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64화 (64/262)

<-- 64 회: 북해빙궁 -->

화산파에 돌아간 후 화산파의 분위기는 썩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명절이 가까운 만큼 모두들 이번 일을 털어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넘어가겠다.”

장문진인이 이번 사태에 대해 침묵하겠다고 말하자 다른 장로들도 그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다행히 북해빙궁이 화산파에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에 밖으로 세어 나갈 일은 없었다. 체면 깎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갈 이유가 충분했다.

“곧 중추절이다. 이번 일도 있고 하니 연회를 크게 열도록.”

중추절에는 조촐하게 보내는 편인 화산파에서 크게 연회를 여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이번 일을 털어내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일이 대충 마무리 지어지자 제갈 사혁은 조용히 사문을 나섰다. 이번 중추절은 집에서 지내기로 했고 앞서 무림맹에서의 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는 거냐?”

제갈 사혁이 가는 길목에 무원이 서있었다.

“네 사형. 그보다 사형의 몸은 조금 어떠십니까?”

“아주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살만하다.”

“다행입니다.”

“그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무림맹에서 어떤 아가씨와 함께 다닌다는데?”

어떤 아가씨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럽니까?”

“혜성이.”

“걔가 뭔데요? 곤륜계집이 뭔데 사형한테!”

“내 친구니까.”

“..............”

“저번에 말한 그 무당파 아가씨냐?”

“네.”

“힘들겠네~”

“거 참!”

어딜 가든 그 반응이었다. 무당과 화산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서로를 향한 경쟁심이 그 어느 문파보다 심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또 사이가 좋다고도 말하기 뭐한......

그 경쟁심이 선의 일 수도 있고 악의 일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점이 두 문파의 관계를 아리송하게 만들고 있다.

“힘내.”

“노력하겠습니다.”

무원과의 이별을 뒤로하고 이신을 데리고 마차에 올라탄 제갈 사혁은 마차의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맞은편 자리에서는 이신이 화산파에서 가지고 온 필사본 무공서를 읽고 있었다. 필사본이라고 해서 문파의 비급은 아니고 경공에 관한 흔한 수련서였다.

“생각을 달리하면 수상비가 어렵지 않는다?”

도대체 그놈의 수상비가 뭐라고? 이신은 좀처럼 수상비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사천에 도착하자 제갈 사혁은 뻣뻣하게 굳은 몸을 풀며 어슬렁어슬렁 시장바닥을 걸어 다녔다.

“청하소저는 임무를 떠났으려나?”

청하가 없는 무림맹 따위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는 바빴지.)

지난 생애에서는 이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없었다. 청하가 마교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일로 무당파와 몇몇 문파가 날치기 통과로 마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제갈 사혁도 화산파의 일원으로서 눈코 뜰 시간 없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녔다.

(하긴 그때 정말 많이 강해졌지 대외적으로 무림맹에서 화산파의 실력을 내보인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정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지금의 평화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평한 세상도 좋지만

(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일이 터졌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도.... 도망쳐! 소가 날뛴다!”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던 때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소 한 마리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사람들은 봉변당하지 않으려고 무작정 소를 피해 도망쳤고 시장은 어떠한 의미로 개판이 되어 버렸다.

소는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기어이 제갈 사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자신을 향해 소가 오는 것을 본 제갈 사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소를 응시하며 소의 날카로운 뿔이 자신을 겨냥하자 있는 힘껏 옆으로 피했다.

“웃차~ 위험할 뻔 했네. 이신 무림인은 언제 어디서나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네 사부.”

“음메~~”

제갈 사혁이 소를 피한지 얼마 뒤지 않아 사방팔방 날뛰던 소는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이고 소협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일격에 소의 목을 베어 소를 쓰러트렸기 때문이다.

“조심하세요.”

그는 청성파의 도복을 입은 남자였다. 나이는 한 10대 후반으로 정도로 볼 수 있었는데 남자는 제갈 사혁을 한번 위 아래로 보더니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뭔가 표정이 좀 좋지 않아 보이는 데요. 아는 사람인가요?”

“몰라. 저런 놈.”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부 왜 소를 잡지 않으셨어요?”

“뭐가?”

이신은 달려오는 소를 잡지 않은 것에 대해 물었고 제갈 사혁은 이로 손톱을 깨물며 딴청을 피웠다.

“사부라면 소를 멈춰 세울 수 있잖아요. 뭣 때문에 귀에 점혈만 한 거예요?”

아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소의 귀를 손가락으로 찔렀는데 이신이 그것을 보았다 말하자 제갈 사혁은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침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무림맹 숙수를 빨랫감처럼 두들겨 패서 만한전석(滿漢全席)을 먹어야겠어.”

“돈 주면 그냥 먹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냥 강한 척 한번 해본 거 아니야.”

“가끔씩 사부란 사람을 모르겠어요.”

“으이구~”

무림맹에 입성하자 제갈 사혁은 식당으로 가 만한전석 대신 곰발바닥 요리를 주문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저렇게 비싼 요리를.”

“화산파의 무진이잖아.”

“뭐? 그 유명한 고수 말이야? 엄청 젊잖아!”

“역시 이번에도 화산파인가. 이래서야 구대문파와 일반 문파의 차이가 벌어질 리 없지.”

요즘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고수가 바로 제갈 사혁이었기 때문에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이런 인종도 있었다.

“제갈 사혁 소협이십니까?”

“그런데.”

“비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안 돼.”

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화산파라는 좋은 배경이 있다고는 하나 다른 무림인들 특히 같은 나이대의 무림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력에 차이가 나봤자 그렇게 크게 차이 날 리 없다고.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행동이 빨랐다.

공기의 일그러짐과 함께 식탁이 깔끔하게 베어지자 먹고 있던 음식이 땅에 떨어졌다. 밥 먹고 서백혼가 뭔가 하는 나부랭이 잡으러 가야할 판에 밥상을 작살내버리다니 이를 본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여기 꿩만두랑 구이요리 추가요.”

대수롭지 않은 듯 다시 음식을 시키자 상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제갈 사혁은 자신과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업신여기고 깔본다는 증거.

“당신.....”

“밥상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그 뒤에는 비무든 뭐든 다 해줄 테니까.”

제갈 사혁은 기다리는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어 먹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쪽도 만만치 않았다. 망나니처럼 달려들 때는 언제고 제갈 사혁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서도 침착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제갈 사혁은 어떻게 이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할까 고민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시간 끄는 게 불가능해지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봤다.

목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여자였다. 나이는 한 십대 후반 정도 그런데 그보다 더한 문제는

“무당?”

무당파라는 게 문제였다.

“그럼 비무를 신청하겠습니다.”

정말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럼 비무를 신청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공격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제갈 사혁은 손으로 그녀의 검 끝을 잡았다.

손으로 검을 쥐어 잡자 크게 당황한 무당파 제자는 검을 어떻게 해서든 빼려고 안간힘을 썼고 그런 그녀를 향해 제갈 사혁은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을 두 번 찔렀다.

“꺄아~”

외간남자가 목에 손을 대자 소스라치게 놀란 무당파 제자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무슨 짓이야. 이 짐승!”

목을 감싸며 앙칼지게 소리치는 모습이 적잖이 짜증난 제갈 사혁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쿡쿡 찔렀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죽었네?”

그 말을 들은 무당파 제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그런 그녀를 뒤로 한 채 등을 돌린 순간 그녀는 서럽게 땅을 치며 외쳤다.

“이렇게 실력차이가 날 리 없어! 이럴 수 없다고!”

결과적으로 무당파 제자에게 망신을 준 게 되고 청하를 생각하면 자중해야했지만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는 그 경솔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다시 한 번 더 해!”

승복할 수 없었는지 무당파 제자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고 그 순간 어디선가 손이 뻗어와 무팡파 제자의 검을 붙잡았다.

“그만하시죠.”

검을 붙잡은 쪽은 다름 아닌 이신이었다. 제갈 사혁과 달리 맨손으로 검을 붙잡은 이신의 손에서는 출혈이 일어났지만 검을 붙잡은 이신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무당파 제자를 쳐다봤다.

“실례합니다. 잠시만요.”

때마침 청하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청하에게 눈치를 주었고 그 모습은 여태까지 보아왔던 제갈 사혁의 그 어떠한 모습보다 애처로워 보였다.

“죄송해요. 갈사 소협. 태린(台麟)!”

“사저......”

태린이라 불린 무당파 제자는 검에서 손을 놓아버렸고 청하는 끝까지 검을 붙잡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이신에게 다가가 이신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신아. 그거 이제 그만 내려놔.”

“괜찮아요.”

“피가 나잖아.”

“괜찮아요.”

“화났니?”

“아마도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감정은 메마른 대지만큼이나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이신은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했다. 스승의 체면을 생각하면 어린 아이처럼 경솔하게 화를 내선 안 되지만 도저히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스승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식사를 방해하고 스승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제자라면 참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구야?”

“이 아이는 청리(淸悧). 내 새매 태.....”

“누나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누구야? 누구기에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한참 성장기인 이신의 키는 이미 제갈 사혁과 머리하나 차이였기 때문에 소년의 몸은 소녀를 압도하기 충분했다.

“난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아. 네가 사부와 눈을 마주치고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네가 무당파기 때문이야. 그게 아니었으면 숨 쉬는 것조차 용서 받지 못해.”

제갈 사혁은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때는 이익과 이해관계가 성립됐을 때뿐이라는 사실을 이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이 말을 듣고 있던 제갈 사혁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 동안 사람을 어떻게 보아왔기에 이렇게도

(잘 알고 있을까......)

제갈 사혁을 노리고 있던 태린은 갑작스레 이신이 이 일에 끼어들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이내 청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그런 사매의 속내를 알아챈 청하는 서둘러 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이미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무공에 자신 있어? 그럼 덤벼봐.”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제갈 사혁은 도저히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현군의 제자이자 무당 제 1대 제자 청리. 태린이다.”

검현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주위에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검현군이라잖아.”

“돌겠구만 아주~ 화산파하고 무당파하고 대판 싸우는 건가?”

“당연하지 등신아! 저기 저 꼬마는 명실상부 화산파의 후계자인 제갈 사혁 무진의 제자잖아. 그리고 검현군은 검에 관해선 정파 최고수니까.”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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