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67화 (67/262)

<-- 67 회: 흑요칠마 서율? -->

“그러니까 내공심법의 종류를 알아내는 거 말이야.”

“가까이에서 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고나 할까?”

서백호는 분명 정파출신이다. 그러니 내공심법은 당연히 정파의 그것일 테고 서백호가 속한 조직에서도 서백호만이 유일하게 남들과 다를 것이다. 그러니 서백호가 누군지만 알면 마교분타에서 마교인 수 십 명과 서백호를 동시에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제갈 사혁에게 필요한 건 주위의 방해가 전혀 없는 서백호와의 맞대결이다. 그러려면 서백호가 어떤 놈인지 알아야했고 그 열쇠를 지닌 사람은 다름 아닌 서율이었다.

“좋아. 이용할만해 보이니까. 데리고 다녀주지 망할 꼬맹이.”

“꼬맹이 아니거든요. 스물 둘이거든요. 아저씨!”

아저씨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붙이고 있던 가짜 수염을 때고 머리모양도 평소처럼 바꿨다.

“.......”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서율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제갈 사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왜?”

“아니요. 잘생겨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갈 사혁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렇지 나 잘생겼지?”

“네?”

“그렇다니까 난 분명 잘 생겼는데 내 주위에 있는 놈들이 하나 같이 비정상이라니까!”

당장 대사형 무원이라던가 봉명공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으니 제갈 사혁이 돋보이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이신 이 녀석도 마찬가지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부터....)

“하지만 조금 눈빛이....”

“눈빛이 뭐?”

금방이라도 감격에 겨워 울 것 같던 제갈 사혁은 갑자기 눈을 추켜세우고 서율을 노려봤다.

“늑대 같다고나 할까? 응큼하다는 뜻은 아니고 말 그대로 거친 느낌이에요.”

“사나이답잖아.”

“중원 무림에 유행하는 건 부드러운 미남이거든요. 차가운 중원 남자가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서율이 듣지 못할 만큼 조그마한 소리로 궁시렁 거렸다. 이래저래 남자의 적은 남자였다.

서백호가 있다는 신강 화청(華淸)에 도착한 제갈 사혁은 옷가게에 들려 아주 비싼 도포를 사서 서율에게 주었다.

“입고 다녀 이제부터 넌 아가씨 난 호위무사니까.”

“이렇게 하니까 본격적이네요. 아가씨라고 해봐요. 어서.”

“건방 떨긴 주제가 그렇다는 거야. 변복의 주제가!”

비싼 옷 때문이 아니더라도 서율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절강 항주에 미녀가 많다는데 서율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낭설도 사실처럼 받아드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왜 도포에요?”

“남여공용인 이유도 있지만 무림인이 아니면 여자는 도포를 잘 입지 않거든.”

하지만 서율의 입장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그럼 너무 튀잖아요. 우린 잠입한 건데......”

“그러니까 더 대담해야지. 주위를 둘러봐. 이놈도 무림인 저놈도 무림인이야. 오히려 이게 더 눈에 안 띄어.”

“주원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내 이름 주원 아니야. 그건 아버지 이름.”

“그럼?”

“제갈 사혁.”

“히익~”

제갈 사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서율의 반응은 전율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사천에서 괴인을 멸하고 재야무사 양전을 잡아오고 낭인호걸 칠망검을 쓰러트린?”

“잘 알고 있네?”

“칠망검 선배님을 은퇴시키다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이에요!”

어딜 가나 이 반응이었다. 칠망검을 이긴 건 사실이지만 제갈 사혁 때문에 은퇴한 거는 절대 아니었다.

“칠망검 그 양반 안 죽었어. 내가 조사해봤는데 하북 성도에서 목장 크게 하고 있고 저번 주에 내 이름으로 돼지고기도 보내줬어 이거 왜 이래!”

“그래도 꼭 나이 많은 선배님을 이겨야만 했어요?”

“원래 시대의 흐름은 냉정한 법이야.”

“피~”

쓸 때 없이 너무 비싼 옷을 샀기 때문에 객잔에 갈 돈이 없던 제갈 사혁은 체면 떨어지지만 남의 집 계단 위에 앉아 서백호를 찾는 일에 대해 서율과 의견을 나눴다.

“그러니까 가까이에서 보기만 하면 언놈이 서백호인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그 새낀 마교놈이 아니라 정파니까.”

“서백호 소위는 무공실력이 뛰어나 청성파의 사형제들을 뚫고 근맥도 잘리지 않은 채 사문을 뛰쳐나갔으니까요. 그러니 밑천이나 다름없는 청성파의 내공심법을 아직도 이용하고 있을 거예요.”

청성파를 뛰쳐나간 미친놈도 미친놈이지만 문제는 그 미친놈이 하필 마교로 투신했다는 사실이 정파 최대 골칫거리였다.

서백호 소위가 몸담고 있는 곳은 소월(嘯月)이라는 마교의 하부조직이다.

“서백호가 있는 곳은 무영곡이라고 알고 있는데?”

“최근에 서백호가 온 후로 소월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무영곡이든 소월이든 주로 하는 일은 이곳 화청의 치안유지.

마교가 서백호 소위를 중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정파 내에서 소위의 세작 혐의가 없어졌지만 아직도 소위의 탈문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변탐색을 위해 제갈 사혁은 일정한 복장을 착용한 무리를 뒤쫓았다. 생각대로 이들은 마교의 병사였고 싸구려 소면 하나를 시킨 채 그들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아가씨의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았지?”

“생각해보니 곧 아이를 낳으시겠구나. 에구~ 복도 지지리도 없지 우리 아가씨 하필이면 그 놈의 자식을 낳으실 게 뭐야.”

“그런 말 하지 마. 그 양반이 그래도 책임감 하나는 대단하잖아. 아가씨를 위해 그 아수라장을 뚫고 왔으니까.”

“내 속이 타서 그래! 아가씨가 어떤 분이야. 우리한테는 동생이고 딸 같은 분인데 어디서 그런 개뼉다구 같은 놈이..... 그래도 망지성 나으리가 아니었으면 그놈이 어디 가당키나 혀?”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화운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구궁성주 망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더욱 더 귀를 쫑긋 세우고 밀청했다. 하지만 그때 객잔 주인이 거칠게 음식을 내오며 제갈 사혁을 나무랐다.

“거 옷은 비싼 거 입고 와서 두 사람이 달랑 소면 하나가 뭐야! 내 참 장사를 하다하다 별 이상한 것들 다 보겠네!”

그러자 마교 병사들의 시선이 제갈 사혁과 서율에게 닿았고 마교 병사들은 아저씨 특유의 넉살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왜 그래 장팔댁 젊은 남녀가 밥 먹으러 여기 오는 건 아니잖아?”

“그려~ 너무 그러지 말아.”

제갈 사혁과 서율을 놀리며 동시에 객잔 주인을 타이르자 객잔 주인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아니 작업을 하려면 술도 좀 시키고! 어디 작업이 그냥 되는 거야? 좀 도수 높은 술도 먹이고 해야 작업이 되는 거지!”

객잔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서율은 얼굴이 빨게 졌고 제갈 사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한참을 놀림거리가 되고 난 후 다시 밀청을 하려 했지만 재수가 없게도 다시 시작된 마교 병사들의 이야기 주제가 망지성에서 마누라 뒷담화로 바뀌는 통에 별다른 소득 없이 객잔을 나와야만 했다.

“돌겠네. 진짜!”

되는 게 하나 없자 제갈 사혁은 돌멩이를 발로 차며 화를 풀었다. 그렇게 할 일 없이 돌아다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제갈 사혁은 서둘러 다른 객잔을 찾았다.

“두 분이시죠?”

점소이가 형식적으로 묻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방 하나만 부탁하지.”

방 하나만 부탁한다는 말에 야리꼬리한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제갈 사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객잔 2층으로 올라와 방이 하나라는 사실을 안 서율은 얼굴을 붉히며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방이 하나잖아? 무.... 무슨 속셈이야?”

“사람을 뭘로 보고 확 침대도 빼앗아버릴 까보다!”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허리에 찬 검집을 서율의 바로 옆 단단한 벽에 그대로 박았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기분 나쁘게.”

새벽 공기가 그대로 흐르는 맨바닥에 비스듬하게 누운 제갈 사혁은 곰방대에 계피를 넣어 피웠다. 계피 타는 냄새가 역하지만 밤에 모기를 쫓는 데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율이 잠을 자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반말을 하려면 하고 존대를 하려면 해. 일관성 있게.”

무서워서 존대를 하다가 긴장이 풀려서 하대를 하는 꼴이 영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참이었다.

“사혁은 사형제들이랑 친해?”

사혁이라니 어른들이나 대사형 빼고 제갈 사혁에게 감히 이름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친하지.”

“명문정파도 친하구나. 우리도 친했는데.”

“............”

서율은 제갈 사혁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자기 딴엔 말이라도 걸어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을 테고 그 마음을 알기에 제갈 사혁은 평소처럼 별 시답잖은 이야기라며 무시할 수 없었다.

“작은 문파였지만 사형도 사저도 전부 친했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모두들 날 동생처럼 조카처럼 귀여워해줬어.”

“..............”

“사부님도 사모님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는데 우린 마교와 내통하지 않았는데..... 막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았어. 우린 아무 잘못도 없는데.”

평소라면 힘이 없는 것이야 말로 죄라며 초를 쳤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저가 날 구해줬어. 난 사저가 너무 싫었는데 맨날 잔소리만 하고...... 그런데 그런 사저가 날 구해줬어.”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의자에 앉아 옆에서 서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뭐.... 뭐야 갑자기!”

“마음 약하게 먹지 마.”

“응?”

“네가 증오해야 할 사람을 네가 복수해야 할 사람을 그리고 원한을 갚아야 할 사람을.”

그것은 따뜻한 위로 따위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그저 필요해서 같이 다닐 뿐이다. 그래서 어떠한 위로보다 더 이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멈추지 마. 용서하지 마. 인정을 두지 마.”

“..........”

“똑같이 되갚아줘.”

“하지만.”

“괜찮아. 강호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으니까.”

그 말은 그 어떤 유혹보다 달콤했다. 그 어떤 남자가 속삭이는 말보다 강한 믿음을 주었다. 무섭지만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새 의자에 앉아 잠을 잔 제갈 사혁은 몸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못하자 평소에 하던 기초 훈련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렸고 반대 쪽 침대에서 이불을 꼭 껴안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율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는 왜 그런 거야?”

갑작스러운 서율의 질문에 제갈 사혁은 무심한 듯 서율을 쳐다봤다. 구석에서 이불을 꼭 껴안은 채 수줍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뭇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 충분했고 제갈 사혁은 천천히 서율에게 다가가 서율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잊지 않도록.”

지난 밤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친절을 베풀었다.

“그 원한을.”

그래서 잊지 않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증오를 되새겨주었다.

절대 웃으며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웃으며 말하는 제갈 사혁을 보는 순간 서율은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나룻배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갈 사혁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얼굴을 그 목소리를 보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의 생각이 의지가 몸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와 자신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아 무서웠다.

“강호를 살아가려면 목적을 확실히 해. 망설이지 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과정은 의미가 없어 결과만 생각해.”

어느새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제갈 사혁을 보며 서율은 식은땀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2012년 10월 5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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