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회: 북해빙궁 -->
도산진인이 아무 말도 못하자 제갈 사혁은 확신이 들었다. 도산진인은.....
“피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거죠?”
“그래.”
대답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장문인이자 스승인 도호진인이었다.
“무학 형설을 납치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북해빙궁이다.”
북해빙궁 세외 3대 세력 중 하나인 중원이라 보기 힘든 곳.
“북해빙궁 말입니까. 다녀오겠습니다.”
“무진아. 아직 할 이야기가......”
“간다. 구해온다. 돌아온다. 이 세 가지만 실행하면 그만입니다. 더 말해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갈 사혁은 뭐가 급한지 그대로 나가버렸다.
“가서 말해주고 오겠네.”
도호진인이 뒷말을 전해주려 했지만 그것을 막은 이는 다름 아닌 무원이었다.
“장문사숙. 무진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학이를 데려올 것입니다.”
“아니 된다! 무학의 어미는 북해빙궁 사람이다!”
도호진인에게서 나온 말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그 말은 곧 북해빙궁에서 무학 총형설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말입니까? 도산 사숙.”
도산진인은 눈을 감고 침묵으로 답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무진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사문을 굉장히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이미 북해빙궁이 화산파의 대문을 넘었다는 사실부터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무림의 단체항쟁은 명분 싸움이었다. 무학의 어미가 북해빙궁이건 마교건 중요한 건 먼저 쳐들어온 자들이 그쪽이라는 사실이다.
연무장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사제들과 같은 양식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연무장에 모여 있는 열일곱 명의 사제들을 향해 말했다.
“무학을 무사히 구한다. 방해되는 자는 가차 없이 죽여라. 필요하면 기르던 개도 죽인다.”
그날 화산파에는 검은 비가 내렸다.
지면에 발이 닿을 때마다 발자국 모양이 선명하게 움푹 파일정도로 화산파 19인의 발걸음은 무거웠으며 또 기세등등했다. 그들에게 화산파라는 사실은 무모함을 정당화 시켜주는 논리였다.
“사형 신이를 데려오는 건.....”
앞서가는 제갈 사혁에게 말을 건 것은 무윤(無贇) 서희(曙希)였다. 여자 제자기 때문에 좀처럼 도호로 부르지 않는 사람 중 한명이다.
“너도 사고(師姑)라도 걱정을 한다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다. 나도 보호자로서는 한없이 싸고돌고 싶지만 스승으로서는 아니야. 상대를 향한 살의뿐인 전장이야말로 가장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야.”
맞는 말이었다. 화산파라는 출신을 등에 쥔 뒤부터 목숨을 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도 사고는 사고라고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산을 넘고 또 넘어 적당한 곳에서 야영을 했다. 잘 준비가 다될 쯤 제갈 사혁은 무덕을 불렀다.
“흉수가 사문을 통과한지 얼마나 됐지?”
진작 물어봤어야 할 말을 지금에서야 물어볼 정도로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무덕은 그런 제갈 사혁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생각했다.
“한 시진 차이가 납니다. 사형.”
“사매들은 놔두고 올걸 그랬나?”
“에이~ 그런다고 안 올 사람들이 아니잖습니까.”
무슨 일이든 앉아서 계획할 때는 완벽해보였는데 막상 계획대로 움직이면 왠지 자신의 계획이 허술하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제갈 사혁이 딱 그 짝이었다.
“그렇잖아. 물론 역사상 여성 장로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간 낭군을 만나 시집갈 아이들인데 여기서 개죽음 당하면?”
“시집 좋은데 가자고 화산파에 입적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적에게 등을 돌리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이럴 때면 무덕은 셋째답게 제갈 사혁을 잘 달래기도 하고 결심을 확고히 다잡아주기도 했다. 확실히 화산파는 제갈 사혁이 끊임없이 노력한 사형제간의 우애가 빛나는 집단이었다. 사제가 이렇게 사형의 마음을 잘 잡아줄지도 알고
“자라. 나는 사제들을 한번 둘러보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사제들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 몸에 내공을 불어넣어주었다.
정순한 내공을 주입 받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피로가 싹 가시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기어이 이신과 무덕을 제외한 나머지 열일곱 명에게 내공을 불어넣어준 후에나 제갈세가의 가주가 익히는 내공심법인 현원전단신공(玄元檀神功)을 시전하며 밤을 지새웠다.
출발은 늦은 아침에야 이뤄졌다. 밤새 생각을 정리해보니 북해빙궁이 무학 총형설을 납치한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판단했다. 그리고 무학을 납치했다는 건 죽이지 않는다는 뜻.
서두를 이유가 사라지자 제갈 사혁에게 사제들의 몸 상태가 최우선사항이 되었다.
“어제 너무 서둘렀으니 오늘은 천천히 간다.”
“하지만 사형!”
무종이 반발했지만 무덕이 무종을 제지했다.
“납치.... 적어도 죽진 않겠지.”
“하지만 무학은 도산사숙의 외동아들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천천히 간다.”
그래서 천천히 간다니?
“화산파인 걸 알고 쳐들어왔고 당연히 우리고 쫓아올 줄 알고 있을 테니까. 대비도 철저하겠지.”
어차피 기습공격 따위는 물 건너갔다는 걸 알고 있는 제갈 사혁으로서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 어떻게 해서든 성공률을 높이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우선사항이었다.
“근처에 마을이 있는지 찾아봐라. 아침 든든히 먹고 가야지.”
출발을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근처에 마을을 찾아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고 식사하는 내내 사제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음에 여유를 찾았다.
이를 본 제갈 사혁은 걱정을 한시름 놓았다. 화산파는 너무 젊었다. 가장 어린 무학이 납치되었기에 그 아이를 제외하면 열여섯 살로 이신과는 불과 한 살 차이였다.
무원이 올해 스물여덟이지만 두 번째인 제갈 사혁이 스물 하나 세 번째인 무덕과 무종이 열아홉이다. 그 뒤로 열여덟이 대부분이고 열일곱은 없고 바로 열여섯으로 내려간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나도 좀 껴줘라.”
“사형! 란매가 무후(無逅) 목욕하는 걸 훔쳐봤데요!”
“아니라니까. 우연이야! 사형 하지 마요!”
“뭐하는 짓이야. 남자가 여자 목욕하는 걸 훔쳐봤다는 이야긴 들었어도 여자가 남자 목욕하는 걸..... 서란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그래서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아이들이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 커다란 만족을 느꼈다.
북해빙궁에 다다랐을 쯤 망원경으로 북해빙궁을 살핀 제갈 사혁은 휘파람을 불었다.
“성벽 같은 건 없네. 그냥 마을 하나에 커다란 궁전하나라. 경비도 없고.”
제갈 사혁이 손을 올린 뒤 매의 부리처럼 손가락으로 북해빙궁을 가리키자 흑의를 입은 수십 명의 화산파 매화검수들이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갔다. 그러던 그때 잠잠하던 눈이 하늘로 솟으면서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보면 매복을 당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쪽도 우리가 올 걸 알고 우리도 그쪽이 준비할 걸 아는데 뭔 놈의 매복.”
매복이란 기습을 해 상대가 당황할 때 공격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올 줄 알고 있다면 이미 그것은 매복이 아니다.
“간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제갈 사혁이 구호를 외치자 나머지 매화검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며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첫 번째 매화검수들을 지나 북해빙궁의 무사들과 마주하게 된 제갈 사혁은 두 주먹으로 설해(雪海)를 붉게 물들였다.
복호백열격 파공(破功).
제갈 사혁의 주먹에 닿자마자 내공이 흩어져 그 어떠한 외공도 펼칠 수 없게 되자 북해빙궁 무사들의 몸은 너무나도 쉽게 부서졌다. 순식간에 스물다섯 명이 당하자 후방에 있던 북해빙궁 무사들은 석궁을 뽑아들었다.
“금강지력(金剛指力)!”
그 순간 제갈 사혁의 외침에 뒤에 있던 매화 검수들은 금강지력을 펼쳐 멀리 있는 북해빙궁 무사들의 몸을 기공으로 꿰뚫었다.
“돌진.”
외세의 침입을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마을을 보호하는 성벽이 없고 바로 마을과 북해빙궁으로 이뤄져 북해빙궁에 입성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형! 마을에 사람이 없습니다.”
매화검수들 중 기파를 느끼던 한명이 마을이 텅 비었다는 사실을 말하자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북해빙궁의 성벽 위에서 수십 명의 저격병들이 석궁으로 제갈 사혁 일행을 겨눴다.
“이런 건방진!”
성벽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이 마을 자체가 성벽이고 동시에 적을 가두는 가시 울타리인 셈이었다.
제갈 사혁은 강기를 펼칠까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데 강기처럼 효율성 없고 확신 없는 방어는 독이었다.
“강기를 펼치지 마라! 검으로 쳐낸다!”
상대도 무공을 익힌 자라면 저 석궁에서 나가는 것은 필시 보통의 화살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강기를 펼쳤다가는 당하게 된다. 지금이야 말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년 간 갈고 닦은 기술을 보여줄 때였다.
매서운 혹한을 뚫고 하늘 높은 곳에서 날카로운 화살비가 내려오자 매화 검수들은 검을 쥔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화살에 맞더라도 검만 휘두를 수 있다면 문제없다!”
무덕의 외침 속에 남긴 말은 참으로 무모했지만 묘하게 투지를 불태우게 만들었다.
육합검법(六合神劍法)을 기초로 한 방어적인 검법으로 화살을 모두 쳐내자 팔을 맞고 어깨에 찔린 사람은 있었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제 2차 발사가 이뤄지려는 순간 제갈 사혁은 권풍으로 북해빙궁의 성문을 박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성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죽여라!”
제갈 사혁의 명령은 참으로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적의 화살은 빈틈이 없고 두 번 막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적의 아가리로 돌진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매화검수들은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듯 기합과 함께 성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영락 화제 (大榮落 花際).
무덕은 오른쪽 허리에 찬 검을 뽑아들고 양손에 검을 쥔 채 변칙적인 곡선을 그리며 길을 뚫었다.
“육합검진(六合劍陳)을 펼쳐라!”
십방매화검진(十方梅花劍陳)으로 단숨에 치고 나아가야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육합검진으로 몸을 사리는 게 우선이었다.
숨을 고른 뒤 제갈 사혁은 재빨리 다음 지시를 내렸다.
“십방매화검진(十方梅花劍陳).”
명령이 떨어지자 검진은 순식간에 그 모습을 달리했고 북해빙궁의 무사들이 공격해 들어오자 매화는 그 봉오리를 닫았다.
방어적인 태세로 적의 공격을 막은 뒤 적의 호흡이 끊기자 그 순간 매화가 만개하며 그 꽃잎을 적들의 붉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단순하지만 규칙적인 그리고 확실한 살초.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북해빙궁의 무사는 불과 열 명이 되지 않았다.
“이놈들!”
분노가 서린 그 외침과 함께 중년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감히!”
“닥쳐라! 감히 화산파의 성역을 침범한 오랑캐 주제에 누구 앞이라고 지껄이느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갈 사혁은 살기가 스며든 외침으로 서늘한 장내를 순식간에 뜨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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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