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63화 (63/262)

<-- 63 회: 북해빙궁 -->

“그 아이는 총형설(叢炯雪)이다. 아비의 성을 따르고 아비가 한족(漢族)이면 그 아이도 한족이다! 북해의 혈통? 건방떨지 마라! 너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북해의 혈통? 북해의 혈통! 근본도 없는 오랑캐 주제에 잘도 갖다 붙이는 구나!”

그야말로 광기였다. 이따금씩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을 때 터져 나오는 제갈 사혁의 광기이며 오기였다. 그리고 이를 본 무덕은 고개를 저었다.

“사형 어떨 때 보면 징그러워....”

“뭐가 말입니까?”

“아니 평소에는 더 없이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뭐랄까. 어떤 순간에 보수적이고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굴 때가 있잖아.”

지금이 바로 그랬다.

“생각 같아서는 전부 쓸어버리고 싶지만 화산파에 쳐들어온 놈들만.... 특별히 그 얼굴보고 가겠다.”

“말했듯 입교 의식은......”

“그대는 어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순진한 것인가?”

제갈 사혁이 호황의 검 끝을 죽은 북해빙궁 무사의 시체에 겨누자 궁주 유현승은 미간을 찌푸렸다.

“공자 나으리가 살아 돌아와도 지금 이 상황 주둥이로 해결 못해.”

확실히 원흉 제공자를 죽이지 않는 한 이 일의 해결은 불가능했다. 그러자 50대에 접어든 남자가 북해빙궁을 대표해 앞으로 나왔다.

“나다. 애송이.”

“한백(翰伯)! 그대는......”

유현승이 무슨 말을 하려 하자 한백은 팔을 뻗어 유현승을 막았다.

“내가 총가를 베고 그 아이를 납치했다.”

“.................”

한백이라는 자가 화산파에 쳐들어온 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해라. 애송이 너와 나 둘이서 해결하는 거다.”

한백이라는 자의 머릿속 생각은 분명했다. 자기하나 죽어서 여러 명을 살리던가 아니면 제갈 사혁을 쓰러트려 화산파를 물러나게 하던가. 어차피 사제들을 끌고 온 이상 끝장을 볼 생각이지만 사제들을 데려왔기 때문에 한백의 생각대로 놀아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후자는 없다.”

제갈 사혁은 호황을 집어넣었다.

한백이 먼저 선공을 해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침착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한백의 공격 하나 하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냉기(冷氣)가 느껴졌다. 여태까지 싸웠던 북해빙궁 무사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진정한 북해빙궁의 무공을 견식해볼 절호의 기회였다.

잠시 북해빙궁의 무공 견식에 마음이 들떠 있는 사이 한백은 제갈 사혁의 발을 걸어 제갈 사혁을 넘어트렸다. 그리고 바닥에 등이 닿자 그 순간 제갈 사혁의 왼쪽 가슴을 향해 강한 장타를 날렸다.

“!”

장타를 맞은 순간 외공으로 철저하게 단련된 제갈 사혁의 몸은 방어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충격을 머금었다.

제갈 사혁의 입에서 피가 쏟아지고 제갈 사혁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공이 전혀 없는 장타였어. 그런데 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두 번째 공격이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손바닥으로 한백의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퉤~”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낸 제갈 사혁은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 한 번의 일격이 몸속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왼 주먹을 쥐고 상대를 향해 뻗었다.

“저건.”

“왜 그래 신아?”

“저건 아주 기초적인 거예요. 몇 개월 전에 절 저렇게 가르쳤거든요. 왼쪽 주먹을 상대에게 고정 시킨 뒤 상대가 움직이면 주먹을 상대에게 다시 고정시키는 거예요. 왼손으로는 상대의 위치를 조절하고 오른손으로는 공격만하는 거죠.”

“기초가 중요한 건 알지만 이럴 때는 강한 걸로.....”

“사부는 말했어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기초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절초는 펼치지 않아야 해요. 실패하면 다음은 없으니까.”

뒤에서 이신이 제갈 사혁의 입장을 대변하자 제갈 사혁은 입 꼬리를 올렸다. 역시 제대로 배우고 있는 이신이 대견스러웠기 때문이다.

“흥! 그 웃음은 뭐냐? 여유라도 부리는 거냐?”

이신을 향한 미소였건만 그것은 상대를 뜻하지 않게 도발해버렸고 상대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제갈 사혁은 상대의 공격을 모두 왼손으로 쳐내며 방어했고 기회가 생기자 오른손을 펼쳐 한백의 옆구리를 때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큭!”

옆구리를 꿰뚫었다.

“사형께서 나찰을 쓰셨군.”

“그게 뭐에요? 사숙.”

“나도 한번밖에 본 적 없어. 별로 대단한 기술은 아니야 그냥 좀 기발한 기술이지 장타를 칠 땐 손바닥 펼치는데 이 기술은 손을 펼침과 동시에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손가락으로 상대를 찌르는 거지. 대단한 건 아닌데 문제는 장타도 들어가고 지권도 들어간다고나 할까?”

한백이 옆구리를 만지며 뒤로 물러서자 제갈 사혁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왜 그래? 오장육부라도 튀어나왔어?”

한백은 덮고 있던 망토를 벗더니 이내 천을 찢어 상처를 봉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노골적으로 부상당한 부위를 노렸다.

마방추원(魔防抽拳).

그 순간 한백의 두 주먹이 정확하게 제갈 사혁의 가슴을 때렸고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제갈 사혁과 거리가 생기자 재빨리 두 손으로 원을 그리며 강대한 냉기를 모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무종은 앞에 있는 무덕을 밀치고 제갈 사혁을 향해 외쳤다.

“사형 위험해요!”

“받아라! 빙백신장(氷白神掌)!”

북해빙궁의 절기인 빙백신장이 뻗어나가는 바로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광소를 내질렀다.

“하하하하! 이 순간을 기다렸다!”

“뭐?”

흡성반기공(吸星反氣功).

제갈 사혁이 두 손으로 마치 태극을 연상케 하는 원을 그리자 긴 꼬리를 물던 빅뱅신장의 냉기는 둥글게 말리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빙백신장(氷白神掌)......”

“뭐?”

제갈 사혁의 손에서 빙백신장이 뻗어나갔다. 한백이 사용한 빙백신장과는 비교도 안 될 위력이었다.

“한백!”

궁주인 유현승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빅뱅신장에 맞은 한백은 꽁꽁 얼어버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제갈 사혁의 행동이었다.

“읏차~ 함 가볼까나.....”

뒷골목 왈패처럼 껄렁껄렁하게 걸어가더니 얼어버린 한백을 향해 천천히 발을 뻗어 발로 차버렸다.

“안 돼!”

그 순간 그 앞을 가로 막은 것은 궁주 유현승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막았다기 보다 그녀는 한백을 대신해 공격을 받았다.

가녀린 여인이 신음성을 내며 쓰러지자 오히려 화산파 쪽에서 동요를 보이며 긴장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제갈 사혁은 어이없다는 듯 유현승을 쳐다봤다.

“일대일 승부에 끼어들다니 무례한.”

제갈 사혁의 눈이 뒤집어지자 무덕과 무종이 재빨리 제갈 사혁의 양팔을 붙잡았다.

“사형 결판이 났습니다.”

“한백이라는 자가 일의 원흉이고 사형이 이기셨습니다.”

모두 한백이 뒤집어 쓴 채로 사건이 일단락된 것은 사실 제갈 사혁이 원하는 것이었다.

“좋아. 이걸로 해결 된 거겠지? 아니면 이자를 내손으로 죽여야 끝이나나?”

“아닙니다.”

여인이라지만 무공을 익힌 자.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단체의 수장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모습이었다.

고작 발길질에 저렇게 골골댈 정도면 북해빙궁의 미래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제갈 사혁이 알 바 아니었다.

“형설도 구했으니 돌아가겠다. 다시 확인해두겠는데 형설은 중원 사람이다.”

“........”

“대답은?”

“...............”

(그 아이가 도대체 뭐라고!)

제갈 사혁은 순간 호황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곧 이신의 손에 의해 저지됐다.

형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궁주의 모습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충동적으로 행동할 뻔했지만 이신 덕에 잘 다스릴 수 있었다.

(나도 아직 멀었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다니

“좋다. 언제든 찾아와라. 기다리고 있으마.”

그 말과 함께 제갈 사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때 제갈 사혁의 눈에 어떠한 장면이 들어왔다.

제갈 사혁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북해빙궁을 빠져나가고 밤이 되자 제갈 사혁과 무덕은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사형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한백이라는 자의 청을 왜 들어주셨습니까?”

무덕은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정말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그 사람이 도산사숙을 베고 무학을 납치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런데 왜?”

“몰랐으니까.”

“네?”

“멈춰야 할 때를 몰랐으니까. 납치된 무학을 구출하는 건 돼지만 도망치는 건 설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도대체 누가 설득되지 않았다는 걸까?

“너희를...... 사형으로서 날 따르는 너희를 설득 시킬 수 없으니까.”

“네?”

이해할 수 없었다. 설득이라니? 사형의 명령이라면 설사 그것이 부도덕한 명령이라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무학을 구했으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자.”

“........”

“납득이가? 우리는 대문이 박살나고 그 난리가 났는데 북해빙궁 놈들 몇 놈 두들기고 무학을 구했으니 냅다 도망치자? 그렇게 간단하지 않잖아. 나는 너희에게 믿음을 줘야 하는 사형이고 너희는 그런 나를 믿고 따라. 그러다보니 멈출 수 없었어. 이걸 어떻게 끝내야 할까? 궁주 목을 따야 할까?”

막대기로 불을 쑤시며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생각했어. 내가 말했지 화산파에 쳐들어온 놈들만 내놔라~ 그러면 돌아가겠다. 그런데 이게 말이 돼? 절대 안 돼. 누가 이런 조건을 들어주는데? 근데 때마침 그 노인네가 나서는 거야. 바로 이거다 싶었지.”

"그래서 그의 제안을 수락하셨군요."

“솔직히 거기 있는 놈들 다 죽일 자신은 있는데 사제들이 걱정돼서 말이야.”

추운 곳에서 벌벌 떨다가 몸이 따뜻해지니 그 놈의 허세는!

“그럼 마지막엔 왜 그러신 겁니까? 사형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자를 죽일 수도 있었잖습니까.”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면 누가 구하러 오겠지. 구하러 안 오면 그냥 그 노인네 죽는 거고..........”

“죽는 거고?”

“한 단체의 어른이 중원에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놈 손에 목숨을 잃으면 빡 돌아버린 북해빙궁 놈들하고 모가지 물어뜯으며 개처럼 싸우겠지. 나도 내심 그 노인네 안 구하러 오면 어쩌나 싶었어.”

“그런 겁니까?”

“그 노인네 살려주면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북해빙궁을 빠져나올 수 있잖아. 생각해봐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우리가 목숨을 살려준 게 되잖아.”

무덕은 속가제자 중에 그 실력을 인정받아 본산제자로 올라온 사람이라서인지 그런 속내에는 어두웠다. 책임을 따지고 논리정연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무덕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달랐다. 눈치 보고 상황 판단하면서 이해타산만 맞으면 밀어붙였다.

“너는 이해가 잘 안될 거야. 이해하려 하지 마.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잖아.”

“죄송해요. 저는 그러니까.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갈 사혁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무덕을 쳐다봤다.

“너도 참~ 모두들 무학을 어떻게 구해야하나 생각하고 있는 동안 넌 혼자 수사관 흉내나 내고 있던 거야?”

그게 무덕답다면 무덕다웠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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