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회: 북해빙궁 -->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금산의 과일주를 꺼내들었다.
“뭐야! 오~ 어떻게 내 취향을 알고 이렇게 준비했을까? 마음에 들어! 화산망종.”
“망종은 빼고 말해.”
“소위. 내 사숙이지만 제일 막내라 우리 항렬하고 나이 차이는 안나. 올해 서른하고 손가락 두 개.”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는 지곤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탈문한 사숙이면 사문의 커다란 오점인데 그것을 무용담 늘어놓듯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서백호(西白虎) 소위(嘯渭). 40여 년 전부터 사천 제일의 고수를 가리켜 사신(四神)에 비유했다.
소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간략한 정보만 들은 제갈 사혁은 곧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버선 끈을 질끈 동여매고 짐을 어깨에 진 이신은 분기탱천(憤氣撐天)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을 수련하는데 있어 난생처럼 커다란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도대체 수상비란 뭐죠. 왜 이렇게 익히기 어려운 거예요?”
“너 아직도 그걸로 고민하냐? 땅덩어리 넒은 나라에서 수상비 쓸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도.”
“준비 끝났으면 가자 이번 길은 서장을 경유해서 신강이다.”
신강이라면 이신도 잘 알고 있는 곳이다.
“마교.”
“그래. 청해나 감숙을 경유한 길은 마교놈들 감시가 삼엄해서 힘드니까. 서장을 이용해서 가는 거다.”
“무진 있느냐?”
막 길을 나서려던 차에 도오진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숙 어쩐 일이십니까? 호출하시면 될 일을 직접 찾아오시다니.”
아무리 사질간이라고해도 용무가 과중한 관계로 되도록 시종을 시켜 호출을 하지 이렇게 직접 오진 않는다. 그런데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본산으로 귀환 하거라. 일시 귀환명령이다.”
보통일이 아니었다.
과거 제갈 사혁이 기억하기로 이 시절에는 일시 귀환명령어 떨어질 만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통일이 아니었다. 일시 귀환명령은 쉽게 떨어지는 명령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변고가 생겼을 때 내려지는 게 바로 일시 귀환명령이었다.
“사숙은?”
“자리를 지키라는 장문 사형의 명이 있으셨다.”
“그럼 소질 다녀오겠습니다. 이신 짐 풀어라 그거 들고 갈 일 없다!”
냄비며 국자며 바리바리 싸든 짐을 냅다 풀어낸 이신은 곧바로 제갈 사혁을 뒤따라갔다.
모든 공력을 종아리에 모아 경공을 발휘하는 제갈 사혁은 실로 엄청난 속도로 언덕을 넘고 산을 올랐다.
사정이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과거 지난생애에서 일어나지 못한 미지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신! 발이 지면에 닿을 때 발목에 공력을 집중시켜라!”
“네!”
차고 넘치는 내공을 소유한 이신이기에 장시간에 걸친 경공에 무리는 없었지만 이신에게 가르친 비류보는 워낙 장거리에 특화된 경공이기에 내공을 조율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렇게 한참을 경공을 이용해 늦은 밤 섬서 종남산(終南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어라. 먹고 바로 간다.”
고된 강행군에 이신은 상당히 많이 지쳐보였지만 사문과 관련된 일인 만큼 이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사건이 터진 것만은 확실했기에 제갈 사혁은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엄청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주문한 돼지고기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한 젓가락에 고기 다섯 점을 집은 뒤 장에 찍어먹었다. 먹는 걸로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나름의 노력이었다.
“사부 천천히 드세요.”
뱃속에 식충이라도 키우는지 제갈 사혁은 음식을 있는 대로 다 먹었다. 주문한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한 접시 비우면 또 다른 한 접시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
그때였다. 급하게 먹었던 나머지 음식이 목에 걸린 것이다.
“손님 여기 물 마시세요.”
점소이로 있는 어린아이가 물을 건네주자 제갈 사혁은 급히 그 물을 마셨다.
“고맙다.”
물을 건네준 점소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 그 순간 제갈 사혁의 손이 재빨리 호황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부!”
호황이 반쯤 뽑혀 있었다. 이신이 좌측에 앉아 있어 제갈 사혁의 손을 제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기어이 뽑혔을 호황이었다.
제갈 사혁은 혼란스러웠다. 그냥 어린아이인데 검을 뽑으려 하다니?
(내가? 이 제갈 사혁이? 뭐가 무서워서?)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제갈 사혁은 재빨리 얼굴표정을 바꿨다.
“이신 이 멍청한 녀석!”
“네?”
“점소이에게 감사의 뜻으로 재미있는 걸 보여주려 했는데 뭐하는 짓이냐? 아니면 뭐 내가 이 점소이에게 검을 휘두르기라도 할 것 같았냐?”
“아니요. 뭐.....”
어색하게 이신을 나무란 뒤 제갈 사혁은 호황을 뽑아들어 점소이에게 보여주었다.
“잘 보거라. 보답의 뜻으로 보여주는 거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황에는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이신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검기(劍氣). 검을 다루는 이들 중 진정 검기를 발산할 줄 알이야 검사라 칭한다.
그 난이도는 상당히 높기 때문에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경지임은 분명하지만 이신이 아는 한 제갈 사혁은 검기를 쓸 때 없는 객기 취급을 하는 사람이었다. 과도한 내공소모 때문에 수업할 때도 직접 검기를 발산하진 않았는데 점소이에게 보답차원에서 구경시켜준다니 무언가 어색했다.
“우와~ 예뻐요!”
“기쁘냐? 그래 보답이 되었을지 모르겠네?”
“정말 멋져요!”
점소이가 기뻐하자 제갈 사혁은 점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소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동안 근육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순돌이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속에 있는 걸까.
(빌어먹을 난 정말 괜찮아! 죄책감 따윈 없어! 그런데 도대체 왜!)
“사부~ 뭐해요. 음식 식어요.”
“그래.”
이신이 부르자 그제야 떨림이 멈췄다.
“무슨 생각하신 거예요?”
“왜 지나가다 한 놈 제대로 걸리지 않는 걸까 하는 그런 생각. 왜 이 객잔에선 시비 거는 사람이 없나 그런 생각. 아~ 여기 사람들은 싸움 안 걸어주려나? 객잔은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라고 있는 건데. 하는 그런 생각.”
이신은 제갈 사혁다운 농담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점소이가 굉장히 어리네요. 한 열 살이나 한 살 정도 되려나? 이 집 아들이겠죠?”
“..........”
제갈 사혁은 또 다시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먹는 속도가 훨씬 느려지기는 했지만.
화산파에 도착한 것은 새벽이 되어서였다. 이미 화산파 연무장에 많은 무자 항렬의 사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무진 사형을 뵙습니다!”
제갈 사혁이 나타나자 모두 제갈 사혁에게 예의를 갖췄다.
제갈 사혁은 사형제들의 행색을 살폈다. 원래 화산파 도복은 검은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마감처리를 하는데 사형제들이 입고 있는 도복은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제갈 사혁이 가볍게 고개를 까닥 거리자 무덕이 앞에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무학이 납치되었습니다.”
무학(武學) 총형설. 열여덟 번째 사제이자 이제 막 아홉 살이 된 지난생애에서 제갈 사혁의 스승이었던 도산진인의 아들이다. 지난생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
“이런 미친 그게 말이 돼!”
화산파 안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납치를 했단 말인가? 그 많은 평검수들 뚫고?
“중추절(中秋節) 아닙니까.”
“이런 미친 중추절은 아직 20여일이나 남았잖아?”
“그래서 일찍 애들 보냈는데 대문이 털렸습니다. 정말 중추절에 문파가 비면 안 되니까. 일찍 보냈는데 재수가 없었죠.”
확실히 고향으로 귀향하는 명절인 중추절에 아이들을 전부 고향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문이 털렸다. 화산파의?”
“외부 손님들을 모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이는 도산사숙과 함께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만에 하나가 터졌습니다.”
“빌어먹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도산사숙께서 괴한에게 습격 당하셨습니다.”
“어디 계시냐?”
제갈 사혁은 서둘러 장로들의 숙소로 향했다. 많은 화산파 장로들이 도산진인의 방에 모여 있었고 그곳에는 대사형 무원도 있었다.
“사형 사숙께선 어떠십니까?”
“왔느냐?”
원래대로라면 대사형의 몸 상태를 먼저 물어봐야했으나 지금은 일이 일이다보니 그럴 경향이 없었다.
“조금 다치셨다.”
도산진인이 다쳤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주위에 있는 사숙들께 예의를 갖추고 도산진인에게 다가갔다.
“다치셨다 들었습니다.”
“별거 아니다.”
정확히 가슴을 일직선으로 벤 검상(劍傷)을 입었다. 말도 안 되는 부상이었다. 권법사가 일직선으로 검에 베였다?
“뭐 어디 무당파 검현군(劍炫君)이라도 쳐들어 왔습니까? 아님 뭐 흑도섬이가 섬서까지 놀러왔습니까?”
정파 사파와 제일의 검사 이름을 대며 비아냥거리는 조로 이야기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제갈 사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망할 놈의 자식! 숙부님한테 말하는 꼴 보소!”
사숙들 중 가장 막내인 도종진인(道淙眞人)의 처인 여(呂)씨 부인이었다.
“숙모 아파요. 애도 아닌데 좀 뒤통수 좀 치지 마요. 도종사숙한테도 안 맞아봤는데 왜 때려요!”
“숙부님이 다치셨다는 데 걱정은 하지 않고 뭐 검현군?”
도산진인을 간호하고 있던 사람이 여씨 부인이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의 조롱을 곱게 넘어갈 리 없었다.
“일직선으로 선명하네요. 사숙정도 되시는 권사가 검이 그렇게 깊게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계셨다는 게 조금 놀랍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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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