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회: 후기지수 -->
그날 저녁 제갈 사혁은 청하의 처소에 들렸다.
“어머 갈사 소협 어쩐 일이세요? 아직 떠날 시간도 아닌데.”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외간남자가 초대도 여인의 방에 찾아 올 시간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도적떼 소탕 말입니다. 같이 못 갈 것 같습니다.”
“왜요? 오늘 가기로 했잖아요.”
“집안에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장성한 사내가 저 뿐이라 빠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집안일은 집안일이었다.
“갈사 소협의 집은..... 알겠어요. 그럼 다른 사람과 함께 다녀올게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안 좋은 일이 있냐며 걱정해주는 청하를 향해 제갈 사혁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니요. 평소랑 똑같은데요. 왜 어디가 이상해보여요?”
“그냥 평소에 보던 그런 표정이 아닌 것 같아서요.”
청하는 평소에 자신을 마주하던 제갈 사혁의 표정과 지금의 표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보여주는 제갈 사혁의 언행과 행동.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제갈 사혁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표정은 마치......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제갈 사혁이 돌아간 뒤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청하는 꽁한 표정으로 제갈 사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뭐지 도대체......”
적의를 드러낸 그 얼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왜 그러한 표정을 지어야 했던 것일까?
이상한 날이었다. 분명 여름이것만 불어오는 바람은 겨울의 그것이었다. 누더기가 된 천을 걸친 사내는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외지인이구만.”
개울에서 낚시를 하던 노승(老僧)이 사내를 불렀다.
무시해도 좋으련만 어째서인지 사내는 노승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은 날씨가 영 좋지 못하구만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다른 때 한 번 더 찾아와보게 이곳의 주하(朱夏)는 중화일품이지.”
노승이 낚싯대를 거두자 낚싯대에는 바늘이 없고 나뭇가지 하나가 달려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구만 누굴 원망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굉장히 기뻐 보이기도 하고.”
사내는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마음속에 무엇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한번 뿐인 인생사 남는 건 후회뿐이라네 잘 생각하게나.”
“두 번 생각했고 결심했소.”
“결심했다니 늙은이 주제에 참견할 일이 아니구만...... 허나 세 번 생각하시게.”
세 번씩이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한 아비의 아들이오.”
사내가 등을 돌리자 노승은 그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질렀다.
“쯧쯧쯧.... 한번 뿐인 인생이거늘......”
그곳은 영웅촌이라 불리 운다. 하지만 그 이름과 달리 굉장히 평범한 마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년층이거나 노년층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는 노인의 빗자루가 사내의 신발에 닿자 노인은 사내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보아하니 말을 못하는 사람인 듯 보여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대수롭지 않게 영웅촌 안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엔 평범한 사람들 같으나 모두 흑사련과 관련된 이들이었다. 평범한 사병이거나 사무적인 업무를 보던 관리들이 은퇴를 해 이룬 마을이기에 무림인이면서 무림인이라 할 수 없었다.
“만석이라는 자의 집이 어디요?”
사내는 그늘 막 아래에서 홀로 장기를 두고 있는 중년남자에게 물었다.
“!”
그러자 중년남자는 깜짝 놀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가후 때문인가.”
한차례 선례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러한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었다.
“만석이 도망치게 또 자네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네!”
중년의 남자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중년남자에게 소리쳤다.
“네가 만석이냐?”
옆에서 들려오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중년남자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가라. 못 본 척 해주겠다.”
못 본 척 해주겠다는 말에 중년남자는 만석이라는 자의 눈치를 보더니 서둘러 도망을 쳤다.
“누구요?”
이미 한차례 자신을 찾아온 이가 있었기 때문인지 만석은 침착했다.
사내는 위에서 아래로 만석을 훑어봤다. 아무리 봐도 시골농부가 따로 없었다. 흑사련 사병은 둘째 치고 평생 무기하나 손에 쥐어보지 못한 듯 보였다.
“20년 전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 주원을 죽인 게 너냐?”
“맞소.....”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서있는 만석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을 사게 만들 정도로 애처로웠다.
“주자 원자 되시는 분의 장남이다.”
제갈 사혁의 말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녹이 슨 낡은 검 한 자루가 비릿한 냄새를 내며 뽑혔다.
“그 일은 정말 미.....”
“그 말을 듣고자 오지 않았다.”
만석은 끝말을 맺지 못했다. 낡은 검은 정확하게 만석의 심장을 꿰뚫고 그의 생명을 빼앗았다. 참으로 싱거웠다. 차라리 이름 있는 무림인이였다면 허탈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그 아이는 피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버지!”
그때였다. 방금 전 도망친 중년의 남자와 함께 어린 사내아이가 밭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마.... 만석이......”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만석의 모습에 중년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버지!”
아이는 죽은 만석의 시신을 보더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제갈 사혁은 천천히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겁에 질린 남자는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려 했고 제갈 사혁은 그대로 주저앉아 남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는 왜 데려왔나?”
남자는 제갈 사혁이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 생각했는지 땀을 뻘뻘 흘렸다.
“반년 전에도 당신 같은 사람이 찾아와 만석이를 찾았소. 그런데 순돌이를 보더니 그대로 돌아갔소.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힘이 없는 그로서는 만석을 살릴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세 번은 없다. 돌아가.”
“수.... 순돌아.”
“아이는 두고 가. 아니면 네가 남고 아이를 보내던가.”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더 이상 아이에게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남자가 돌아가자 제갈 사혁은 아비의 시신 앞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아이는 한 열 살 쯤 돼보였다.
“아버지 좋아하냐? 좋은 아버지였냐?”
아이는 제갈 사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아비의 모습에 슬퍼할 뿐이었다.
“내 아버지는 말이다.”
“.........”
“모르겠다. 좋은 분이라는 건 알겠지만 좋은 아버지인지는 모르겠어. 그걸 알 수 없게 만든 건 죄다. 네 아비의 죄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만큼 그릇이 크지 못하다.”
아이는 소리 없는 울음을 그치더니 제갈 사혁을 노려봤다.
원망하는 것인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아비를 죽였으니 말이다.
“내게 복수 할테냐?”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그렇다고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면 십년 늦으면 이십년 정도 걸릴 것이다. 십년 이십년 그리고 삼십년 언제가 되었든 자신은 늙을 테고 나약해질 것이다. 이 아이가 자신에게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온다면........
생각을 마친 제갈 사혁은 만석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 그대로 아이를 향해 휘둘렀다.
너는 아직 어리니 크거든 나를 찾아와 복수를 해라.
곤륜파의 혜성을 살려준 망지성처럼 그 따위 어설픈 동정심 따윈 베풀지 않을 생각이다. 어차피 언젠간 서로 칼을 맞댈 것이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겠지.”
이 일로 누군가 자신을 비난한다면 제갈 사혁은 망설임 없이 그 위선자의 목을 베어버릴 것이다.
마을을 내려오자 영웅촌의 그 누구도 제갈 사혁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문고리를 걸었다.
마을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마음 한쪽이 썩어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결국에는 사람의 자식. 심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래서 용서를 비는 만석을 죽이고 그의 아들도 죽였다.
“순돌이라고 했던가.”
이 마음이 아이에 대한 죄책감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편하기라도 할 텐데 이 감정은 혈관을 타고 몸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 사혁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이를 테면 심마(心魔)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떠한가?”
이때 그런 제갈 사혁 앞에 나타난 이가 다름 아닌 개울에서의 노승이었다.
“심마에 빠진 듯 합니다.”
노승이 데리고 온 승려가 제갈 사혁의 상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쯧쯧쯧~ 복수귀라는 건 알았지만 심마에 빠지고 말았군.”
“이대로 두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어서 옮기는 게 좋습니다.”
“그리 하게나. 생명을 구하는데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심마에 빠진 제갈 사혁을 데려간 곳은 하남 무림의 중심인 소림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제갈 사혁이 심마에서 벗어난 것은 이틀 뒤였다.
정확히는 심마에 빠진지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여긴?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군.”
깨어난 제갈 사혁은 자신을 돌보고 있던 동자승을 보고 이곳이 소림사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 영웅촌을 빠져나와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서 끊겼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소림에 의해 구해졌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날 데리고 온 사람이 누구냐?”
“묘산(妙山) 대사님과 무한스님이십니다.”
묘자 항렬이면 현 소림을 이끌고 있는 장로였다.
“인사를 드리겠다.”
“법당에 계십니다.”
동자승을 따라 법당으로 향하자 거대한 법당에 수 십여 명의 사람들이 부처님을 향해 절을 올리고 있었다. 법당 중심에는 소림의 방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양 옆으로 소림의 장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진정 자비로운 마음을 갖춘 자만이 행할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법당에서는 제법 젊은 측에 끼는 승려가 부처님의 말씀을 설파하고 있었고 법당의 예배가 끝날 때까지 제갈 사혁은 한쪽에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따로 자리가 마련되자 제갈 사혁은 먼저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화산파의 제갈 사혁입니다. 구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무림인인줄 알았지만 화산파였나?”
묘산대사는 삶은 완두콩을 먹으며 제갈 사혁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개울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또 딴판인 모습이었다.
“묘산대사님께는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내덕에 살았겠는가? 살 운명이었으니 살았겠지.”
“그래 화산파라고?”
그때였다. 중심에 앉아 있던 노승이 제갈 사혁을 부른 것은 묘원(妙圓) 현 소림방주 그리고 봉명공의 스승.
“마을에는 무슨 볼 일이 있었는가? 묘산에게 듣기로는 소정촌 근처에 있었다고.”
소정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소림은 역시 영웅촌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