제갈 사혁이 도검불침이라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절대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정보였기 때문에 당사자인 제갈 사혁도 꽤 놀라고 있었다.
“칠망검 선배에게 들었다. 검에 베이지 않는 다고.”
직접 대련을 한 이들 중 유일하게 정파 내에서 그 영향력을 가진 자. 칠망검.
“아! 칠망검 선배 그 사람이 있었지.”
대외적으로 은퇴했다고 알려졌고 제갈 사혁이 공식적으로 물리친 무림고수였다.
“칠망검 선배다. 구월상. 도검불침이고 나발이고 칠망검 선배님을 상대했다는 사실하나 만으로 이미 그는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야. 그리고 난 솔직히 그의 말이 맞다 봐. 당연하다는 듯 대대로 명문정파들끼리 물려받는 자리를 가지고 후기지수니 뭐니해서 모임을 가질 바엔 무공수련에 집중하겠어. 그를 봐. 월상. 실제로 우리보다 뛰어나잖아.”
지곤은 이미 제갈 사혁을 자신과 동급으로 보지 않았다.
지곤처럼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인정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진정한 대인배. 필요에 의해 사실을 말하지 않을지언정 그 입에서 거짓을 지껄이진 않는다.
“그만한 실력을 얻기 위해 너는 얼마나 많은 아수라장을 해치고 나왔지? 말해봐. 그런 건 누가 가르쳐준다고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딱히 아수라장은 아니다. 지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편법이며 다른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강함을 키웠다. 하지만 지난생애에서 걸었던 아수라장은 새로운 생애에서 그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단순히 두 번의 삶을 산 것 만으로 강해지지는 않았다. 지난 생애 겪어왔던 경험과 좌절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얼마나 싸우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는지 샐 수 없지만 그 시절에 가졌던 호승심과 자신의 어리석음...... 상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한계.......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지곤.”
“역시 당신을 이 자리에 부른 것 자체가 무례(無禮).”
지곤의 그 말과 함께 제갈 사혁은 이신이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부 잘 이야기 나누셨어요?”
“이야기는 무슨......... 그냥 다시 한 번 깨달았을 뿐이야.”
“뭐를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갈사 소협!”
청하가 온통 녹색의 채소만 가득 담은 채 이신과 제갈 사혁의 식탁에 자리했다.
“아침부터 고기에요? 그러면 살 쩌요. 갈사 소협.”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죠. 자고로.”
“사부 무슨 말이에요? 말 좀 해줘요. 뭘 깨달으셨다는 거예요?”
이신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제갈 사혁을 조르자 제갈 사혁은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몰라도 돼.”
“네?”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파인의 한 사람으로서 후기지수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않은 지금 이 자리가 제갈 사혁의 자리였다.
“갈사 소협. 오늘도 임무 가실건가요?”
“네. 물론이죠.”
“그럼 저하고 함께 가요. 도적떼를 소탕해야하는데 사람이 부족해서요.”
“물론이죠. 청하 소저와 함께라면 즐겁겠네요.”
“신이도 데려가나요?”
“보고 배워야죠. 이런 건 문파 앞마당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으니까. 밥 먹고 한번 이야기해 봐요. 이번엔 무슨 일인지.”
청하는 아직 어린 이신을 그런 곳에 데려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제갈 사혁과 이신은 사제관계이기에 이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청하 소저. 후기지수 자리를 거부하셨다 들었습니다만?”
“아~ 그거요? 그냥 뭐랄까.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무림인이잖아요.”
“네?”
“무림인.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요. 후기지수라는 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명해지.... 그냥 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명성이 만들어낸 자리 의미가 없다고 봐요.”
단지 강해졌기 때문에 그런 자리가 시시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청하의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조금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 부끄러워졌다.
“도련님.”
청하와 함께 식사를 한 뒤 숙소에 와보니 다름 아닌 가후가 찾아왔다.
가후는 집안의 가신이기 때문에 좀처럼 홀로 떠나지 않는다. 그런 가후가 무림맹에 찾아오다니 제갈 사혁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인지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이라 그 호칭 좋은데 우 총관 말고는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는데 말이야. 처리됐나보네?”
“공식적으로 화산파의 후계자가 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지 두 개 다 할 순 없는 법이잖아.”
제갈 사혁이 자리에 앉아 가후도 뒤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신. 수련하고 있어. 곧 따라가마.”
“네. 사부.”
이신을 내보내고 제갈 사혁은 곰방대를 꺼내 쑥을 피웠다.
“그래서 이제 말하고 싶어졌나보지?”
“네. 원하는 정보를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것 그것은 가후가 제갈세가를 떠난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제갈 사혁의 아버지를 죽인 원흉.
“영웅촌(英雄邨)의 위치.”
“아..... 알고 계셨습니까?”
제갈 사혁의 입에서 영웅촌이라는 말이 나오자 가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망화각의 정보를 우습 게 보지 마. 이래봬도 화산파의 정보망이니까.”
수년 동안 흑사련의 자잘한 정보를 모았다. 흑사련 단주 중 한명이 첩을 몇 명 들였고 흑사련 숙주가 몇 년간 얼마나 식자재 값을 빼돌려왔는지 그런 사소한 정보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림자를 밟았다.
영웅촌. 흑사련 내에서 공적을 올린 이들이 흑사련의 노후 혜택을 누리며 사는 곳.
무림고수가 아닌 평범한 이가 뜻하지 않은 공적을 쌓아 기거하는 곳이다. 앞서 말했듯 무림고수가 아닌 흑사련의 사병 같은 평범한 이가 공적을 쌓아 영웅이라 칭해진 것이기 때문에 흑사련 내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 존재자체를 숨겨왔다.
“하남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하남? 내가 아는 그 하남?”
하남이 어디인가? 하남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누가 무어라 해도
“숭산이 있는 그 하남? 소림사 있는 거기?”
숭산 소림의 지역이었다. 사천 다음가는 정파의 요충지.
“그 실체를 보았습니다. 하남이 맞습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는 말이 있다.
“나도 참 미련하기 짝이 없군. 가까운 곳을 두고 멀리서 찾았다니.”
“흑사련이 만든 마을이기는 하지만 그 구조는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고 그곳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즉 오직 마을로서만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밀정도 간자도 없는 그런 순수한 마을.
“그래서 아버지를 죽인 놈이 누구야?”
“만석이라는 자입니다.”
“가후...... 하나만 묻자. 이름까지 알고 있는데 왜 그놈은 살아있냐?”
“?”
가후가 이름까지 알아냈다면 그를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후는 그자가 살아있기라도 하다는 듯 말했다.
“만석이라는 자입니다. 라고? 아무리 뜯어봐도 살아있는 놈 부르듯 말하는데 말이야.”
그 순간 가후는 제갈 사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소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따위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야. 내 아버지의 복수하겠다며 세가를 뛰쳐나간 네가 왜 복수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느냐가 알고 싶을 뿐이다. 말해봐. 어디.”
조용히 가후의 이야기를 듣던 제갈 사혁은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 이유냐?”
“.......”
“늙었구나. 가후.”
“도련님.”
“무림인이 뭐냐? 가후.”
무림인이 무엇이냐는 말에 가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림인은 자기 손 피를 묻혀 밥 먹는 그런 놈들이야. 아무리 포장을 해도 본질이 그래! 내가 생각하는 무림인은 말이다. 동정(同情)은 베풀어도 온정(溫情)을 베풀어선 안 돼.”
적을 동정하여 죽이지 않을 순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적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진 않는다. 불쌍히 여기는 것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다르다. 제갈 사혁이 단 한순간이라도 적에게 온정을 베푸는 날이 온다면
“난 무림인 안 해. 무림인 때려치우고 밭 갈고 농사할 거야. 무림인이 왜 무림인인데? 세상의 참된 진리를 찾아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하기위해? 아니야. 농사를 하거나 학문을 닦아 밥 먹고 살 자신이 없으니까. 힘을 키워서 재물을 얻고 명예를 쥐는 거야. 나라가 무림인을 필요로 해? 백성이 무림인을 필요로 해?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이야.”
젊었다. 제갈 사혁은 너무 젊었다. 그래서 가후는 젊은 도련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아니다. 적어도 가후가 아는 무림은 제갈 사혁이 말하는 무림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후는 말할 수 없었다.
듣지 않을 테니까. 들리지 않을 테니까.
“말해라 가후.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
“도련님 잘 판단해주십시오.”
“그딴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 정했다.”
그것은 절대 꺾이지 않을 고집이며 맹세였다.
============================ 작품 후기 ============================
2012년 9월 2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