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59화 (59/262)

<-- 59 회: 북해빙궁 -->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제갈 사혁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지 순간 공기가 무거워지며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 유일하게 방장인 묘원과 제갈 사혁의 목적을 알고 있는 묘산대사만을 제외하면 모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선행을 베풀었다면 덕담을 해주고 악행을 저지르러 갔다면 벌을 내릴 테지만 은원관계는 다르다.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 기분이 어땠는가?”

“바..... 방장!”

기분이 어땠냐고 묻자 다른 장로들은 크게 당황했다.

“어떠한가? 원수를 갚으면 정말 후련한가? 궁금해서 그러니 어디한번 가르쳐주게나.”

소림의 방장이라해서 고리타분할 줄 알았는데 젊은 괴짜와 같은 언행은 조금 의외였다.

“죄책감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행동을 곱씹어봤는데 너무 깊은 생각에 잠겨 눈을 떴을 땐 이곳이었습니다.”

“죄책감 때문이었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죄책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심마에 빠졌으면서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니?

“어찌 그러한가?”

“이미 지나간 일 아닙니까.”

그 순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림의 승려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직 소림의 방장만이 웃을 뿐이었다.

“그렇지 이미 지나간 일 부처가 아니고서야 사람이 그것을 두고 평생 성찰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한 가지 더 묻겠네.”

“네.”

“시간을 되돌려 복수를 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그때도 복수를 하겠는가?”

이런 질문을 하다니 마음을 갈고 닦는 승려로서 복수를 꿈꾸던 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한 점이 대단했고 그런 민감한 질문을 서슴없이 한 점은 나이를 떠나 무례했다.

“안합니다.”

“어째서인가?”

“사는데 지장이 없잖습니까. 그냥 차라리 안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 말하는 제갈 사혁을 보며 묘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 그냥 차라리 안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녀석이라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달리 말할 것입니다. 무진(無榛)이라면 하겠죠. 반드시 할 겁니다.”

제갈 사혁이 말한 그 이름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소림방장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라는 감정을 끌어냈으니 말이다.

“그 아이를 알고 있는가?”

“며칠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군. 자네가 바로 그......”

역시 봉명공과 동행했었던 제갈 사혁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봉명공의 파계는 소림에 의해 이뤄진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었다.

“하나만 더 묻겠네. 무진은 다른 선택을 할 거라 보는가?”

“그 녀석은 저와 다르니까요.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저와는 다릅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고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도 알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를 좋게 봐주어서 고맙네.”

묘원대사는 마치 자식을 둔 사람처럼 제갈 사혁의 두 손을 감싸주었다. 그것은 아비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녀석을 그렇게 만들 정도면 그 증오는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제갈 사혁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봉명공의 일은 가슴에 묻어두기로 한지 오래다. 제 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이란 참으로 쓸 때 없고 주제넘은 일이었다.

“그만 떠나겠습니다..”

제갈 사혁 입장에서 소림은 참으로 괘씸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결국 봉명공을 밖으로 돌아다니게 만든 것은 소림이었다.

제갈 사혁이 예의를 갖춰 절을 올리고 법당을 나오자 거대한 기둥 뒤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아이의 행적이 묘연해졌네...... 정기적인 보고도 올라오지 않고 있고.”

삭발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스님은 아니었다.

“나는 무진의 사형이네. 속가제자지만 밖에서는 그 아이의 연락책이지.”

“걱정됩니까? 봉명공인데도?”

“하하하~ 그 말이 맞군.”

사형이라 불린 남자는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나가는 곳은 저쪽이네.”

“고맙수.”

“나는 함진(喊陳)이다. 내가 본명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자랑으로 여겨도 좋아.”

함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멈춰 섰다.

“정협(正俠)....”

“응? 뭐라고?”

정협(正俠) 함진(喊陳). 정도무림의 전설적인 고수로 그 흑도섬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였다. 제갈 사혁에게는 화산파 이외의 인물 중 유일하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자다.

아이의 목을 쳤다. 아이의 목을 졸랐다. 심마는 물러갔지만 그 후 제갈 사혁은 악몽을 꿨다. 늘 같으면서도 다른 내용의 악몽이었다. 하지만 늘 제갈 사혁은 아침에 눈을 뜨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기분 나쁜 꿈이야.”

심마에 빠져 며칠 정신을 잃고 소림사에서 깨어났지만 죄책감은 심마에서 벗어난 순간 사라졌다.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그 후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별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무림맹 내에 있는 의원에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다만.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소협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뿐입니다.”

확실히 제갈 사혁은 악몽을 꿔도 별다른 압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 사혁에게는 그냥 지나간 일이었으며 기분 나쁜 꿈에 불과했다.

평소에 잘 입지도 않은 화산파 도복을 입고서 제갈 사혁은 청하와 함께 다음 임무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 어떠세요?”

청하가 맞는 임무는 백성을 상대로 악행을 일삼는 삼류 악당을 잡아드리는 일들이었다.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전혀 이득이 없는 일이었지만 청하가 고르는 일이기에 무조건 긍정적으로 답했다.

“당연합니다. 이런 악당 놈들 가만히 둬선 안 되죠!”

“이 일도 해보고 싶은데 이건 어때요?”

자연재해 복구라는 다소 무림인과 상관없는 임무에는 난색을 표했다. 아무리 청하를 좋아한다지만 그렇다고 자기주장 없이 끌려 다니지는 않았다.

“이런 건 나라에서 해야죠. 엄연히 나라가 있는데.”

“하지만 무림인 한명이면 이런 힘든 자연재해 복구 같은 일은 금방 해결할 수 있잖아요.”

아기 고양이 같은 얼굴로 제갈 사혁을 쳐다보는 청하를 보며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제갈 사혁은 침착하게 손자병법의 36계 중 하나인 미인계(美人計)를 이겨냈다. 그러자 청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마을에는 나무꾼 일을 하는 유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씨의 마을에 비가 와서 산사태가 일어났죠. 모든 게 먹고 살기위해 무분별한 벌목을 일삼았던 자신 때문이라 생각한 유씨는 혼자 무너져 내린 토사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런 유씨를 두고 볼 수 없어 너도 나도 유씨를 돕기 위해 집에서 삽을 들고 나왔습니다. 쌀집 하는 관씨도 하루 종일 술에 찌들어 사는 한량 장씨도 무림맹에서 파견된 제갈 씨도........”

“안가요.”

“유씨 관씨 장씨가 세 번 부탁하는데 도요?”

“안가요.”

“나쁜 사람.”

조금 뻣뻣하게 느껴지는 ‘나쁜 사람’이라는 문장 선택이 여간 귀여워 보였지만 안가는 건 안가는 거다.

청하에게 잘 보이는 것이 삶의 목표인 제갈 사혁이라지만 겨우 이 정도로 토라질 청하도 아니거니와 안가는 건 안가는 거였다. 무림인이 삽질이라니 도저히 폼이 나지 않았다.

제갈 사혁은 그런 청하를 뒤로 하고 가장 위험한 임무를 선택했다. 바로 구대문파 출신의 수제자가 탈문한 사건이었다.

“기세 좋은데 아무렇지 않게 그걸 짚고 말이야.”

남궁 미려였다.

“도검불침이라더니 무서운 게 없나봐?”

지난번에 후기지수 자체를 전부 부정하는 발언을 한 뒤로 조금 딱딱한 어투로 제갈 사혁을 몰아붙였다. 지난생애와 다른 선택을 했으니 지난생애와 인물관계도 달라졌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식이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감사했어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남궁 미려를 보자마자 청하가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별로 인사 받을 일은 아닙니다.”

“청하 소저 서로 아는 사이입니까?”

“갈사 소협도 참! 갈사 소협이 신이를 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뒤로 바쁜 절 대신해 신이를 봐준 사람이 미려 소저에요.”

남궁 미려가 이신을 봐주었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아주 잠깐이지만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노골적인 표정을 보지 못할 남궁 미려도 아니었다.

“걱정 마. 주충은 더 이상 내 심복이 아니야. 지금 내게는 시녀들 말고 아랫사람은 없어 그러니.....”

“나는 그냥 남궁세가와 그 아이가 연을 맺지 않았으면 한다. 미려.”

미려로서는 딱히 이신에 대한 감정이 좋지도 나쁘지도 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알고 있기에 챙겨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역반응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터라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잘났어. 아주.”

제갈 사혁이 미운 건 아니지만 호감은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면 저 뺀질뺀질한 면상을 아주 그냥!

그 놈의 되도 않는 촌수가 문제였다. 그래도 사촌은 사촌이니 말이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사부를 자청하면서 며칠 동안 혼자 놔두는 건 아니잖아.”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아이의 스승으로서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해.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그 빚 갚도록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고~ 우리 아이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제갈 사혁도 아니었다.

“지곤에게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청성파거든 그 임무패의 당사자가.”

청성파라면 따로 주변 조사 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지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되었든 지난생애에서는 상당히 친했기 때문이다.

(금산 과일주 정도 들고 가면 되겠군.)

지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곤은 술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늘 식당에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자 의자에 꼴사납게 누워있는 지곤이 보였다.

“오~ 이게 누구야 도검불침 화산망종 아니 신가!”

화산망종이라니 순간 제갈 사혁은 하체의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누가 화산망종이냐. 지곤.”

“백호대주가 그러던데 화산망종이라고.”

“이 곤륜계집을 그냥!”

“백호대주께 곤륜계집이라니 그녀는 네 사형의 친우다.”

“뭐 그런 됐고 청성파라며 탈문한 사람이.”

청성파 출신인 지곤은 탈문한 문도에 대해 말이 나오자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탈문은 소림의 파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소림은 그냥 내쫓지만 소림을 제외한 다른 문파는 근맥을 자르고 단전을 패한다. 탈문이라고 하면 말 그대로 문파를 나간다는 뜻이지만 근맥을 자르지 않고 무단으로 도망친 이들을 두고 탈문 했다고 말한다. 파문과는 또 달랐다.

“우리는 삼대가 함께 있는 문파야.”

현재 청성파는 무(無) 항렬과 소(嘯) 항렬 그리고 지(地) 항렬이 있다.

무자 항렬은 현 장문인의 세대고 소자 항렬은 그들의 제자이자 곧 청성파를 이끌어갈 다음 후계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자인 지자 항렬.

“너희 화산도 얼마 전엔 삼대가 함께였잖아.”

비록 전 장문인 한사람뿐이었지만 얼마 전까지는 화산도 삼대가 모여 있는 문파였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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